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연습을 많이 했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는지, 이안은 아주 능숙하게 나를 리드했다.
박자가 빨라 스텝이 굉장히 복잡했는데도, 이안의 리드를 따라서 움직이기만 하면 꽤 그럴싸하고 근사하게 춤이 나올 정도였다.
숨이 약간 차올랐지만, 그만큼 재미있었다. 복잡한 스텝을 완벽하게 성공할 때면 성취감이 들 정도였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걸리자, 이안도 나를 따라서 웃었다.
“재미있으신 모양이군요.”
나는 대답 대신 웃음을 터트렸다. 이안이 그런 내 허리를 불쑥 안아 올렸다.
“꺄악!”
나도 모르게 즐거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안이 그 상태로 나를 한 바퀴 돌려 주었다. 자연스레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들 몇몇은 자기들이 추던 춤까지 멈추고 우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다시 땅으로 내려와 이안의 품에 바싹 안겼을 때, 나는 조금 민망해져서 빠르게 속삭였다.
“어떡해요! 다들 쳐다봐요.”
“즐거워 보여서 부러워하는 겁니다.”
천연덕스러운 이안에 말에 나도 민망함을 좀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래, 신경 쓰지 말자. 어차피 추는 춤인걸.’
나와 이안은 그 상태로 곡이 끝날 때까지 춤을 추었고, 이안은 그 후에도 나를 두어 번 안아 올렸다.
“즐거웠어요.”
“공녀가 기뻐해 주신 덕분에, 저도 즐거웠습니다.”
에이드리언 카시스와 춤을 추었습니다!
‘우정 이벤트: 건국제의 추억’ 현재 달성률: 25%
바로 그때였다.
“태자 전하.”
나이 지긋한 노부인의 목소리였다. 우리는 동시에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앗.’
본 적 있는 얼굴. 황가의 시녀장이었다던 시안티크 대부인이었다.
“참으로 즐겁게 춤을 추시더군요. 이 늙은이의 눈이 미처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말입니다.”
“대부인의 시야에 걸리지 않을 정도라니, 나도 많이 발전했군.”
이안이 킥킥거리며 웃더니, 내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부인, 이쪽은 로잔헤이어 공작가의 유리 엘로즈 공녀입니다. 유리, 이쪽은 시안티크 후작가의 대부인입니다.”
“대부인, 안녕하세요.”
나는 재빨리 치마를 펼치고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대부인이 크흠, 소리를 내며 나를 날카로운 눈으로 훑어보았다.
시안티크 대부인이 당신의 기품을 관찰합니다!
축하합니다. 기품 수치가 300을 넘어 시안티크 대부인의 시험을 통과합니다.
기품이 30 오릅니다.
성공이었다.
“크흠. 보기 드물게 지적할 곳이 없는 아가씨로군요.”
“대부인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더욱 정진하면 좋은 성과가 있을 겁니다. 전하?”
시안티크 대부인이 이안을 불렀다. 아무래도 따로 할 이야기가 있는 모양이었다.
‘나야 목적도 달성했겠다.’
“그럼, 전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나는 이안에게 눈인사를 하며 곱게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안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나를 향해 작게 손을 흔들었다.
‘자, 그럼.’
어디 나머지 춤 상대들을 한번 찾아볼까?
“이런, 세상에!”
그때, 호들갑스러운 음성이 들렸다.
‘……설마 나는 아니겠지?’
못 들은 척하고 지나쳐 버리려는데.
“유리 공녀님! 정말 오랜만에 뵙는군요.”
……나구나.
어쩔 수 없이 얼굴에 미소를 띠며 뒤를 돌아보자, 웬 남자가 몹시 비굴해 보이는 자세로 손을 맞잡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왠지 좀 익숙한 얼굴인데?
“누구……?”
“바론이라고 합니다! 일전에는 공녀님의 드레스를 발로 밟아 폐를 끼쳐 드렸지요.”
“아아…….”
그렇게 말하니 기억이 좀 나는 것도 같고…….
내가 영 감을 잡지 못하자 바론의 얼굴에서도 웃음기가 약간 사라졌다. 그가 말했다.
“사냥제 무도회에서였습니다.”
“아, 아아. 네. 기억이 나는 것 같아요.”
그때 나한테 웬 영애와 함께 수작을 부리려고 했던 그 남자?
“예에, 이제야 알아봐 주시는군요! 그게 바로 저, 바론이었습니다.”
굳이 무례를 저질렀던 사람이라는 걸 내게 상기시켜 줄 필요가 있는 걸까……?
‘뭐, 세상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이 있는 법이니까…….’
이런 식으로라도 내게 기억되고 싶은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그래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이라고 말하며 그를 피해 가려는 순간.
“아니, 아닙니다, 공녀님. 이렇게 혼잡하고 사람이 많은 건국제 무도회 현장에서 저희가 딱 마주친 것도 분명히 무슨 뜻이 있는 겁니다!”
“어…… 저는 별로 그런 생각은 안 드는데…….”
“이 바론, 안 그래도 공녀님께 그날의 무례를 사죄할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남자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일장 연설을 하며, 내게 과장스러운 태도로 손을 내밀었다.
“어떻게, 저와 춤 한 곡을……”
“유리 엘로즈 공녀.”
난처한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세드릭!”
손에 와인 잔을 든, 세드릭이었다.
그가 잔 하나를 내 쪽에 건네주며 말했다.
“사람이 많아서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아, 네에…….”
내가 얼결에 잔을 받아 들자, 세드릭이 곧바로 바론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 다음 춤 상대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나?”
“예에? 에스테반 후작 각하의 파트너셨습니까!”
