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춤을 추다 부족해진 체력과 떨어진 당을 보충할 수 있게끔, 아이스크림과 손으로 집어 먹을 수 있는 작은 사이즈의 케이크와 샌드위치, 그리고 카나페 같은 음식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뭘 드시겠습니까?”
“아이스크림부터 먹을래.”
연회장에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냉방을 하고 있는데도 꽤 덥게 느껴졌다.
칼릭스가 조그만 아이스크림 컵을 집어 내게 건네주었다. 바닐라 맛이었다. 나는 조그만 스푼으로 아이스크림을 조금 떠서 혀를 식혔다.
“하, 살 것 같다.”
“여기 레모네이드도 좀 드세요.”
“응, 고마워. 칼릭스, 너는?”
“저도 먹습니다.”
칼릭스는 달군 모래를 이용해 즉석에서 끓여 주는 진한 커피를 한 잔 받았다.
냄새야 무척 향긋했지만, 시커멓고 뜨거운 김이 풀풀 나는 게…….
“그거 마시면 오늘 밤 잠은 다 자겠는데.”
칼릭스는 대수롭잖게 어깨를 으쓱하며 커피를 마셨다.
“어차피 집에 가서 할 일이 있습니다.”
그랬다. 어머니의 칩거로 아버지의 일이 늘어난 만큼, 소공작인 칼릭스도 꽤 바빠졌다.
“바쁘구나. 너야말로 건강 챙겨야 하는 거 아냐?”
“……오러 엑스퍼트의 건강을 염려하는 대신, 좀 더 생산적인 일을 하시죠. 예를 들어 지금이라도 휴게실에 가서 쉬신다든지.”
헹. 그럴 것 같으냐? 나는 코웃음을 쳤다. 칼릭스가 그런 날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바로 그때였다.
“……여기 있었군요.”
“엇.”
반쯤 남은 아이스크림을 뜨던 나는 놀라서 되물었다.
“엘리야 경?”
“…….”
엘리야는 어딘지 부루퉁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설마…….’ 하다가 자리를 비켜섰다.
“경도 아이스크림 드시려고요?”
“……지금 제가 그거 먹자고 여기까지 온 걸로 보입니까?”
“아니에요? 맛있는데.”
“…….”
엘리야가 거하게 한숨을 쉬었다. 나는 괜히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뻘쭘해져서 아이스크림만 퍼 먹었다.
“그게 그렇게 맛있습니까?”
“네? 네.”
“……마라케시 경, 듣자 하니 제가 불쾌해져서 묻는 건데, 지금 제 누이에게 시비를 걸고 계시는 겁니까?”
엘리야가 이건 또 뭐야? 하는 눈빛으로 칼릭스를 바라보았다.
‘으아앗.’
하필이면 제일 성격 까칠한 이 두 사람이 마주치다니. 나는 황급히 두 사람 사이에 쏙 끼어들었다.
“시비라니, 당치도 않아. 칼릭스, 엘리야 경은 그저 원래부터 말투가 이 모양인 거야. 그쵸, 엘리야 경?”
“내 말투가 이 모양이라니, 대체 무슨 뜻입니까, 그게?”
“그야 말 그대로의 뜻이죠.”
“허.”
엘리야가 헛웃음을 토했다. 나는 다 먹은 아이스크림 컵을 대기 중인 시종에게 건네주고 물었다.
“아무튼, 엘리야 경. 제게 볼일이 있으신 거죠?”
마침 잘됐다. 나는 틈을 노려 엘리야에게 춤 신청을 다시 해 볼 생각을 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볼일, 뭐야? 빨리 말만 해. 그리고 춤추자.’
“……왜 그렇게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겁니까?”
“그냥 올려다본 건데요.”
“부담스럽습니다.”
“그럼 눈을 네모로 뜰까요?”
“예?”
“농담이었어요, 농담.”
나는 하하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나도 모르게 반발심이 들어서 그만.
“아무튼, 볼일이 뭐예요?”
“……거, 그, 뭐냐.”
엘리야가 갑자기 시선을 피하며 흠흠, 헛기침을 했다.
