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2화 (102/182)

92화

대공의 미소 띤 붉은 눈동자와, 황제의 황금빛 눈동자가 첨예하게 얽혔다.

한순간이지만, 황제의 눈에 전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싸늘한 냉기가 스쳤다.

‘대공이 반역을 저지른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둘이 반목하는 모습을 본 건 처음이야.’

게다가 대공이 이렇게까지 대놓고 황제의 명령을 어디 시정잡배 헛소리마냥 취급할 줄은 정말 몰랐다.

싸늘하게 얼어붙은 분위기 속에서, 황제가 말했다.

“그래, 네 상황이 그렇다는 걸 내가 깜빡 잊고 말았구나. 그렇다면 엘레니 공녀에게는 내가 양해를 구해야겠구나.”

“예. 그러시는 게 좋겠습니다.”

“…….”

“…….”

잠시간 침묵이 오간 후, 황제가 다시 난처한 듯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엘레니를 바라보았다.

“엘레니야.”

“네, 폐하.”

“일이 이렇게 되어 아쉽기는 하겠지만 어쩔 수 없을 것 같구나.”

황제의 말에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대공이라는 사람이 다섯 살 이후로 춤을 한 번도 못 춰 본 게 말이 되나요?”

“어떻게든 엘레니 공녀를 거절하고 싶어서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신 게 아닐까요?”

“설마. 저렇게 어여쁜데요.”

“대공 전하의 취향에는 안 맞는 모양이죠, 뭐.”

비웃음이 은근하게 섞인 조롱이었다.

엘레니도 확실히 그 소리를 들은 것 같았지만, 이내 신색을 회복하고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아닙니다. 폐하께서 절 위해 이렇게까지 마음을 써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마음씨가 얼굴만큼 고우니, 곧 너의 진가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거다.”

황제의 말이 끝나는 타이밍에 맞춰, 다시 음악 소리가 커졌다. 눈치를 보던 사람들이 삼삼오오 손을 잡고 회장 중앙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다들 엘레니와 대공의 일은 한순간에 다 잊어버린 듯 즐거워 보였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라는 걸 나도, 엘레니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대공을 살짝 바라보고 말았다.

‘허락할 줄 알았는데…….’

카미엘은 조금 졸린 사람처럼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의외야…….’

그렇게까지 황제가 싫은 걸까?

그러고 보니 대체 대공이 반역을 저지르는 이유는 뭘까?

처음으로 그런 궁금증이 들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를 빤히 바라보던 내 시선을 좇아 대공이 눈길을 보냈다.

“!”

나도 모르게 어깨가 쭈뼛 곤두섰다. 그런 나를 보고 대공이 슬쩍 눈웃음을 쳤다.

‘……뭐, 뭐지?’

너무 요사스럽게 잘생긴 탓일까, 눈웃음이 곱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정신 차리자. 저건 독버섯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잠깐 시간이 흐른 후, 그가 어떻게 하고 있나 싶어 나도 모르게 대공이 있던 자리를 눈으로 좇았는데…….

‘!’

그가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으아악.’

너무 창피해서 나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때, 칼릭스가 슬쩍 내 눈치를 살피는 게 느껴졌다.

나는 마침 잘됐다 싶어 칼릭스에게 말했다.

“무슨 용건이라도 있니?”

“그건 아닙니다만…….”

“아.”

뭔지 알겠다.

“난 괜찮으니까 엘레니에게 가 보렴.”

“……아닙니다. 누님의 몸이 안 좋으시니 계속 옆에 있겠습니다.”

“지금은 내 몸보다 엘레니의 평판을 신경 써 주는 게 더 좋지 않을까?”

물론 내가 엘레니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는 건 아니고, 어떻게든 엘레니 핑계를 대서 칼릭스를 떼어 내려는 시도일 뿐이었다.

무도회가 끝날 때까지 내 옆에서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던 칼릭스가 결국 한숨을 내쉬더니, 이렇게 말했다.

“정말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럼, 그럼.”

“하아…….”

칼릭스는 내가 그렇게 못 미더운 지 한숨까지 쉬었다.

하지만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한 엘레니를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었기에, 미적거리면서도 내 옆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칼릭스가 엘레니에게 춤을 신청하는 모습을 보면서, 주변을 살펴보았다. 아버지는 어느새 아버지께 말을 걸고 싶어서 안달이 난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대공은…….

‘응?’

그새 어디로 가 버렸는지 보이질 않았다.

바로 그때.

‘우정 이벤트: 건국제의 추억’으로 진입합니다!

연회 종료 시점까지 엘리야 마라케시, 세드릭 에스테반, 에이드리언 카시스, 칼릭스 로잔헤이어와 한 번씩 춤을 출 시 보상을 얻습니다.

보상: 명성 +300, 기품 +50, 매력 +50. 보주를 시연할 기회를 얻음.

……응?

‘보주를 시연할 기회를 얻는다고?’

이게 대체 무슨 말이지?

‘뭐…… 어쨌든 보상이라니까 좋은 거겠지?’

보주를 시연할 기회가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부분은 그냥 좋은 게 좋은 거겠거니 하고 내버려 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어차피 보상의 내용과 관계없이 우정 이벤트는 달성해야만 하니 말이다.

……대공이 좀 신경 쓰이지만, 일단 우정 이벤트부터 달성해야지.

