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아하하…….”
나는 나도 모르게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한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 내 나름의 인사였다.
세드릭이 천천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렇게 아는 척을 한 이상, “그럼 이만” 하고 쌩 가 버리는 것도 이상할 것 같았다.
“잠깐만요!”
나는 세드릭을 향해 외쳤다.
“내릴게요. 잠시만……”
“거기서 기다리십시오.”
세드릭이 나를 저지했다. 그러더니 곧 마차 쪽으로 다가와, 손수 문을 열어 주었다.
“제가 해도 되는데.”
“제가 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그렇게 말하는 세드릭 때문에, 당황스러운 건 내 쪽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청혼을 거절하는 편지를 보낸 뒤 따로 연락을 주고받거나 마주친 적이 없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지금 만나는 게 그 이후로 처음이구나.’
윽. 어쩐지 그런 생각을 하니까 괜히 긴장이 되는 느낌이다.
하지만 세드릭은 나와 달리 평온한 얼굴로 능숙하게 나를 에스코트해서 마차에서 내리게 했다.
“가, 감사합니다.”
“제 기쁨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늘상 하는 특별할 것 없는 화답인데도, 이상하게 세드릭의 말은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평소에 빈말을 안 하는 사람이라 그런가……?’
“앗.”
그때, 길게 기울어지는 노을 햇살이 강렬하게 눈을 내리쬐었다.
나도 모르게 손을 올려 눈을 가리자, 세드릭이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아, 별거 아니에요. 괜찮아요.”
“이쪽으로 오십시오.”
눈을 찡그리듯이 감은 나를 세드릭이 살짝 잡아끌었다.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얌전히 딸려 갔다.
그늘 속으로 쏙 들어가면서, 강렬하게 비추던 햇살이 얼굴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살그머니 눈을 뜨자, 세드릭이 내 앞에서 햇살을 막아서고 있는 게 보였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라…….
우리는 장미 넝쿨 아래에 서 있었다. 세드릭이 팔을 들어, 늘어진 장미 넝쿨이 내게 닿지 않도록 걷어 올리고 있었다.
스쳐 지나가던 바람결에도 배어 있던 장미 향기가 코끝을 감쌀 정도로 짙게 풍겼다.
얽혀 있는 넝쿨 사이로 노을 조각이 반짝였다. 세드릭은 덤덤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마치 언제까지나 거기 서 있을 사람처럼 보였다.
“이제 괜찮으십니까?”
“네? 네…….”
나는 약간 홀린 사람처럼 정신없이 대답하면서, 세드릭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차분한 표정이 내려앉은 흰 얼굴이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여……기서 마주치다니, 굉장한 우연이네요.”
“우연이 아닙니다.”
세드릭이 담담하게 부정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
이 상황을 뭐라고 말해야 하지?
어색하다는 말이 제일 가깝겠지만, 그런 말로 표현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셨군요. 기다리고…….”
“네.”
세드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을 만나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세드릭과 장미 넝쿨이 가려 주었음에도, 노을의 조각이 뺨에 와 닿고 있기 때문일까?
약간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음…… 무슨 용건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예.”
세드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겨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래, 볼일이 있었구나.’
나는 안심하며 물었다.
“무슨 볼일이신데요?”
“이걸 드리려고.”
세드릭이 주머니에서 꺼낸 건…….
“열쇠……?”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는 작은 열쇠가 펜던트에 걸려 달랑거리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손을 내밀자, 세드릭이 열쇠를 내 손바닥에 떨어트렸다.
“저희 집으로 통하는 열쇠입니다.”
“……네?”
내가 열쇠를 받고서야, 그가 엄청난 소리를 했다.
“지, 지금 뭐라고?”
“열쇠에 마력을 불어넣으면, 저희 집으로 곧바로 이동하실 수 있습니다.”
“경의 집으로요?”
“예.”
나는 너무 당황하고 말았다.
‘그런 물건을 이렇게 쉽게 타인에게 줘도 돼?’
“경, 이건 제가 받을 만한 물건이 아닌 것 같……”
“당신에게 드리고 싶습니다.”
세드릭은 꿈적도 하지 않을 것처럼, 바위와 같은 태도로 말했다.
“아직은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하지 않다고 하셨으니…….”
“…….”
“적어도 당신이 어려울 때 도망칠 수 있는 곳이 하나 정도는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도망칠…… 곳이요?”
“예.”
세드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에는 저희 집이 가장 안전할 것 같았습니다.”
“…….”
“제 욕심일 수도 있겠지만, 받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물을 주면서 욕심을 부린다고 표현하는 사람은 경밖에 없을 거예요…….”
세드릭이 무표정한 얼굴로 인정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세상에.”
그 말에 조금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제게 도움이 필요할 때 언제든 손을 내밀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걸 받는 게 경을 도와드리는 건 아닐 텐데요.”
“그게 있으면 제가 당신의 도움이 필요할 때, 언제든 저희 집으로 오실 수 있지 않습니까?”
나는 또 한 번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억지예요.”
“억지가 아닙니다. 진심입니다.”
“…….”
“그걸 받아 주신다면, 제게 손 내밀어 주신다는 말씀을 믿겠습니다.”
이렇게까지 고집을 피우는 건 세드릭답지 않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무척 세드릭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약간은 무거운 마음으로 대답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받을게요. 단.”
