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아.”
잊고 있었던 보상이 시스템 메시지에 떠올랐다.
‘보주를 시연한다…… 아무리 봐도 뭔 말인지 모르겠단 말이야.’
바로 그때였다.
“유리 공녀!”
상석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 것은.
“이쪽으로 오너라!”
황제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뭐지……?’
약간 의아했지만, 일단 황제가 부르는 것이니 가 보아야 했다.
나는 사람들의 호기심 섞인 시선을 헤치고, 황제가 앉아 있는 단상 앞으로 나섰다.
“폐하.”
그 앞에는 아버지도 서 계셨다. 적잖이 마음이 놓였다.
“부르심을 받잡고 왔습니다.”
“그래, 잘 왔다.”
나를 바라보는 황제의 황금빛 눈동자가 어쩐지 평소와 좀 달랐다.
‘평소보다 좀 흐릿하신 것 같은……?’
“음. 나 먼저 물을 한 잔 다오.”
황제가 시종에게 명령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알아차렸다.
‘술에 취하셨군.’
황제는 시종이 건넨 물 한 잔을 조금 들이켜고 나서야 약간 정신을 차린 듯했다.
“유리 공녀야.”
“예, 폐하.”
“짐이 생각해 보았는데, 네게 좋은 기회를 하나 주려고 한다.”
“네?”
좋은 기회?
황제가 얼큰하게 술이 오른 붉은 얼굴로 나를 향해 벙긋 웃어 보였다.
“내일 건국제 행사 때, 네가 뭇사람들 앞에서 로잔헤이어의 보주를 보여 주었으면 좋겠구나.”
“아…… 네?”
갑작스러운 말이었다.
“폐하께서는.”
내가 얼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는지, 아버지가 나섰다.
“네가 건국제 행사의 한 축을 담당해서, 200년 만에 로잔헤이어에 신성 마법사가 출현하고 보주의 봉인을 풀었다는 사실을 신민들에게 보여 주기를 바란다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거다.”
“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이게 왜 ‘보상’이었는지 알 것 같았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내 존재를 내보이면, 명성도 오르고 능력치도 오르겠지.’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1년 안에 페르가나 아카데미의 교수가 될 만한 자격을 얻으려면, 그만한 유명세 정도는 있어야 가능할 테니까.
황제가 그런 나를 흐뭇하다는 듯 바라보면서 인자하게 말했다.
“네가 신성 마법사로 발현했다는 걸 쉬쉬하려 했으나, 워낙 발현이 대대적이었던 탓에 그것이 다소 어렵더구나.”
사실이었다.
“그러니 차라리 이번 기회에 우리 제국에 이만한 인재가 나타났다는 걸, 건국의 날에 대대적으로 선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느니라.”
“황은이 망극하오나 폐하, 제가 그런 영광을 누려도 될는지…….”
“이미 공녀의 아비인 공작과도 이야기한 일이다. 공녀는 겸손히 사양치 말고 짐의 부탁을 들어주었으면 좋겠구나.”
하긴, 200년 만에 신성 마법사가 출연했다는 건 현 황제의 치세가 안정적이라는 인상을 주기에 딱 좋았다.
여러 가지 생각이 안 드는 건 아니었지만, 일단 황제의 명령인 이상 따라야 했다.
‘아버지께서도 허락하셨다고 하니.’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무릎을 굽혔다.
“뜻이 그러하시다면, 삼가 폐하의 말씀을 받들겠습니다.”
‘히든 에피소드: 제국의 신성 마법사’ 발생!
황제는 당신이 건국제 행사에서 봉인을 푼 로잔헤이어의 보주를 뭇 백성 앞에서 보여 주길 원합니다.
무사히 보주의 시연에 성공할 시 보상을 얻습니다.
보상: 명성이 1000, 마나가 50, 매력이 50, 기품이 50 오릅니다.
황제의 용서(일회용)를 얻습니다. 황제가 딱 한 번 당신을 용서하거나, 당신이 용서해 주길 바라는 사람을 용서합니다.
‘신성력의 발현자’ 칭호가 ‘제국의 신성 마법사’로 승급합니다. 칭호의 효과: 정화력 +1000, 제국민들의 칭송과 우러름을 받을 수 있음.
‘히든 에피소드: 성녀의 길’이 종료됩니다.
‘성녀의 길이 종료된다고……?’
미심쩍은 그 한마디만 제외하면, 스케일도 크고 보상도 엄청난 퀘스트였다.
“황제 폐하께서 유리 공녀에게…….”
“폐하께서 유리 공녀를 정말 아끼시는 게 분명해요. 건국제의 그 영광스러운 자리를 허락하시다니…….”
“혹시 유리 공녀를 황태자비감으로 내심 생각하고 계신 게 아닐까요?”
“세상에, 그럴 수도 있겠네요.”
사람들의 술렁거림에도 황제는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급작스러운 명령에 공녀가 충실히 따라 주어 고맙구나. 내일, 공녀의 시연을 기대하도록 하마.”
“제국민으로서 당연한 일을 할 뿐입니다, 폐하. 기대에 부응하도록 전념하겠습니다.”
그렇게 다소 파란을 남긴 채 건국제 전야 무도회가 끝났다.
* * *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버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칼릭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이냐, 칼릭스?”
