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건국제 행사가 벌어지는 곳은 황궁의 발코니를 바라볼 수 있도록 설계된 트라폴 광장이었다. 그곳에서 황제가 건국의 날을 선포하고, 대중이 만세 삼창을 부른다.
원래대로라면 그와 동시에 황궁에서 열 대의 마차가 출발하여 퍼레이드를 하며 수도 전역에 금화를 뿌려야 했다.
하지만 그 기념비적인 식순에, 이번에는 내가 끼어들게 되었다.
순서는 이렇다. 황제가 등장하여 연설을 한다. 그다음에 내가 나가서 로잔헤이어의 보주를 시연한다.
그다음에 황제가 다시 등장해서 건국의 날을 선포하고, 예정대로 황궁에서 퍼레이드용 마차가 출발하는 것이다.
건국제 행사용 발코니는 원래 이런 행사를 위해 널찍하게 설계되었지만, 수용 인원에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원래는 황실 사람들, 아버지를 비롯한 고위 귀족만이 발코니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런 곳에 내가 전례를 깨고 입장하게 된지라, 행사를 주관하는 황실 예부에서는 상당히 민감하게 굴었다.
“아시겠습니까, 공녀? 발코니에서는 전적으로 이쪽의 지시를 따라 주셔야만 합니다.”
“알고 있어요.”
“예부의 지시보다 우선하는 건 황제 폐하의 명령뿐입니다. 혹시 도중에 폐하께서 마음이 바뀌어 공녀님께 물러나라 하셔도 그대로 물러나셔야 합니다.”
“네. 알았어요.”
내가 거듭거듭 대답하자, 예부를 관장하는 더밀 후작이 간신히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
아버지가 내 쪽을 향해 팔을 내미셨다. 칼릭스와 엘레니는 발코니에 연결된 내실에 남게 되었다. 사실 이 내실에 들어올 수 있는 것만으로도 소수의 고위 귀족에 포함된 것이라 굉장히 영광스러운 일이라는 게 예부 장관 더밀 후작의 설명이었다.
“누님,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엘레니, 누님을 배웅해야지.”
“……네, 오라버니.”
엘레니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나를 향해 말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그래, 다녀올게.”
나는 아버지의 팔을 붙잡고, 발코니에 섰다.
“와아아아아아!”
세상에.
발코니에 사람이 등장한 것만으로, 광장 전체를 꽉 채운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휘파람을 길게 내지르는 소리, 박수를 치는 소리, 황제 폐하 만세를 외치는 소리가 한데 뒤섞여 귓전을 멍멍해질 때까지 때렸다.
다수의 사람들 앞에 섭니다!
정신력이 250이 넘어 평정을 유지합니다.
‘우와.’
그만큼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발코니의 가장 앞줄에는 황제, 그리고 그 뒤에 이안과 세실리아 황녀가 섰다.
주위를 둘러보니 대공, 카미엘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게 보였다.
“황제 폐하 만세! 황제 폐하 만세!”
황제는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만족할 만큼 충분히 오래 손을 흔들어 주었다. 곧, 그가 입을 열었다.
“카시스 제국의 신민들이여.”
광장이 쥐 죽은 듯 일시에 조용해졌다.
“제국의 건국 기념일에 이렇게 그대들의 얼굴을 보니 많은 생각이 드는구나.”
그 뒤로 이어진 연설은 특별할 것은 없었다.
시황제의 업적에서부터 시작하여 선대 황제들의 위대함을 나열한 후, 그 뜻을 이어받은 현 황제가 바로 나다. 뭐 그런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광장에 모인 사람들을 감동하게 하기에는 충분했는지, 여기저기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 그럼.”
마침내 연설이 끝나고.
“오늘 이 자리에 짐이 특별한 한 사람을 부르고자 한다.”
예년과 다른 말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 주인공은 바로, 200년 만에 로잔헤이어의 핏줄을 계승한 신성 마법사, 유리 엘로즈 공녀다!”
“와아아아!”
내가 누군지도 모를 것 같은 사람들이, 황제의 말에 호응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공녀.”
황제가 내 쪽을 향해 손짓했다. 나는 그 손짓을 따라 발코니 맨 앞으로 나섰다.
“와아아아아아아!”
환호성이 아까보다 더 압도적으로 귓전을 울렸다.
‘우와.’
압도되는 걸 넘어서 약간 질리기마저 하는 느낌이었다.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선다는 건 생각보다도 훨씬 정신력을 소모하는 일이었다.
‘잘할 수 있겠지, 나…….’
이렇게 쓸데없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자, 지금부터.”
황제가 다시 입을 열자, 좌중이 다시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조용해졌다.
“유리 엘로즈 공녀가 200년 만에 봉인이 풀린 보주를 그대들의 앞에 선보일 것이다.”
“와아아아아!”
‘후.’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한숨을 내쉬었다.
보주를 감싸 쥔 양손에 땀이 흘렀다. 나는 천천히 모은 두 손을 사람들 앞에 들어 보였다.
다시 한번 거세게 환호성이 울렸다.
‘할 수 있어.’
나는 천천히 손을 열었다. 불어넣은 내 마나에 반응해 붉은 빛을 뿜어내는 보주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먹먹해진 귀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조심해서 손바닥 사이에 떠오른 보주를 허공으로 띄웠다. 타이밍 좋게 바람이 불었다.
베일이 휘날렸다. 보주가 붉은 빛을 찬연히 빛냈다.
그 전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환호성이 땅을 진동시킬 듯 울려 퍼졌다.
황제가 그만하면 됐다는 듯, 내 옆으로 한 발짝 다가왔다.
……이변이 일어난 건 바로 그때였다.
