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카미엘이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잔소리하지 않아도…… 곧 깰 거야.”
사실이었다. 이렇게 왕창 약을 들이켜도 약효가 좀 돈다 싶으면 곧 깨 버리곤 했다.
‘어휴.’
인간적으로 안타깝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대로 내버려 둘 순 없었다.
그다지 정신이 멀쩡하지도 않은 사람이 이런 식으로 약에 의존하게 되는 건 결코 바람직하지 않았다.
“매일 복용량을 늘리시니 약효가 도는 시간도 점점 짧아질 수밖에요.”
따끔한 충고였지만, 카미엘은 흐트러진 채로 조금 웃기만 했다. 흐느적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흐느끼는 것 같기도 한 기묘한 웃음소리였다.
“그럼 또 복용량을 늘리면 되지.”
“진통제라면 몰라도 억제제는 복용량을 한도 끝도 없이 늘릴 순 없습니다. 요전에도 위험한 상황이……”
“잘 해결됐잖아.”
“그렇게 결과론적으로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난 괜찮아…….”
괜찮기는 뭐가 괜찮단 말인가? 헤일런은 한숨을 쉬었다. 카미엘이 중얼거렸다. 말꼬리가 한없이 늘어지는, 웅얼웅얼한 목소리였다.
“……가 없어도…… 괜찮…….”
“예?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헤일런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카미엘은 이만 나가라는 듯 손을 홰홰 저었다.
“……좀…… 내버려 둬.”
허공을 휘젓던 휘적휘적한 손짓이 툭 힘없이 떨어졌다. 가느스름하게 뜨고 있던 눈꺼풀도 드디어 스르르 닫혔다.
헤일런은 속으로만 한숨을 쉬었다.
‘오늘은 드물게 얕은 잠이나마 주무실 수 있는 날인 모양이군.’
할 수 없었다. 헤일런은 가지고 왔던 용건을 뒤로 미루고, 깨진 꽃병 조각을 밟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뒷걸음질로 방을 빠져나갔다.
* * *
“감기는 좀 괜찮아지셨습니까?”
“네?”
나는 보고 있던 서류에서 겨우 눈을 들었다. 이안이 살짝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감기는 좀 괜찮아지셨느냐고 물었습니다.”
“아, 네. 보내 주신 약들 덕분에…….”
나는 예의 바르게 말하려다가, 이안이 보낸 온갖 약초와 말린 생물들을 떠올리고 말을 바꿨다.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보내 주신 약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번쩍 나더군요.”
“하하. 그랬습니까?”
“농담이 아니라 진짜예요, 이안. 대체 말린 전갈 같은 건 대륙 어디쯤에서 약으로 쓰인다는 거예요?”
“남부 사막 지대 쪽에서는 의외로 강장제로 인기가 있는 품목입니다.”
이안이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시험해 보셔도 나쁘지 않았을 텐데요.”
“감기가 아니라 폐병에 걸린다 하더라도 시험해 볼 생각이 들 것 같진 않은데요.”
“저런. 그럼 앞으로 안 아프셔야겠네요.”
이안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묵직한 진심을 담은 직구에 나는 살짝 당황하고 말았다.
‘……농담 중에 갑자기 이렇게 확 치고 들어오는 게 어디 있어?’
……라고 솔직하게 툴툴댈 순 없었다. 나는 흠흠 목을 가다듬으며 새침하게 대답했다.
“참고하도록 할게요.”
“그래 주신다니 다행입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여기 누와즈산 수직 레이스 매입 건은…….”
“네.”
내가 일부러 일 이야기로 말을 돌린다는 걸 알면서도, 이안은 능청스럽게 잘 따라와 주었다.
우리는 한동안 열중해서 로제타 의상실 자재 공급안에 대해 열띤 토론을 나누었다.
토론 끝에 어느 정도 가닥을 잡아 갈 무렵, 이안이 불쑥 이렇게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네?”
“이번 건국제에는 당연히 참여하실 생각이시지요?”
이안의 물음에 나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민으로서 불참할 수 없는 행사죠.”
“뭐, 매년 있는 행사니 몸이 안 좋으시다면 불참하셔도 괜찮습니다만.”
“제가 참석하고 싶어서 그래요.”
“……그렇습니까?”
“?”
참석하고 싶다는 말에 이안의 목소리가 살짝 낮아졌다.
나는 서류에서 눈을 들어 그의 황금빛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그런데 어라, 눈동자에 항상 배어 있던 웃음기가 거의 사라져 있었다.
“이안?”
“건국제 행사에 참석하고 싶다는 말씀은, 혹시 파트너를 미리 정하셨다는 말로 해석해도 되는 겁니까?”
“네?”
잠깐, 무슨 소리야?
내가 얼른 알아듣지 못하고 눈만 깜빡거리자, 이안이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한번 설명해 주었다.
“파트너 때문에 건국제 행사에 참여하시는 건가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그게 그 말이었어?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파트너는 아직 정하지 않았어요.”
“그렇습니까?”
“네, 이번에는 그냥 파트너 없이 참석해 보려고요.”
괜히 그러는 게 아니었다. 저번 사냥제 때와 같이, 이번 건국제 우정 이벤트에서도 이벤트를 발동하는 조건이 있었다.
‘바로, 아무도 파트너로 선택하지 않고 행사에 참석하는 것.’
그 외에도 남주들의 호감도가 각자 일정 수준 이상에 도달해야 하는 등 세부적인 조건이 더 있었지만, 어쨌든 가장 메인이 되는 조건은 그거였다.
