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4화 (104/182)

94화

“…….”

이상했다.

부끄러워하고 있는 쪽은 분명 세드릭이었는데, 약간 떨리고 있는 그의 회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마치 나도 그의 감정이 옮은 것처럼 거짓말같이 수줍어졌다.

“그…… 경.”

“예.”

“생각보다 춤을 굉장히 잘 추시네요. 그러니까 제 말은, 그게…….”

수줍어져서 아무 말이나 하기 시작했는데, 세드릭이 말없이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그렇습니까?”

작게 웃으며 안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공녀를 불편하게 해 드린 게 아니라서 다행입니다.”

‘이, 이 남자…….’

혹시 정말로 고단수인 게 아닐까?

순간적으로 떠오른 의문이었지만 몹시 신빙성 있게 느껴졌다.

내가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세드릭은 다시 평소의 무뚝뚝한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남은 시간 동안 그는 마치 군인이 제식 훈련을 하듯 정확한 동작으로 나를 인도했다. 우리는 타의 모범으로 교본에 실려도 될 것 같은 모습으로 한동안 춤을 추었다.

그리고 마침내 곡이 끝났다.

세드릭 에스테반과 춤을 추었습니다!

‘우정 이벤트: 건국제의 추억’ 현재 달성률: 50%

춤이 멈추고, 예의상 으레 하는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도 따라서 짝짝, 박수를 치며 세드릭에게 말했다.

“즐거웠어요, 경.”

“저도 그랬습니다.”

“음, 그럼 저희……”

춤도 췄고 목도 마른데 뭐라도 마시러 갈까요, 하고 권유하려던 순간.

“……여기 계셨군요, 누님.”

흠칫.

나도 모르게 어깨를 떨게 하는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 칼릭스?”

“…….”

이쪽을 지그시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를 마주하자,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잘못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몸이 안 좋으시니 조심하시는 게 좋겠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칼릭스가 나 말고 세드릭 쪽을 스윽, 날카롭게 쳐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세드릭은 그 눈빛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가 집중한 건 다른 쪽이었다.

“공녀, 몸이 안 좋으셨습니까?”

갑자기 무섭도록 찌푸려지는 미간을 보고, 나는 다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설마요. 감기로 앓아누운 건 애저녁이고, 이제 다 나았어요. 칼릭스가 괜히 저를 걱정하는 것뿐이에요.”

“그렇습니까?”

대답하면서도 세드릭은 어딘지 못 미덥다는 눈빛이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신용이 없었나……?’

짧게나마 나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그런 눈빛이었다.

“에스테반 후작, 저희 누님께 볼일이 끝났다면 제가 누님을 모셔 가도 되겠습니까? 누님을 좀 휴게실에서 쉬시게 하고 싶군요.”

“예, 그렇게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니…….”

황당했지만, 내가 뭐라고 할 틈도 없이 칼릭스가 나를 에스코트하기 시작했다.

“칼릭스, 나 정말 괜찮은데.”

“정말로 몸이 괜찮은 다른 레이디들도 이 정도 되면 한 번쯤은 휴게실에서 지친 발을 쉬어 가고자 하십니다.”

“나 오늘 굽 높은 신발 안 신었어. 보여 줄까?”

“무슨……!”

칼릭스의 얼굴이 벌게졌다. 나는 아차 했다.

‘여기, 여자는 발하고 다리를 드러내지 않는 게 상식인 세계였지.’

“농담이었어.”

“농담이라도……!”

재빨리 변명했지만 소용없었다. 화를 내려는 듯 칼릭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농담이라도…….”

하지만 내 표정을 보더니, 그의 목소리가 점점 흐려졌다.

“……아무튼, 그런 말씀은 하시는 게 아닙니다.”

“으응, 조심할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열심히 대답했지만, 칼릭스는 여전히 그런 내가 못 미더운 눈치였다.

나는 이 주제로부터 칼릭스의 신경을 돌려놓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저기, 칼릭스.”

그러자면 이게 딱이었다.

“네?”

“우리 춤출까?”

“……네?”

칼릭스의 발걸음이 뚝 멎었다. 나는 이크, 하고 어깨를 움츠렸다.

‘쉬어야 할 사람이 춤추자고 했다고 또 뭐라고 하겠다.’

눈치를 살피는 내게, 칼릭스가 되물었다. 어딘지 멍한 표정이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어? 그냥, 춤추자고…….”

“누님이, 제게요?”

“응…… 내가 그랬는데.”

“…….”

칼릭스는 잠시 얼어붙은 것처럼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었다.

“혹시 싫으면……”

“싫지 않습니다.”

예상외로 단박에 대답이 돌아왔다. 칼릭스가 다급하게 다시 한번 말했다.

“싫지 않습니다. 정말입니다.”

“그, 그래?”

“예.”

내 손을 잡은 칼릭스의 손에 약간 힘이 들어갔다. 나는 음…… 하고 그런 그를 잠깐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럼 갈까?”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응.”

휴우. 칼릭스의 안내를 따라가며, 나는 속으로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거절당하고 곧바로 휴게실로 끌려가는 줄 알았네.’

엘리야와 달리 칼릭스는 단호해서 한 번 거절당하면 여지가 없을 게 뻔했다.

‘성공해서 다행이야.’

칼릭스는 어딘지 기묘하게 뻣뻣한 동작으로 나를 이끌어 회장 중간으로 향했다.

아직 음악이 시작하기 전이라,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칼릭스가 먼저 나를 향해 오른손을 왼편 가슴에 얹고 고개를 숙여 보였다.