바론이 깜짝 놀라 손을 내저었다.
“저, 절대로! 아무 볼일도 없습니다! 예, 그렇고말고요!”
“그럼 이만 자리를 비켜 주게.”
“예! 알겠습니다!”
느물거리던 바론이 걸음아 나 살려라 빠르게 사라지는 걸 보니, 속이 약간 시원해졌다. 나는 세드릭을 바라보며 감사 인사를 했다.
“고마워요. 마침 난처하던 참이었어요.”
“그렇게 보였습니다.”
세드릭이 평소와 같이 무뚝뚝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나는 잠시 미소 띤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렇게 된 김에 춤을 신청하고 싶긴 하지만…….’
아쉽게도 세드릭은 잔을 두 개 들고 있었다. 아마 누군가에게 가던 중이었을 것이다.
“자요, 여기 잔. 돌려드릴게요.”
“…….”
세드릭은 잔을 넘겨받기는 했으나, 어디론가 가 버리는 대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어디 가 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런 곳은 없습니다.”
“잔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필요 이상으로 단호한 대답에 할 말이 없었다.
‘그래, 뭐…… 혼자서 두 잔을 다 마시려고 했을 수도 있지…….’
그때, 세드릭이 쟁반을 들고 지나가던 시종을 불러 잔 두 개를 모두 돌려주었다.
“?”
무슨 행동을 하나 싶어 잠자코 지켜보았는데, 그가 갑자기 내 쪽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유리 공녀.”
“네?”
“저와 춤을 춰 주시겠습니까?”
“……네?”
뭐야, 이거 설마 진짜?
‘땡잡았네?’
세드릭은 마치 인내심 좋은 사냥개처럼 나를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냉큼 그런 세드릭의 손에 내 손을 올리며 활짝 웃었다.
“좋아요!”
“…….”
세드릭은 흔쾌히 대답하는 나를 잠시 빤히 바라보더니, 곧 손에 천천히 힘을 주어 내 손을 잡았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그가 내 손을 놓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럼, 이쪽으로.”
왜인지 모르게 평소보다 좀 더 딱딱하고 부드럽지 못한 동작으로 그가 나를 이끌었다.
‘좀…… 서툴러 보인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이런 능숙하지 않은 모습이 그 무엇보다도 세드릭답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었다.
……왠지 놀리고 싶어지는 기분도 좀 들고 말이다.
“경, 그거 아세요?”
“?”
“저를 위기에서 구해 주시고 춤 신청을 하신 거, 굉장히 동화 속에서 나오는 기사님 같았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다만 공녀께서 난처해 보이셔서.”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는 점이 동화 속 기사님 같다는 거예요.”
“……저는 동화 속이 아니라 현실에 살고 있는 기사입니다.”
세드릭답게 딱딱하고 멋없는 대답에 나는 조금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거 아세요, 경?”
“?”
“동화 속이 아니라 현실에 살고 있다는 점이 경의 가장 큰 장점이에요.”
“……?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겠지. 나는 대답 대신 씩 웃기만 했다.
아마 이 자리에 이안이 있었다면 바로 내 말뜻을 알아듣고 맞장구를 쳐 주었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세드릭 경과 함께 있는 게 더 즐거워.’
이런 내심은 비밀로 숨겨 두기로 했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공녀께서는 즐거워 보이시는군요.”
“예. 즐거워하고 있어요.”
내가 산뜻하게 대답하자, 세드릭이 “그렇습니까…….” 하고 중얼거렸다.
다음 순간, 그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
“공녀가 즐거우시다니 저도 좋습니다.”
진심으로 꽉 찬 말에, 나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얼굴이 조금 뜨끈해졌다.
‘이…… 말주변이라곤 없는 주제에…….’
“공녀?”
“아무것도 아니에요.”
“얼굴이 조금 붉어지셨습니다만.”
“아무것도 아니라니까요. 그나저나 음악이 시작됐는데, 저희 춤 안 추나요?”
“춥니다.”
세드릭이 명령에 반응하는 군견처럼 곧바로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왓, 경.”
갑자기 허리를 파고드는 손길에 살짝 놀랐다. 내가 파드득 몸을 떨자 세드릭이 곧바로 이렇게 물었다.
“불편하십니까?”
“아, 아니요. 불편하진 않아요. 정말이에요.”
춤을 추기로 한 건 나면서 허리를 잡혀서 놀랐다고 어떻게 말한단 말인가?
“불편하시면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저는…… 그런 종류의 일을 눈치채는 데 서툽니다.”
“알고 있어요, 경.”
나는 키득거리고 웃으며 말했다.
“……알고 계시면 됐습니다.”
평소보다 미묘하게 더 무뚝뚝한 어조로 세드릭이 대답했다. 나는 세드릭의 정확하고 딱딱한 리드를 따라가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경? 설마 토라지신 건 아니죠?”
“그런 일로 토라지지는 않습니다.”
“정말로요?”
“예, 정말입니다.”
“하지만 토라지시면 꼭 말씀해 주셔야 해요. 저는 그런 종류의 일을 눈치채는 데 서툴거든요.”
“…….”
그를 흉내 낸 내 말에 세드릭은 침묵하며 시선을 약간 피하는 쪽을 택했다.
눈을 약간 내리깐 표정이 내 농담이 불쾌해서 그런다기보다…….
‘부끄러워하는 것 같은데?’
좀 더 놀리고 싶어서 그런가, 마음이 왠지 간질간질했다.
“경.”
“예.”
“저 안 보실 거예요?”
나는 일부러 빤히 세드릭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세드릭이 대답 대신 천천히 시선을 돌려 나와 눈을 맞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