‘좋아, 그럼 어디 한번 찾아볼까?’

티 나지 않게 주변을 돌아보면서, 나는 인파 속을 헤치고 들어갔다.

주의! 상대방의 호감도와 성향에 따라 춤 신청을 하지 않거나,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음, 그렇단 말이지.’

호감도야 대충 모자라지는 않을 것 같은데, ‘성향’이라는 단어가 좀 마음에 걸렸다.

‘에이. 어떻게든 되겠지.’

그렇게 사람들 사이를 찾아 헤맨 지 얼마 되지 않아, 내 시야에…….

‘저기 있다!’

하늘색 머리카락이 걸려들었다.

“엘리야 경!”

“!”

왠지 못마땅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던 엘리야가 곧바로 내 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의외다 싶어 물었다.

“누굴 찾고 계셨어요?”

“……뭐, 조금.”

하는 걸로만 봐서는 지인이라고는 단 한 명도 없게 생겼는데, 의외로 이런 자리에 와서 찾아야 할 만큼 가까운 사람도 있는 모양이었다.

“그럼 계속 찾으실 수 있게 자리를 좀 비켜 드릴까요?”

“아니,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엘리야가 재빠르게 부정했다.

“만나야 할 분이 계신 거 아니었어요?”

“그렇기야 했는데, 생각해 보니 굳이 찾을 필요가 없어진 것 같아서.”

“……?”

찾을 필요가 없어졌다는 건 또 뭐야?

‘하긴. 저 성격을 어찌 이해하나?’

“그럼 경, 지금부터 한가하신 거죠?”

“그렇기야 합니다만…….”

“잘됐다. 저하고 춤추실래요?”

“네에?”

엘리야가 온 얼굴로 뜨악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춤 말입니까?”

“네, 춤.”

“사양하겠습니다. 전 그런 일은 질색입니다.”

“아, 역시…….”

쉽지 않을 거라곤 생각했지만, 이렇게 단칼에 거절해 버리다니…….

‘끙. 어떡하지?’

음. 일단 다른 사람과 먼저 춤을 추고 와서 다시 한번 청해 보는 걸로 할까?

‘그래, 설마 두 번이나 청했는데 거절하진 않겠지.’

만약에 두 번째도 거절당하면, 뭐.

‘별수 없지. 그때는 좀 더 귀찮게 구는 수밖에.’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경.”

“그런 것보다 나와 저기로 가서…… 예?”

“경께서 싫으시다면 강요할 순 없죠. 전 다른 사람들과 춤을 추도록 할게요.”

“……예?”

“그럼 이만.”

나는 상큼하게 웃으며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엘리야가 황당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누군가 내 어깨를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는 게 더 빨랐다.

“누……! 이, 이안?”

“네, 당신의 이안입니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보니, 이안이 흐드러지게 웃으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춤을 신청하려고 했는데 어느새 사라져 버려서 당황했습니다.”

“앗, 그러셨어요?”

마침 잘됐다. 엘리야에게 거절당하고 다음 상대를 찾고 있었던 나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저도 전하와 춤을 추고 싶었어요.”

“그렇습니까? 이거 참 영광이로군요.”

이안이 그림으로 그린 듯한 동작으로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런 우리 둘을 지켜보던 엘리야가 “잠깐.” 하고 제동을 걸려 했지만, 때는 이미 내가 이안의 손에 내 손을 덥석 건네준 뒤였다.

“네? 엘리야 경?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아니, 됐습니다.”

됐다고 말하는 표정이 무척 떨떠름해 보여서 왜 그러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보다 먼저 이안이 나를 끌어당겼다.

당기는 힘에 엘리야에게서 고개를 돌려 이안을 바라보니, 그가 평소보다 더 다정한 웃음으로 내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가실까요? 음악이 시작되었습니다.”

“아, 네.”

부드럽게 손을 이끄는 힘에 끌려 그와 함께 회장의 중심으로 나아가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이쪽을 흘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저기 보세요, 유리 공녀가 황태자 전하와 첫 춤을 추네요…….”

“어머, 유리 공녀라면 아까 그 거절당한 엘레니 공녀의……?”

“언니죠. 아마 황가 신사들의 눈에는 언니 쪽이 좀 더 매력적으로 보였나 보네요.”

수군거림 사이를 통과하여, 우리는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현악기의 소리가 전주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에 이안이 살짝 고개를 들며 반응했다.

“아, 이건.”

“아시는 곡인가요?”

“예. 어렸을 때 어머니와 자주 이 곡에 맞춰 춤을 추었습니다.”

이안이 자연스럽게 나를 끌어당겨 허리를 안으며 말을 이었다.

“스텝이 꽤 빨라서 자꾸 어머니의 발을 밟고 말았지만요.”

“귀여워라. 그럴 때가 다 있으셨네요.”

“어린 시절이었으니까요.”

이안이 답지 않게 약간 쑥스러운 기색을 내비치며 웃었다.

나는 장난스럽게 찌르듯 물었다.

“어떠세요, 지금은? 제가 발을 밟힐 각오를 해야 하나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연습을 많이 했으니까요. 공녀의 발등은 무사할 거라고 맹세할 수도 있습니다.”

부러 엄숙하게 선언하는 톤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전하를 단련해 주신 황후 폐하께 감사드려야겠네요.”

“부디.”

그 말을 끝으로, 빠른 템포의 음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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