나도 다급하게 치맛자락을 붙잡고 무릎을 굽혔다.

타이밍 좋게 음악이 시작되었고, 칼릭스가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아 이끌었다.

시작하기 전에는 한없이 뻣뻣하더니, 시작하고 나니 칼릭스는 꽤 능숙했다. 이안만큼은 아니지만, 이안의 나이 정도가 되면 그의 수준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갑자기 능숙해졌다’라는 칭찬을 하면 칼릭스가 또 굳어 버릴 것 같아서,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칼릭스.”

“예, 누님.”

“너 그러고 보니까 키가 좀 큰 것 같아.”

예전 사냥제 때 춤을 췄을 때보다 약간 더 눈높이가 높아져 있는 것 같았다.

“성장기니까요.”

칼릭스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런가?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키가 크시니까, 너도 비슷하게 자랄 것 같아.”

“그럴 겁니다.”

퉁명스럽게 대답하면서, 칼릭스는 살짝 눈을 내리깔아 내 시선을 피했다.

‘……별로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나?’

뭐라고 해야 할까, 세드릭이나 이안, 엘리야와 달리 칼릭스의 감수성은 좀 섬세한 데가 있었다.

‘아직 어른이 안 돼서 그런가?’

……라고 말하면 분명 화내겠지.

“엘레니는 어떻게 됐어?”

“엘레니는 춤을 추고 나서 테라스 쪽에 데려다주었습니다. 쉬고 싶다고 해서요.”

“음, 그렇구나.”

하긴, 오빠가 춤을 신청해 줘서 간신히 체면치레는 했다지만, 오늘 엘레니가 겪은 일이 다 무마되는 건 아니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은근히 조롱거리가 되느니, 살짝 몸을 감추는 게 훨씬 더 나은 선택이기는 했다.

“누님은…….”

“응?”

나는 칼릭스의 리드를 따라 빙그르르 턴을 하면서 대답했다.

“왜? 뭐 묻고 싶은 거라도 있어?”

“……저나 엘레니가 밉진 않으십니까?”

“뭐?”

잘못 들은 것 같아서 되묻자, 칼릭스가 꾹 입을 다물었다.

‘음…… 아무래도 내가 들은 게 맞는 모양인데.’

나는 천천히 스텝을 밟으며 생각했다. 뭐라고 대답을 해 줘야 하나?

“이렇게 말하면 어떨지 모르지만, 별생각 없어.”

“…….”

“너나 엘레니나…… 동생이잖니.”

나를 건드리지만 않으면 별로 상관없다고 해야 할까?

‘물론, 엘레니는 기회만 있으면 호시탐탐 나를 노리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절머리 나게 싫거나 그렇지는 않다.

‘먼저 공격하면 밟아 주겠지만…… 내가 먼저 뭘 어떻게 할 생각은 들지 않아.’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

미워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는데, 칼릭스는 이상하게 더 침울해 보였다.

“……누님이 어차피 떠나실 예정이기 때문입니까?”

“아, 응. 그래서 그런 걸 수도 있겠다.”

어차피 이번 1년…… 아니다, 시간이 꽤 흘러서 정확히 말하자면 9개월 정도만 남았다.

그 정도만 보면 그만일 사이.

감정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건 생각보다 훨씬 더 품이 드는 일이니 말이다.

“…….”

어째서일까, 제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을 해 줬는데도 칼릭스는 아까보다도 더 침울해 보였다.

“그래도 아직 구체적으로 어디로 떠나야겠단 계획은…… 없다고 하셨죠?”

“음…….”

이제 와서 ‘그거 거짓말이야.’라고 털어놓으면…… 안 되겠지.

나는 양심의 가책을 약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하지만 대충 구상은 있어.”

“……그렇습니까…….”

이제 칼릭스는 완전히 침울해졌다. 왠지 눈 밑이 거무죽죽하게 보이는 것도 같았다.

‘에고.’

생각보다 섬세하고 보기보다 착한 칼릭스는, 아무래도 내가 이대로 떠나 버리는 데 죄책감 비슷한 것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자기 어머니가 나를 미워해서 내가 떠나는 거라고 오해하고 있기도 하고 말이다.

‘안 그래도 되는데.’

‘여기 있다간 죽을 예정이라 피하는 것뿐’이라고 말하면,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겠지?

‘……관두자.’

조금 안타깝지만, 별수 없지. 칼릭스는 안 그래도 내가 몸이 아프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정신까지 온전치 못하다고 생각하면 과보호가 더 심해지는 결과만 낳게 될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남았다. 칼릭스와 나는 말없이 남은 춤을 이어 추었다.

마침내 곡이 끝났다.

칼릭스 로잔헤이어와 춤을 추었습니다!

‘우정 이벤트: 건국제의 추억’ 달성률: 75%

마침내 세 명까지 완료했다!

‘자, 이제 엘리야를 찾으러 가자.’

하지만 칼릭스가 내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어…….’

잠시 고민하던 나는, 단호히 말했다.

“말해 두지만, 휴게실은 안 갈 거야.”

“그건 알고 있습니다.”

칼릭스가 한숨을 쉬었다.

“휴게실은 가지 않더라도, 뭐라도 조금 드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이를 달래는 듯한 어투였지만, 나는 트집을 잡는 대신 “……좋아.” 하고 허락했다.

‘칼릭스 얘도 이만하면 많이 양보한 거니까.’

우리는 연회장 한쪽 회랑에 꾸려진 테이블을 향해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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