“파트너 없이…… 말입니까?”
이안이 흐음, 소리를 내며 턱을 매만졌다. 그러더니 곧 생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긴, 그것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군요.”
“파트너 없이 참석했다고 동정의 시선은 좀 받을지도 모르지만요.”
“……아뇨.”
이안이 드물게 단정적인 어조로 말했다.
“아무도 그럴 수 없을 겁니다.”
“네? 어째서요?”
“글쎄요. 그냥 그런 예감이 듭니다. 아무도 당신을 무시하지 못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요.”
방긋 웃으며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 이안이었다.
‘뭐, 나쁜 말도 아니니까.’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사실대로 말했을 뿐인데요.”
“전하께서는 파트너를 정하셨나요?”
굳이 궁금해서 묻는 질문은 아니었다. 그냥 그쪽에서 내게 물어봤으니까, 나도 예의상 같은 질문을 돌려줘야 할 것 같아서 하는 말이었다.
이안은 대답 대신 눈을 가늘게 하며 웃었다.
“……글쎄요, 어떨 것 같습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아주 멋진 파트너와 약속을 하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땡. 틀렸습니다.”
이안이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정답은 저도 공녀와 같이 파트너가 없다, 입니다.”
“전하께서요?”
“네.”
“의외네요…….”
건국제 정도 되는 행사에 황태자가 파트너 없이 참석하다니.
‘분명 게임 속 우정 이벤트에서는 여동생을 파트너로 데려왔는데?’
아닌가? 내 기억이 틀렸나?
“……제게 다른 파트너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네.”
이안의 질문에 나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왠지 이안의 얼굴이 어두워진 것 같았다.
‘……착각이겠지?’
“제가 누구를 파트너로 할 거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이번에는 세실리아 황녀 전하와 참석하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
이안의 얼굴에 밝은 기색이 스쳤다.
“그런 거였습니까?”
“네? 네.”
“안타깝게도 세실리아는 이번에 다른 파트너와 참석하기로 정해졌습니다만…… 그러고 보니 세실리아가 유리, 당신과 친구가 되고 싶다고 하더군요.”
“세실리아 황녀님께서요?”
의외였다. 세실리아는 무척 수줍음을 타는 터라, 게임 속에서도 대사의 반 이상이 ‘…….’로 처리될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네. 제가 당신의 이야기를 좀 했더니, 꼭 만나 보고 싶다고 하더군요.”
“말씀을 좋게 해 주신 모양이네요.”
“그렇지도 않습니다. 저는 그저 있는 사실 그대로만을 이야기했으니까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더 무서워지는데요.”
내가 킥킥 웃으며 너스레를 떨자, 이안도 함께 따라 웃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이번 건국제 전야 연회에서 세실리아에게 당신을 소개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아, 저야 좋아요.”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실리아 황녀에게 특별히 관심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친해져서 나쁠 건 없으니까.
“세실리아가 건국제를 무척 기다리겠군요.”
“글쎄요. 제가 황녀 전하의 기대를 충족해 드려야 할 텐데…….”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서류를 정리했다. 이안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자신이 없으십니까?”
“세실리아 황녀님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 없지만, 이 사업안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 있어요.”
나는 탕탕, 하고 테이블 위에 서류를 쳐서 종이를 가지런히 정리한 다음 말했다.
“이번 건국제에서는 우리가 가장 이득을 보게 될 거니까요.”
“그것 참 기대되는군요.”
“기대하셔도 좋아요. 전 자신 있어요.”
“…….”
이안은 부드러운 웃음이 밴 눈으로 잠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곧 자리에서 일어나 내 손을 잡아 올리더니, 손등 위에 입술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당신의 말을 믿도록 하지요.”
“……그, 이렇게까지는 안 하셔도…….”
여기 와서 대부분의 예의는 익숙해졌지만, 손등에 입을 맞추는 것만큼은 도무지 익숙해지질 않았다.
‘그냥 예의를 차린 행동일 뿐이라고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이안은 이런 방식이 낯간지러워 꼼질거리는 나를 바라보며 조금 웃었다.
‘아무래도 이 사람, 내가 낯설어하는 걸 알고 일부러 그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내 착각만은 아닌 것 같았다.
* * *
이안과 회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하늘 가득히 노을이 핑크빛으로 퍼져 있었다. 다소 늦은 시각, 마차는 어느새 로잔헤이어의 담벼락을 끼고 돌고 있었다.
로잔헤이어의 담벼락은 장미 넝쿨이 감싸고 있어, 늦은 봄이 되면 담벼락 가득 화형이 큰 장미 꽃송이가 주렁주렁 피어나곤 했다.
나는 마부를 향해 지시했다.
“조금 천천히 마차를 몰아 줘.”
“알겠습니다, 공녀님.”
나는 천천히 달리기 시작한 마차의 창을 내리고, 위험하지 않을 정도로만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
그리고 장미 향기를 가득 머금고 스쳐 지나가는 저녁 바람을 킁킁거렸다.
바로 그때.
“어?”
앞쪽에 익숙한 인물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잠깐, 마차를 좀 멈춰 줘.”
“예, 알겠습니다, 공녀님.”
달리던 마차가 멈추자, 나는 장미가 가득히 피어 있는 담벼락에 서 있는 인물이 누구인지 확실히 분간할 수 있었다.
‘세드릭이잖아.’
저 사람이 왜 여기에 서 있는 거지?
그때, 마차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민 나와 세드릭의 시선이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