소설리스트

108화 (108/182)

98화

경고! 비틀린 마류를 감지합니다.

정화력을 사용하시겠습니까? Yes or No.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가까이 붙어 있다 보니 대공에게서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비틀린 마류의 흐름이 피부에 좌르륵 소름이 끼칠 정도로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네가…….”

시선으로 나를 뚫어 버릴 듯 집요하게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여기 있으면…… 안 되지.”

여기 있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도 대공은 붙잡은 내 손목을 놔주지 않았다.

‘어떡하지?’

그에게서 느껴지는 비틀린 마류가 너무나 거대해서 도저히 내 선에서 해결이 될 것 같지가 않았다.

“……윽.”

내가 망설이는 사이, 대공의 무릎이 힘없이 꺾였다.

“대공 전하!”

나도 모르게 같이 주저앉아서 고개를 푹 숙인 그의 상태를 다급히 살피고 말았다.

“괜찮으세요?”

“…….”

그 순간, 신음 같고 흐느낌 같기도 한 기묘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

이거, 상태가 심각하다.

‘대충 짐작은 했지만,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해.’

하긴, 그 거대한 마나 덩어리, 전설의 보주를 그냥 생으로 흡수했으니 제정신이면 그게 더 이상했다.

“저기요, 저기요. 전하? 정신 좀 차려 보세요. 네?”

대공이 꺼질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발…….”

“…….”

“해 줘, 그걸…….”

정황상 나는 그의 말이 정화를 의미하고 있음을 알아들었다.

‘하지만 정화를 하면…….’

나는 전에 카미엘이 정화를 받자마자 이상하게 돌변했던 걸 떠올리며 망설였다.

“전하, 그건…….”

“내가.”

대공이 고개를 들었다. 창백해진 이마에 식은땀이 방울져 흐르고 있었다.

“내가, 너한테 애원하잖아…….”

끝이 묘하게 늘어지는, 서러운 투정이 섞인 것 같은 말투였다.

‘이를 어쩐다……?’

나는 고민 끝에 이렇게 말했다.

“그, 그럼 제가 해 볼 테니까, 그때처럼 그러시면 안 돼요?”

내 말에 대답하는 대신, 대공이 앓는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맥없이 무너지는 대공의 상체를 부축했다.

다시 한번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경고! 비틀린 마류를 감지합니다.

정화력을 사용하시겠습니까? Yes or No.

더 이상 망설이고만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Y, yes.’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Yes’를 선택했다.

정화력을 사용합니다.

현재 정화력 총량: 1131

현재 정화력 총량을 알리는 메시지를 보자마자, 나는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이거 다 쓰면 또 기절할 텐데.’

정화력을 다 쓰지 않도록 조절해 볼 수 없나……?

‘한번 시도해 봐야겠다.’

정화력도 어차피 내 몸에서 나가는 힘. 출력을 조절하는 방법이 없진 않을 것이다.

그렇게 마음먹고, 나는 정화력이 새어 나가는 통로를 찔끔 틀어막았다.

새로이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467만큼 정화를 시도합니다…….

아, 아냐. 이것보다는 좀 더 많이!

1131만큼 정화를 시도합니다…….

아니, 다는 말고!

뒤늦게 다시 한번 고삐를 졸라매려고 했지만, 이미 정화력은 내 손을 빠져나간 뒤였다.

1131만큼 정화에 성공합니다!

파아아앗.

일전에 보았던, 화원을 정화할 때의 그 금빛 기운이 내 몸에서 퍼져 나갔다.

“……크…….”

힘주어 이를 악물고 있던 대공이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너…….”

“쉿.”

되는대로 알아서 정화가 되도록 내버려 두었던 예전과는 달리, 나는 이번엔 보다 섬세하게 컨트롤이라는 걸 하려고 노력해 보기로 했다.

‘현재 정화력 총량으로는 다 정화하는 건 무리야.’

