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화 (98/182)

88화

그리고 시간이 흘러, 오늘.

“…….”

“……저, 엘리야 경?”

“…….”

나를 노려보듯 빤히 바라보는 분홍빛 눈동자를 보며, 나는 눈을 굴렸다.

‘대체 왜 저러는 거지?’

“제가 뭐 잘못한 거라도……?”

“……청혼을 받았다면서요?”

“네?”

너무 예상외의 질문이 튀어나왔다.

“에스테반 후작이 당신에게 청혼했다면서요?”

“그걸 어떻게?”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합니까?”

“아뇨, 그게 아니라. 그런 일엔 관심이 없으실 거라고 생각해서.”

“큼, 크흠!”

엘리야가 크게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말했다.

“관심이 없어도 귀에 들어오는 소식은 있는 법입니다.”

“아, 그러시군요…….”

마법에만 관심이 있는 그가 사교계 소식에 귀를 기울였다니. 참으로 별일이기는 했다.

“그래서?”

“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청혼?”

“네? 그야…….”

“설마 받아들인 겁니까!”

엘리야가 벌컥 흥분해서 외쳤다. 나는 손을 내저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너무 놀라서.

‘왜 이래, 진짜?’

“아직 나와 회로도 연결되어 있는 데다가, 고작 2서클에 불과하면서……!”

“청혼에 마법 실력 이야기가 왜 나오는데요?”

“공부가 부족한 제자가 도망치려고 하는데, 내가 지금 화가 안 나게 생겼습니까?”

“아니…….”

대체 어디부터 지적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청혼을 받는다고 해서 제가 경의 제자가 아니게 되는 건 아니잖아요.”

“그건 당연하죠!”

“그럼 왜 화를 내시는지……?”

“그야…….”

엘리야가 말문이 막힌 듯 입술을 더듬거렸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아무튼 왜 궁금해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청혼은 정중히 거절했어요.”

“……그렇습니까?”

“네.”

엘리야가 아까까지와는 다른 복잡한 눈빛으로 나를 잠시 빤히 바라보았다.

“세드릭 에스테반 후작이라면 꽤 괜찮은 신랑감 아닙니까?”

“그야…… 그렇죠?”

“그럼 왜 그를 거절한 겁니까?”

“아니. 청혼을 받아들였냐고 화를 내신 분이 할 만한 질문은 아닌 것 같은…… 네에, 네에.”

절로 뾰족해지는 엘리야의 눈초리에 나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냥, 아직 제가 준비가 안 된 것 같아서요.”

“…….”

엘리야는 뭔가 미진한 표정으로 마뜩잖게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더 해 줄 말이 없었다.

“그 이상은 프라이버시예요. 제 것뿐만 아니라 에스테반 후작도 관련한! 더 이상 말씀드릴 수는 없어요.”

“쳇.”

지금 또 쳇이라고 했어?

나는 믿을 수 없는 기분으로 엘리야를 바라보았다.

“요즘 들어 애처럼 왜 그러세요?”

“……시끄럽습니다.”

애같이 굴었다는 자각은 있는지, 엘리야가 시끄럽다는 말을 웅얼거리며 내게 회복 주문을 걸었다.

“볼 때마다 안 이러셔도 되는데.”

“그렇겠죠.”

엘리야가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마법은 당신이 입은 상해를 치유해 주지만, 만능은 아닙니다. 물론 나 정도 되는 마법사의 회복 마법이면 잘린 팔다리도 붙일 수 있지만.”

“네에, 네에. 그러시겠죠.”

“부상으로 인한 데미지는 마법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저도 알아요.”

그래서 여태 근 일주일을 고이 누워만 있지 않았는가?

“그렇다고 볼 때마다 마법을 걸어 주실 필요는 없는 거잖아요.”

“저도 압니다.”

내 말을 똑같이 되돌려 주며 엘리야가 말했다.

“때론 소용없단 걸 알면서도 해 보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일이 있는 법입니다.”

“……그게 뭐예요?”

“그냥 그런 게 있다고 알아 두면 됩니다.”

엘리야가 한숨을 쉬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언제 다 나을는지.”

“사실 지금 당장이라도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내 말에 엘리야가 가차 없이 코웃음을 쳤다.

“그렇게 대놓고 코웃음을 치시면 저 상처받는데.”

“쓸데없는 소리.”

그렇게 말하면서도 엘리야는 조금 웃었다. 나는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 담긴 살뜰함을 어렴풋이 엿보면서 생각했다.

언제 이렇게 정이 들고 말았을까?