“몸도 성치 않으신 누님께서 왜 그런 어려운 자리에 얼굴을 내밀고, 황제 폐하의 격을 드높이는 일을 하셔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국민으로서 폐하의 요망에 따르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아버지.”
“다소 걱정이야 된다지만, 네 누이에게도 득이 되는 일이지 않으냐?”
“……그야…… 그렇습니다만.”
칼릭스가 석연치 않아 하면서도 입을 다물었다.
그때, 가만히 있던 엘레니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 전 칼릭스 오라버니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언니가 아직 그런 자리를 감당하기에는 조금…….”
건강을 말하는지, 내 자질을 말하는지 알 수 없는 말투였다.
“성공한다면 당연히 언니에게 득이 되겠지만, 자칫 실패하면 저희 로잔헤이어의 명예는 물론 황제 폐하의 명예까지 실추할 수도 있잖아요.”
“……이미 봉인을 푼 보주를 보여 주는 것이니 실패할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느냐? 걱정을 너무 해도 네 언니에게 실례가 되는 법이니 그만하거라.”
“……네, 아버지.”
엘레니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마차 안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때, 갑자기 아버지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유리, 혹 네가 내키지 않는다면……”
“아니에요, 아버지. 저는 괜찮아요.”
나는 얼른 손을 내저었다. 그렇게 엄청난 보상을 주는 퀘스트를 포기할 순 없었다.
“이미 폐하의 앞에서 하겠다고 말씀을 드린걸요.”
“……그래. 그렇지.”
“아버지 말씀대로 그저 봉인을 푼 보주를 사람들에게 보여 줄 뿐인걸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버지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칼릭스도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그리고 바로 다음 날.
갑자기 건국제에서 엄청난 역할을 맡아 버리게 된 나는, 예정과 달리 치장에 좀 더 힘을 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내게는…….
로제타 부인의 회심의 역작, ‘신성한 빛의 드레스’를 착용합니다!
역작 드레스의 착용 효과로 매력이 50, 기품이 50, 정신력이 50 오릅니다.
사람들이 당신에게서 약간의 후광 효과를 목격합니다.
내가 신성력을 발현한 순간에서 영감을 받은 로제타 부인이 제작한, 역작 드레스가 있었다.
머리에 드리우는 베일까지 포함한 드레스가 너무 과하다고 생각해서 옷장에만 넣어 두었는데, 이런 식으로 빛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결혼식 날의 신부보다 더 화사하세요, 공녀님.”
“너희들이 꾸며 놓고서 그런 말을 하면 자화자찬이 되는 거 아니니?”
내 말에 에나와 헤일리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방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똑똑 울렸다.
“누님, 에스코트를 하러 왔…….”
문이 열리자마자 찾아온 용건을 말하던 칼릭스의 말이 스르륵 멎었다.
나는 약간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어서 와, 칼릭스.”
칼릭스는 잠시 말문이 막힌 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쑥스러워진 내가 말했다.
“이상하니?”
“이상하지 않습니다.”
칼릭스가 재빨리 대답했다.
“대체 이런 드레스는 언제……?”
“로제타 부인이 개인적으로 시간을 내서 만들어 준 거야.”
“솜씨가 대단하군요.”
“그런 편이지.”
칼릭스가 평소보다 더 조심스럽게 내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평소와 다른 태도에 나는 약간 어색해하며 손을 얹었다.
“다녀오세요, 공녀님.”
“다녀올게.”
나는 방을 나서며 칼릭스에게 말했다.
“네가 에스코트를 하러 올 줄 몰랐어. 아버지가 오실 줄 알았는데.”
“아, 그게…….”
칼릭스는 생각만으로도 즐거운지 히죽 미소를 지었다. 뭔가 있다고 말하는 듯한 그 미소에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뭔가 있니?”
“아무것도 없습니다.”
칼릭스가 깔끔하게 대답하며 웃었다. 그 미소 역시 평소보다 30%쯤 더 빛나고 있었다.
‘뭐가 있긴 하구나.’
나는 속으로만 생각하면서 칼릭스와 함께 천천히 메인 로비로 내려갔다.
“유리.”
“…….”
아버지와 엘레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늦어서 죄송해요.”
“……아니, 아니다. 이 정도면 늦을 만도 하구나.”
“이런, 아버지 입에서 이 정도까지 말이 나왔으면 정말 극찬이나 다름없네요.”
“녀석, 참.”
내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아버지도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만 가자꾸나. 시간에 늦으면 안 되지.”
“네.”
“보주는 가지고 있느냐?”
“설마 그걸 놓고 오겠어요?”
보주는 어제 황제의 말을 들은 엘리야가 밤늦게 내게 돌려주고 갔다.
“아비로서 걱정이 돼서 말이다.”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아버지. 잘 해낼게요.”
“그래.”
우리는 마차를 타고 출발했다. 전날과 달리 마차는 두 대를 나눠 타고 가게 되었는데, 그건 다 내 옷차림이 조금도 흐트러져서는 안 된다는 칼릭스의 주장 때문이었다.
당연히 이번에는 아버지와 타게 되겠거니 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내가 먼저 탄 마차에 오른 건 칼릭스였다.
“너랑 같이 가게 될 줄은 몰랐는데.”
“……혹시 싫으십니까?”
“아니, 아니. 그건 아니야. 진정하렴.”
“……크흠.”
칼릭스가 목이 타는지 헛기침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