“!”
마나를 더 불어넣지도 않았는데, 보주에서 뿜어 나오는 붉은 광채가 더 강해졌다.
“이, 이게 무슨!”
“공녀님, 적당히……!”
뒤에서 예부 장관 더밀 후작이 뭐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안타깝게도 보주는 내가 통제 가능한 상태가 아니었다.
‘이, 이게 왜 이러지?’
내가 불어넣은 마나가 아니라, 보주 자체에서 어마어마한 마나가 흘러나와 사방으로 뿜어지고 있었다.
광풍이 불기 시작했다. 베일이 어디론가 날아가고, 머리카락이 미친 듯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그 압도적인 마나의 흐름이라니.
‘이거…… 통제해야 해.’
자칫 잘못해서 이 힘이 폭발하면,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이다.
뒤에서 엘리야로 추정되는 누군가가 무어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대충 그게 통제하란 소리일 거라고 생각하고,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허공에 떠오른 보주가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곳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
발코니 뒤쪽으로 향하는 보주를 보며, 나는 “피해요!”라고 외쳤다.
보주가 향하는 쪽에 서 있던 사람들이 헐레벌떡 자리를 피했다.
그런데.
“……!”
딱 한 사람이 자리를 피하지 않고 있었다.
대공이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보주를 믿을 수가 없다는 듯 황망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보주는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그에게로 향했다.
“대공 전하!”
대공이 홀린 듯이 손을 내밀었다. 빛나는 보주가 마치 자석이라도 된 듯 그 손 위에 안착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말도 안 돼…….”
보주가 대공의 손바닥을 통해 흡수되기 시작했다.
모두가 넋을 놓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아차 할 새도 없이 보주가 대공의 몸에 완전히 흡수되었다. 그와 동시에 바람이 멎었다.
“…….”
어떻게…… 이런 일이?
‘히든 에피소드: 제국의 신성 마법사’ 목표 달성률이 0%를 기록합니다!
‘히든 에피소드: 제국의 신성 마법사’ 달성에 실패합니다.
능력치가 오르지 않습니다.
황제의 용서(일회용)를 얻는 데 실패합니다.
‘신성력의 발현자’ 칭호가 ‘제국의 신성 마법사’로 승급하지 않습니다.
차례대로 떠오르는 메시지의 마지막은…….
‘히든 에피소드: 성녀의 길’이 종료되지 않습니다.
……새로운 시작을 예고하고 있었다.
* * *
“와아아아아아-!”
거센 함성이 터져 나왔다.
아무래도 광장의 사람들은 방금 일어난 사고를 두고 내가 일부러 퍼포먼스를 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대공은 발코니 안쪽에 있어서 광장 쪽에선 잘 보이지 않기도 하고 말이야.’
……일단 타이밍상 나는 물러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판단한 내가 뒤로 물러난 순간.
“윽…….”
“!”
갑자기 대공이 가슴을 부여잡고 다리를 휘청였다.
바로 그때였다.
경고! ‘비틀린 마류’를 감지합니다.
정화력을 사용하시겠습니까? Yes or No.
갑자기 익숙한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이게 대체 왜 지금……?’
어리둥절한 내 눈에, 대공을 둘러싸고 있는 새카맣게 일렁거리는 기운이 보였다.
그 어느 때보다도 짙고, 어둡고, 불길한 기운이 느껴졌다.
‘저걸…… 정화하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내가 한순간 망설인 그때, 대공이 힘을 주어 벽을 붙잡고 간신히 몸을 지탱하며 일어났다. 곧 그는 그대로 발코니 바깥으로 나가 버렸다.
순간 황제의 시선이 그에게 머물렀지만, 황제는 일단 이 행사를 무사히 끝내는 게 먼저라고 생각한 듯 다시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외칠 뿐이었다.
“훌륭한 실력을 선보인 유리 공녀에게 다시 한번 박수를 보내 주거라!”
우레처럼 박수 소리가 쏟아졌지만,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대공이 나간 자리를 불안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그럼 이것으로 제국의 건국을 기념하며…….”
아무래도 안 되겠다.
나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내실로 들어갔다. 아버지가 깜짝 놀라 작게 “유리!” 하고 외쳤지만, 대답할 정신은 없었다.
내실을 둘러보니 대공은 없었다. 다만 들어오는 문이 열려 있었다.
‘저기다.’
나는 황급히 문 쪽으로 달려가 내실을 빠져나왔다. 뒤에서 칼릭스로 추정되는 목소리가 나를 부른 것도 같았지만, 멈춰 서지 않았다.
내실을 나와서 길게 이어진 복도를 달렸다. 날은 화창하고 황제의 선언식은 대미에 이르러 있었는데, 대공은 그림자조차 보이지를 않았다.
‘대체 이 짧은 시간에 어디까지 간 거야……!’
화려하고 아름다운 만큼 무거운 옷자락을 들고 복도를 달리다 보니 금방 숨이 찼다.
어느새 인적이 드물고 그림자가 길게 드리운 복도에 진입해 있었지만, 그런 걸 신경 쓸 계제가 아니었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 거지?’
전방에 두 갈래로 길이 꺾이고 있었다. 선택을 망설이느라 서서히 발걸음이 느려졌다.
그때.
“!”
덥석, 누군가가 등 뒤에서 내 손목을 낚아챘다.
“무슨……!”
당황해서 뭐라 외치기도 전에, 목덜미로 뜨거운 한숨이 와락 쏟아졌다.
히이익. 나는 어깨를 움츠리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는…….
“……대공 전하?”
어둠 속에서 붉은 두 눈동자를 형형히 빛내며, 대공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