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그렇구나.”
칼릭스는 슬쩍 내 눈치를 살폈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어 보일 뿐이었다.
“어머니께서 털고 일어나시면 좋을 텐데 말이야.”
내 말을 들은 칼릭스가 굉장히 복잡한 얼굴을 했다.
“……그런 말씀은 안 하셔도 됩니다.”
“…….”
새어머니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칼릭스는 마치 자신이 죄를 지은 사람인 것처럼 죄책감을 느끼곤 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새어머니 이야기를 자꾸 꺼내곤 했다. 내가 언젠가 떠날 거라는 걸 칼릭스에게 계속 주지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때 가서 설마 정말 그럴 줄은 몰랐다며 방해하면 곤란하니까.’
칼릭스는 좋은 아이였지만, 므와쟁 사건 이후로 나를 과보호하는 경향이 심해져서…….
‘한 번씩 이렇게 조여 주지 않으면, 정도를 모르니까.’
나는 약간 한숨을 내쉬었다. 나라고 해서 칼릭스를 찌르면서 마음이 편한 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한 번씩 내게 이런 식으로 찔리면서도, 나를 보호하려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는 칼릭스가 좀 짠하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발목을 잡힐 수는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그나저나…….’
오랜만에 상태창을 좀 확인해 볼까?
<이름: 유리 엘로즈>
<진명: 유스티엔 리시르 엘라하 로잔헤이어>
<칭호: 어린 마법사, 마탑주의 제자, 협상의 달인, 다재다능, 보주의 해방자, 평화의 수호자, 사교계의 신성, 황태자의 동업자, 신성력의 발현자, 구혼자를 거느린, 소공작의 피보호자>
명성: 7505
마나: 418/1000
지력: 388/1000
화술: 405/1000
매력: 425/1000
기품: 330/1000
정신력: 310/1000
정화력: 1131/????
한동안 이시스 상단의 일을 붙잡고 있어서인지, 지력의 상승이 가장 두드러졌다.
히든 에피소드 발동으로 얻은 ‘소공작의 피보호자’ 칭호 효과와 더불어, 칼릭스가 꾸준히 내 옆에 붙어 있었던 덕분인지, 가장 부진하던 기품과 정신력도 300을 넘겼다.
‘다행이야.’
건국제에서 행동거지를 트집 잡히지 않으려면, 모든 수치가 최소 300은 넘어야 했다.
‘아슬아슬하게 도달한 셈이지만, 뭐.’
그래도 이 정도면 순조롭게 진행되는 중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최소한 엘레니와 경합 이벤트가 벌어질 때 지력이나 화술로 대결하게 되면 좋으련만.’
들어 주는 이 없는 소망을 읊조린 뒤, 나는 상태창을 지워 버렸다.
* * *
그리고 마침내 다음 날.
건국제 전야 연회의 막이 올랐다.
시간에 맞춰 준비를 마친 나와 칼릭스, 그리고 아버지는 현관 로비에 모여 아직 내려오지 않은 엘레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
“죄송해요, 제가 너무 늦었죠?”
오늘따라 더욱 화사하게 꾸민 엘레니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어머니께 다녀온다고 인사를 하고 오느라고 늦었어요.”
금사로 수를 놓은 연한 크림색 드레스를 차려입은 금발 머리 엘레니는 마치 천사처럼 보였다.
‘이거, 오늘 경합으로 TPO를 대결했다면 내가 졌을지도 모르겠는데.’
딱히 건국제에서 주목받을 생각이 없었던 나는 적당한 수준으로, 핀잔을 안 들을 만큼만 꾸민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이만 출발하자꾸나.”
“네.”
우리는 다 같이 한 마차에 올라탔다. 아버지가 나를 에스코트했고, 칼릭스가 엘레니를 에스코트했다.
황궁에는 마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지만, 로잔헤이어 공작가의 마차는 줄을 지나쳐 바로 입구로 향할 수 있었다.
‘VVIP 대우, 아무리 생각해도 진짜 짜릿하다니까.’
우리가 입구에 도착하자, 시종이 연회장 안쪽을 향해 로잔헤이어 일가의 도착을 알렸다.
“로잔헤이어 공작 각하와 소공작, 유리 엘로즈 공녀와 엘레니 공녀께서 드십니다!”
회장의 사람들 시선이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집중되었다.
“어머, 엘레니 공녀가 오늘따라…….”
“정말 매력적으로 꾸미셨네요.”
“그러게요. 마치 천사 같아요.”
“그나저나 유리 공녀는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게 참 오랜만이지요?”
“뭐라더라, 정양 중이었다고 했죠?”
“그래서 그런지, 오늘은 약간 수수하시네요.”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는지, 칼릭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용케 한 소리를 하는 대신 참는 눈치였다.
잠시 후.
“제국의 태양, 위대하신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황태자 전하와 세실리아 황녀 전하께서 드십니다!”
우렁차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오자, 사람들이 일제히 길을 비켜 가운데를 터서 길을 만들기 시작했다.
황제 일행은 인파가 비켜서서 만들어 낸 길로 당당히 입장했다.
그들이 지나가는 동안, 여자들은 치맛자락을 붙잡고 무릎을 굽혔고, 남자들은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얹은 채로 고개를 숙였다.
마침내.
“모두 고개를 들라.”
높은 단 위에 놓인 자리에 앉은 황제가 말했다.
“오늘, 카시스 제국의 위대한 출발을 기념하는 자리에 참석한 그대들을 환영한다.”