“무엇입니까?”
“딱 1년만이에요.”
나는 조건을 달았다.
“딱 1년 후에, 다시 이맘때가 되어 장미가 피면…… 경께 이 열쇠를 돌려드릴게요.”
“…….”
그때가 되면 난 이 열쇠가 필요 없는 안전한 곳으로 떠나게 될 테니까.
세드릭이 베풀어 준 이 과한 호의는 거기까지면 충분했다.
“그게 싫으시다면……”
“아닙니다.”
세드릭이 고개를 저었다.
“이해했습니다. 그렇게 하셔도 됩니다.”
“그럼…….”
나는 열쇠를 꼭 쥐었다.
“감사히 받을게요. 잃어버리지 않고 소중히 가지고 있다가 돌려드릴게요.”
“예.”
세드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자신의 용건은 끝이라는 듯, 고집을 부리던 게 무색하게 아주 유순한 태도였다.
“경…….”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탐스럽게 핀 장미 한 송이가 세드릭의 얼굴께에 살짝 드리워져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그 장미를 뚝, 하고 꺾었다.
동그란 화형에, 끄트머리가 아주 살짝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는 크림색 장미였다.
“장미로군요.”
“네.”
나는 세드릭에게 꺾은 장미를 내밀었다. 세드릭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선물을 주셨는데 빈손으로 돌아가시게 하면 좀 그렇잖아요.”
“…….”
세드릭은 멍하니 장미를 바라보았다. 그 반응으로 보아하니, 이 남자에게 장미를 선물한 사람은 아직 한 사람도 없는 모양이었다.
“……제게 주시는 겁니까?”
“싫으세요?”
“아니, 그렇지는…….”
나는 씩 웃으며 세드릭의 라펠에 난 단춧구멍에 장미를 쏙 끼워 주었다.
“답례, 받아 주셔서 고마워요.”
“…….”
아까보다 조금 더 붉어진 저녁노을이, 노을을 등지고 선 세드릭의 얼굴 외곽선을 붉게 그렸다.
멀리서 일렁이는 여름 냄새가 나는 봄이었다.
* * *
그로부터 3주 정도가 지났다.
로잔헤이어의 담벼락에 가득 피었던 장미가 시들 무렵, 제국의 건국제 시기가 다가왔다.
이번 건국제 행사는 전야 무도회, 그리고 당일 건국제 기념행사가 있을 예정이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까지 이어지는 축연과 불꽃놀이로 모든 행사가 마무리될 예정이었다.
건국제 전야 무도회를 위해 로제타 의상실에는 그야말로 주문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모든 주문을 소화할 수 없어서 거절한 주문은 당연히 다른 의상실, 그것도 로제타 스타일을 가장 정교하게 모방하는 의상실들로 몰렸다.
자존심이 센 카민스키는 대타협을 거쳐 자신의 스타일에 로제타 스타일을 가미한 드레스를 선보였으나, 반응은 미미했다고 한다.
어쨌든, 덕분에 로제타 의상실에서 사용한 샤마론산 비단과 누와즈 레이스 같은 상품을 미리 독점하고 있던 이시스 상단이 중간에서 큰돈을 벌어들일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로잘린 시드니 — 내 가짜 신분 — 역시 이시스 상단에서 주요 인물로 급부상했다.
그렇게 되기까지 쏟아지는 일거리들을 몰래 붙잡고 있었기 때문일까?
“건강이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군요, 누님.”
“음…… 기분 탓 아닐까?”
“전혀 기분 탓이 아닙니다. 의사도 누님이 피곤해하시는 것 같다고 자양 강장제를 처방해 주지 않았습니까?”
“현대 사회의 사회인이란 누구나 조금씩 다 피로감을 안고 살아가게 마련이지.”
“네?”
칼릭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괜찮다는 말이야.”
“참으로 신뢰가 가는 말이로군요…….”
칼릭스가 어처구니없다는 투로 중얼거렸지만, 나는 눈썹을 으쓱하며 그 말을 무시해 버렸다.
“그나저나 오늘 엘레니가 안 보이는구나.”
말을 돌리려고 꺼낸 화제였는데, 칼릭스가 “모르셨습니까?” 하고 대답했다.
“응? 뭔데?”
“엘레니는 오늘 황제 폐하를 알현하러 갔습니다.”
“황제 폐하를?”
의아했다. 그 애가 무슨 힘이 있어서 황제를 만나러 갈 수 있는 거지?
칼릭스가 내 의문에 대답했다.
“황제 폐하께서 오랜만에 누이를 보겠다고 어머니를 찾으셨습니다.”
“아.”
로잔헤이어 공작 부인, 내 새어머니는 지금 거의 한 달째 칩거 중이었다. 만나는 사람이라곤 엘레니, 혹은 가끔 칼릭스 정도가 다였다.
근신을 핑계로 안살림도 놓아 버렸기 때문에, 아버지의 업무량이 상당히 늘어나 버렸다.
내가 살림을 배우겠다는 명목으로 일감을 나누어 줄 것을 여러 번 청했지만, 아직까지 아버지는 완고하셨다.
‘집안일을 하면 지력이 꽤 늘어날 텐데.’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생각은 아니지만.’
“어쨌든, 어머니께서 그런 상황이셔서…… 엘레니가 대신 폐하를 찾아뵙고 상황을 대충 둘러대기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