“아까 저쪽에서 봤습니다만, 즐거워 보이더군요.”
“아까? 아, 춤추는 거 보셨어요?”
“……네, 봤습니다.”
“헤에.”
나는 씩 웃으며 엘리야를 부러 빤히 올려다보았다.
“재미있어 보이셨구나.”
“…….”
엘리야가 더더욱 불편한 기색으로 내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내 앞을 떠나지는 않았다.
‘헹.’
나는 내심 픽 웃었다. 그렇게 싫다고 하시더니, 결국 이렇게 찾아올 거면서 말이야.
“경.”
“……예.”
“저랑 재미있는 거 하실래요?”
“……예?”
순간적으로, 엘리야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칼릭스가 경악해서 “누님!” 하고 외쳤다.
“어? 왜?”
“그, 그, 그 말투! 그 말투는 대체 뭡니까!”
“춤추실 거냐고 여쭤본 건데……?”
“아니, 누가 춤출 거냐는 말을 그렇게 해요!”
“내가……?”
“하!”
답답하지 가슴을 두드리는 칼릭스를 보며, 나는 멀뚱히 생각했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과민 반응이람?’
“……그만하면 됐습니다, 소공작.”
그때, 엘리야가 나섰다.
“나는 충분히 알아들었으니, 행여 내가 오해할 거란 걱정은 안 해도 됩니다.”
“당연히 오해하시면 안 되죠. 내 누이는 정말 별 뜻 없이 춤추실 거냐고 물었을 뿐이니까.”
“나도 알아들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엘리야가 내 쪽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겠노라고 대답할 참이니까, 자리를 좀 비켜 주시겠습니까?”
“허?”
칼릭스가 뭐라고 할 틈은 없었다. 내가 엘리야가 내민 손에 자연스럽게 손을 얹자마자 — 그의 가르침에 익숙해진 나는, 엘리야의 웬만한 명령은 생각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허락하는 버릇이 생겼다 — 나를 끌고 다시 무도회장의 중심으로 향했기 때문이었다.
“어라?”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다시 춤을 추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
“앗, 저기 보세요. 마라케시 경이 춤을 다 추네요.”
“상대는, 어머. 이번에도 유리 공녀네요.”
“공녀는 아까 황태자 전하와도 춤을 추었는데.”
“세드릭 에스테반 경하고도 추었어요.”
“그 정도면 이 회장에 쓸 만한 독신남들은 죄다 공녀에게 춤 신청을 하고 계시다고 봐야겠네요.”
“…….”
자기가 먼저 춤을 추자고 해 놓고서, 엘리야는 어쩐지 불편한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경, 어디가 안 좋아요?”
“이 자리가 안 좋습니다.”
그렇게 대꾸하면서, 엘리야가 시작하는 음악에 맞춰 내 허리를 끌어당겼다.
“이 자리가 안 좋아요?”
“이런…….”
영 못할 줄 알았는데, 엘리야는 그럭저럭 세드릭만큼은 나를 리드할 줄 알았다.
“이런 춤 같은 건 딱 질색입니다.”
“네?”
이게 무슨 사자가 개풀 뜯어 먹다 체하는 소리야?
“경이 먼저 춤추자고 신청하셨잖아요?”
“그야…….”
엘리야가 짜증스럽게 나를 홱, 끌어당기며 말했다.
“당신이 하도 즐거워 보여서 그랬습니다. 왜, 안 됩니까?”
“아니, 안 되는 건 아니지만…….”
내가 무슨 춤에 환장한 것도 아니고, 일부러 이럴 것까지는 없는데.
‘아니, 불평하지 말자. 적어도 오늘은 이 사람하고 꼭 춤을 춰야 하는 이유가 있으니까.’
나는 튀어나오려던 불만을 꾹 참고, 말을 곱게 돌렸다.
“……그렇게 싫으신데도 같이 놀자고 해 주셔서 감사해요.”
“……지야.”
“네?”
“감사할 것까지야, 라고 말했습니다.”