황제가 축배를 들었다.
“마음껏 이날을 즐기도록 해라! 제국의 풍요가 그대들을 넘치도록 즐겁게 하길 바란다.”
“황제 폐하의 말씀을 삼가 받들겠나이다.”
모두가 한목소리로 대답하고, 연주가 시작되었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파트너의 손을 잡기 시작하는데, 바로 그때.
“오, 로잔헤이어 공작가의 사람들이 아닌가!”
황제가 우리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만, 그만. 두 번씩이나 인사를 할 필요는 없네.”
황제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우리를 말렸다.
나는 그 옆에서 조그마한 세실리아 황녀가 이쪽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을 발견했다.
“!”
눈이 마주치자 깜짝 놀라 금빛 눈동자를 동그랗게 뜬 황녀에게, 나는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자 황녀의 뺨이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귀엽네.’
그때, 황제가 이렇게 말했다.
“오늘도 공작의 딸들은 아름답구나. 유리 공녀, 건강은 이제 좀 괜찮으냐?”
“황제 폐하께서 심려해 주신 덕분에 건강합니다.”
“음, 그래. 그래야지. 뭐든지 건강이 우선이야!”
고개를 끄덕인 황제가 이번에는 엘레니 쪽을 바라보았다. 감탄이 황제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이것 참, 엘레니는 오늘 참 아름답게 꾸몄구나. 눈이 다 환해지는 것 같아. 그렇지 아니하냐?”
“…….”
황제의 말에 이안은 대답 대신 가만히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황제는 개의치 않고 엘레니를 향해 싱글벙글하며 물었다.
“그래, 평소보다 훨씬 더 아름답게 꾸민 걸 보니 오늘 이 자리에 누구 마음에 둔 사람이라도 있는 모양이로구나.”
“부끄럽습니다, 폐하.”
“아니, 정말인 모양이구나!”
부정하지 않는 엘레니를 보며 황제가 눈을 크게 뜨고 즐겁게 웃음을 터트렸다.
“누군지 이름이라도 말해 보거라. 내가 그이에게 오늘 황명을 내려 너와 함께하도록 해 주마.”
“황제 폐하의 뜻이 분에 넘치옵니다. 저는 다만 오늘…….”
엘레니의 수줍은 시선이 어딘가를 향했다. 나도 모르게 그곳으로 시선이 따라갔다.
……붉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대공?’
건국제에 반역 예정자가 참석하다니, 그것 참…….
아이러니한 상황에 내가 약간 웃음을 터트릴 뻔한 찰나.
“……로엔 대공 전하께, 감사의 뜻을 전하고자 합니다.”
“!”
엘레니의 말에, 각자 자기들끼리 연회를 즐기는 것 같았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순간 이쪽으로 모여들었다.
황제가 뜻밖이라는 듯 말했다.
“로엔 대공에게?”
바로 그 순간.
경합! 엘레니와 당신의 기품 수치를 비교합니다.
경고! 당신의 기품 수치가 모자랍니다.
이런, 하필이면 기품 수치로 경합 이벤트가 걸렸다.
엘레니가 경합에서 승리합니다.
엘레니가 ‘파트너 지명권’을 갖습니다.
그와 동시에 엘레니의 입가에 그림같이 아름다운 미소가 떠올랐다.
“좀 시일이 지난 일입니다만…… 로엔 대공 전하께서 저희 언니를 구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언제?” “그때, 뱃놀이 때!” 하고 말을 주고받았다.
엘레니의 말은 계속되었다.
“한데 언니가 기회도 없고 경황도 없어 충분한 감사 인사를 드리지 못한 것 같아…… 같은 로잔헤이어로서 제가 대신 대공 전하께 감사 인사를 올리고자 합니다.”
“하하, 그런가!”
황제가 즐겁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누가 뭐라 할 틈도 없이 이어서 말했다.
“그래, 그래. 요즘은 선택받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이렇게 당차게 나설 줄도 아는 게 숙녀로서 매력적인 태도라고 하더구나. 우리 때와는 참 많이 달라졌단 말이지.”
“부끄럽습니다, 폐하.”
“카미엘, 이쪽으로 오너라.”
“…….”
대공은 잠시 무표정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기만 했다. 순간적으로, 나는 그가 황명을 거부할 것 같아 조마조마했으나…….
“알겠습니다, 폐하.”
곧 그가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황제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보니 두 사람이 참으로 잘 어울리는구나. 내 약조하였으니 카미엘, 오늘 네가 엘레니의 손을 잡아 주어야겠다.”
“…….”
엘레니의 답지 않은 행동은 계속되었다. 대공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한 걸음, 그에게 다가간 것이다.
그녀가 수줍고도 어여쁘게 웃으며 말했다.
“제게 춤을 신청해 주시겠어요, 전하?”
대공의 붉은 눈이 느른하게 한 번, 깜빡였다.
그 눈이 왠지 모르게 나를 스쳐 지나간 것 같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천천히, 대공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곧 그러마 하는 대답이 예쁘게 튀어나올 것 같은 모습이었는데…….
“거절하겠습니다.”
“!”
예상외의 말이 튀어나왔다.
엘레니는 물론 황제도, 무도회장의 사람들도 일제히 굳어 버렸다.
“황명까지 내리신 일에 제국의 신하로서 불복하게 되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만.”
전혀 안타까운 얼굴이 아니었다.
“저는 다섯 살 이후로 춤을 춰 본 적이 없습니다,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