그렇다면 혹시…… 비틀린 마류의 유속을 낮추는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피어오른 금빛 기운이 내 의지에 따라 대공의 몸에서 용트림하는 거대한 기운을 붙잡으려고 노력했다.

그 노력에 보답하는 것일까?

마침내, 서서히 금빛 기운이 검은 기운 사이로 섞여 들기 시작했다.

* * *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실로 오랜만에 숨통을 조여 오는 고통에 허덕이면서, 카미엘은 생각했다.

‘젠, 장…….’

방심하고 있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 말밖에는 이 상황이 설명이 안 됐다.

‘하필 그 ‘보주’라는 물건이…….’

‘하트’였을 줄이야.

생각지 못한 일에 생각지 못한 일을 당하고 말았다. 카미엘은 제멋대로 요동치며 그의 온몸을 쥐어짜는 것 같은 고통에 숨을 토했다.

잔뜩 힘이 들어간 손끝이 성의 벽돌을 파고들어 가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이렇게는…… 안 된다.

안간힘을 쓰면서, 카미엘은 그의 육체라는 그릇을 뛰쳐나가려고 하는 거대한 힘을 붙잡아 보려 노력했다.

하지만 노력하면 할수록, 고통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지기만 했다.

카미엘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작은 고통 따윈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는 생각했다.

‘그때, 그…….’

유리 엘로즈.

그 여자.

로잔헤이어의 공녀.

그 달콤하고 포근한 향기…….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생각이 마구 그쪽으로 뻗어 나갔다.

잠시만 정신 줄을 놓으면 저도 모르게 그 여자를 찾아가서 품에 넣거나…….

……아니, 품에 넣게 해 달라고 애걸하게 될 것만 같았다.

‘안 돼.’

카미엘은 이를 악물고 고통을, 그리고 고통스러운 몸이 원하는 것을 간신히 참아 냈다.

온몸이 잘게 부들부들 떨리고, 이마에 핏대가 흉흉하게 솟아 불뚝거렸지만, 참아 내야만 했다.

그에게도 자존심이라는 게 있었다.

아니, 사실 말하자면 자존심밖에 남은 게 없었다.

아무리 그녀가 베풀어 준 일말의 자비에 눈이 돌아갔다 하더라도, 그 사실을 결코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애원하고 싶지는 않았다.

‘좋긴 했지. 살 것 같았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애원까지 하며 매달려야 하는가?

‘그럴 순……’

없다, 고 생각하려던 찰나였다.

코끝에 물씬, 익숙한 향기가 아주 옅게 포착되었다.

카미엘은 얼어붙었다.

‘설마.’

설마 그 여자가?

주륵. 식은땀이 등 뒤를 흘렀다.

‘안 돼.’

하지만 그가 안 된다고 생각하거나 말거나, 향기의 주인은 속절없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카미엘은 창에 드리운 커튼 옆쪽, 그늘진 공간의 벽에 등을 딱 붙였다.

‘제발 지나가라.’

그는 유리가 지나갈 때까지 여기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을 작정이었다.

굶주린 짐승처럼 입안에 침이 고였다. 핏줄이 불거진 손등에 새하얗게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실제로 유리가 구석에 서 있던 그를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친 순간.

아니, 완전히 지나치지도 않고 몇 걸음 앞에서 걸음을 멈춘 순간…….

카미엘은 깨달았다.

아.

‘이런 걸 두고 눈이 돌아간다고 하는 거였군.’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할 새도 없었다.

어느새 그는 눈앞에서 유혹적으로 흔들리는 가느다란 손목을 낚아채듯 쥐고, 흰 목덜미에 고통스러운 숨을 쏟아 내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머리가 약간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동시에 정신이 들었다.

‘!’

“대공 전하?”

유리가 어깨를 움츠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카미엘은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지금 제가 어떤 눈빛을 하고 있을지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

“네가 여기 있으면…… 안 되지.”

아무 말이었지만 가장 진심에 가까운 말이기도 했다.

그렇게 말하면서 잡은 손목을 놓아주지 않은 건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었고.