엘리야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좀 자세히 살펴보면, 마냥 짜증스럽기만 한 게 아니라 어딘지 민망해 보이는 기색이 섞여 있었다.
‘……꽤 부끄러운가 봐, 이런 게.’
음…… 나는 나도 모르게 엘리야로부터 시선을 살짝 피했다.
왜일까? 이안이나 세드릭, 칼릭스와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엘리야가 수줍어하니 나도 약간 긴장이 됐다.
“……표정이 왜 그럽니까?”
“네?”
살짝 시선을 피하면서 나는 대답했다.
“제 표정이 뭐요?”
“아니…….”
엘리야가 말끝을 흐리다가, 내가 다시 턴을 하며 멀어지는 틈을 타 무어라고 말했다.
“네? 안 들렸어요.”
“못 들었으면 됐습니다.”
“뭐예요, 그게? 가르쳐 줘요.”
“…….”
다음 순간, 엘리야가 평소보다 조금 더 힘을 주어 나를 원래 박자보다 약간 빠르게 품으로 끌어당겼다.
‘앗.’
안긴 것 같은 자세가 되어 나도 모르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엘리야가 말했다.
“……별로 즐거워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제, 제가요?”
왠지 모르게 또 얼굴이 더워졌다.
“아, 아닌데. 그럴 리가 없는데.”
“나랑 추는 건…….”
엘리야가 한 박자 쉬고, 이렇게 말했다.
“……별로 즐겁지 않은 겁니까?”
“!”
‘눈빛이 침울해 보여.’
눈의 착각인가……?
“……대답이 늦군요.”
“아,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나는 서둘러 부정했다. 하지만 엘리야는 이미 표정이 시들어 버렸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냥 시큰둥해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미묘하게 서운한 기색이 섞여 있었다.
“진짜 아니에요. 즐겁지 않은 게 아니라, 그냥…….”
“그냥……?”
“겨, 경이 민망해하니까.”
나는 약간 말을 더듬으며, 눈을 맞추려고 노력하며 말했다.
“저도 괜히 민망해져서 그랬어요.”
“……하.”
엘리야의 얼굴에 그제야 비스듬하게나마 미소가 걸렸다.
“그러니까.”
“으왓.”
그가 다시 한번 더 나를 끌어당기며 속삭였다.
“나 때문에 수줍어졌다는 말입니까?”
“그게…… 그렇게…… 되겠죠?”
“흠.”
엘리야의 얼굴에 조금 더 웃음이 번졌다. 어딘지 모르게 의기양양해 보이는 그런 웃음이었다.
“그렇군요. 알았습니다. 당신은 즐겁지 않은 게 아니라, 단순히 수줍어하고 있을 뿐이라는 걸.”
“그, 그 수줍어한다는 말 좀 그만하시면 안 돼요?”
“사실이잖습니까.”
“아으으, 진짜.”
나는 나도 모르게 입술을 삐죽 내밀고 말았다. 그러자 엘리야가 돌연 하하 웃는 게 아닌가?
“알았습니다. 알았어요. 그만할 테니까 표정 풀어요.”
“…….”
“기왕이면 나도 웃는 얼굴을 한 번쯤 보고 싶긴 하니까.”
“……이미 늦었어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고.”
자신만만하게 자기 페이스를 되찾은 엘리야는, 그 이후로도 박자를 제멋대로 셌다.
‘왠지 나를 품으로 끌어당길 때만 조급해지는 것 같지만, 착각이겠지……?’
어쨌든 춤은 다소 엉망진창으로 끝났다.
엘리야 마라케시와 춤을 추었습니다!
‘우정 이벤트: 건국제의 추억’ 달성률: 100%
축하합니다! 이벤트 달성률이 100%가 되었습니다.
“하아.”
드디어 성공이다.
안도감에 나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오늘 이 이벤트를 위해 굽 낮은 신발을 챙겨 신고 오긴 했지만, 이쯤 되니 발이 살살 아파 오기 시작했다.
보상으로 명성이 300, 매력이 50, 기품이 50 오릅니다.
보주를 시연할 기회를 얻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