머릿속에 와르르, 본능이 쏟아 내는 소리가 들렸다.

갈취해. 취해 버려. 저건 네 거야. 내 거야. 양보할 수 없어. 죽여 버릴 거야. 죽이느니 차라리 죽어 버릴래. 내 거야. 내가 발견했어. 한입에. 털끝 하나 남기지 마. 나는…….

“……윽.”

차마 저를 감당할 수 없어서, 카미엘은 무릎을 꺾었다.

“대공 전하!”

하지만 순진한 그의 사냥감은 그 자리에서 도망가기는커녕, 같이 주저앉아 그를 살피기 시작했다.

“괜찮으세요?”

그 아이러니란.

카미엘의 입에서 흐느낌 같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건 광소(狂笑)였다.

“저기요, 저기요. 전하? 정신 좀 차려 보세요. 네?”

내가 뭐라고 했던가?

애원하고 싶지 않다고 했던가?

‘미친 소리.’

카미엘은 있는 힘껏 저 자신을 조소했다. 무슨 자존심이랄 게 얼마나 남아서 그런 미친 소리를 지껄였단 말인가?

탐식자의 본능이 이렇게 머리끝까지 올라서는, 무슨 인간인 척을 한다고 그런 고상을 떨었나?

“제발…….”

“…….”

“해 줘, 그걸…….”

카미엘은 굴복했다. 전심을 다해, 유리의 발치에 무너지고 마는 자신을 인정했다.

“전하, 그건…….”

한 번 굴복하니 두 번은 더 쉬웠다.

“내가, 너한테 애원하잖아…….”

제발.

망설이던 유리가 무어라고 걱정스럽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어떤 졸속 계약이라도 괜찮았던 그는 고개라도 끄덕여 보려고 했다. 하지만 극에 달한 고통이 그마저도 불가능하게 했다.

그다음 순간.

금빛 광채와 함께, 유리에게서 따뜻한 기운이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굶주리는 줄도 모르고 있었던 그를 오랫동안 굶주리게 한 향기가 풍겼다. 성찬의 냄새였다. 카미엘은 돌아 버릴 것 같아서 잇새를 악물었다.

“너…….”

이러면 안 돼.

이러면 내가, 너를…….

“쉿.”

유리가 조용히 하라는 듯 신호를 보냈다. 카미엘은 뭐라 판단하기도 전에 그 말에 따라 본능적으로 입을 닥쳤다. 그러는 게 유리할 거라는 계산이 한순간 들기도 했다.

그의 거대한 고통에 비하자면, 그를 짓누르는 힘에 비하자면 한없이 연약하고, 섬세하고, 부드러운 기운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앗, 잠깐……!”

그 순간 눈이 돌아간 카미엘은, 유리가 제게 내준 달콤한 성찬을 정신없이 탐하기 시작했다.

다급하게 뻗은 팔이 가냘픈 육체를 허겁지겁 끌어안았다. 카미엘은 마치 녹아내리듯 유리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환장할 것 같았다. 아니, 이미 환장해 버린 것 같기도 했다. 카미엘은 체면 따윈 개나 줘 버렸다. 인간으로서의 존엄 따위도 모른 체하기로 작심했다.

그는 갓 태어난 개 새끼나 낼 것 같은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며 유리에게 불쌍하게 매달렸다. 역시나 유리가 “이러면 안 되는데…….”라고 하면서도 그를 뿌리치지 못했다.

그가 속삭였다.

“조금만 더…….”

“안 돼요, 전하.”

“왜?”

“죄송하지만, 그게 제 한계거든요…….”

한계?

낯선 단어에 카미엘이 고개를 들고 눈을 깜빡였다. 반대로 유리는 ‘그때처럼’ 정신을 잃으려는 듯 눈을 느리게 깜빡이고 있었다.

“전하, 저…….”

툭.

유리의 고개가 마치 꺾인 꽃처럼 그의 어깨로 기울어 떨어졌다.

그걸로 카미엘의 모든 고민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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