내게 청혼을 한 세드릭도, 독을 마셨다는 사실에 눈물을 터트린 칼릭스도, 소용없을 회복 마법을 만날 때마다 걸어 주는 엘리야도.

이안은 지독한 감기에 걸렸다는 핑계에 이시스 상단을 통해 감기에 좋다는 온갖 기기묘묘한 약재들을 선물로 보내 주기도 했다.

이게 만약 단순한 게임이었다면 내가 이들을 공략했으니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했겠지만…….

‘……뭐, 어쨌든 독수공방 엔딩을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가고 있는 건 확실하군.’

마침 두 번째 우정 이벤트가 벌어지는 건국제도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몸도 순조롭게 회복해 가고 있으니까.’

건국제에 참석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거라고, 나는 가볍게 생각했다.

하지만…….

“건국제 행사에 참여하시겠다고요?”

근신이라는 핑계로 칩거하고 있는 새어머니가 빠진 저녁 식사 자리.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건국제 관련 화제에, 나도 당연히 참석할 거라는 전제로 딱 한마디를 얹었을 뿐인데…….

“누님, 지금 누님의 몸 상태가 어떤지는 알고 계시는 겁니까?”

칼릭스의 반응이 생각보다 격렬했다.

“내 몸 상태야 잘 회복하는 중인데……?”

얼마 전에 발생한 히든 에피소드의 결과, 나는 ‘소공작의 피보호자’ 칭호를 얻게 되었다.

‘기품이 30, 정신력이 50인가 올랐었지.’

문제는 그 칭호를 얻게 된 다음부터, 나에 대한 칼릭스의 과보호가 아주 하늘을 찌를 듯이 강화되었다는 점이었다.

“당치도 않습니다. 베로닉은 지독한 독입니다. 아무리 해독을 했다고 하더라도 누님의 몸은 그 충격을 고스란히 감내하는 중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거의 다 나았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건데…….”

“제 생각도 오라버니와 같아요, 언니.”

엘레니가 퍽 걱정스러운 낯을 하고 끼어들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신 지 얼마 되지 않았잖아요. 이번 건국제는 건너뛰시고, 푹 쉬시면서 정양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면서, 엘레니는 영리하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렇죠, 아버지?”

아버지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 생각도 네 동생들과 같다. 너는 죽을 뻔했어. 내 생각에도 네가 좀 더 휴식을 취하는 게 좋을 것 같구나.”

그럴 순 없었다.

‘나도 쉬는 거 참 좋아하긴 하는데.’

우정 이벤트를 하나라도 놓쳤다간 독수공방 엔딩은 끝이었다.

‘게다가 능력치도 그래.’

일상적인 생활을 할 때도 능력치는 올랐지만, 능력치가 가장 많이 오를 때는 이벤트가 벌어졌을 때였다.

여러모로 이번 건국제는 내게 놓칠 수 없는 이벤트였다.

나는 강경하게 입을 열었다.

“아무리 지독한 감기에 걸렸다고 하더라도 2주 이상 앓아눕는 건 말이 안 돼요. 건국제에도 불참하면 오히려 사람들의 의혹을 사게 될 거예요.”

그리고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리듯 이렇게 덧붙였다.

“올해는 어머니께서도 참석하지 못하실 텐데, 저까지 자리를 비우면 다들 뭐라고 떠들어 댈지…….”

“음…….”

아버지께서 불편한 낯을 하며 침음을 흘리셨다. 하지만 내 말을 부정하지는 못하셨다.

“그렇지만 누님……”

“칼릭스.”

나는 다시 끼어들려고 하는 칼릭스를 제지하며, 빤히 그를 바라보았다.

왠지 모르지만, 요즘 칼릭스는 내가 이런 눈으로 바라보면 내 말을 거역하지 못했다.

“……윽.”

지금처럼 말이다.

가장 중요한 복병인 칼릭스를 정리하자, 엘레니 역시 난감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더는 끼어들지 못했다.

남은 건 아버지뿐.

나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버지, 허락해 주실 거죠?”

아버지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한 가지만 약속하도록 해라, 유리.”

반허락이나 다름없는 말이 떨어졌다.

“네 몸이 감당하는 선에서만 움직여야 한다. 조금이라도 이상 징후가 보이면……”

“곧바로 집에 돌아와서 휴식을 취하도록 할게요.”

냉큼 대답하자, 아버지는 근심을 지우지 못한 얼굴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셨다.

훌륭한 설득의 대가로 ‘베테랑 협상가’ 칭호가 ‘협상의 달인’으로 승급합니다.

칭호의 효과: 지력 +100, 화술 +100, 매력 +70. 당신의 설득력이 사람들을 매료합니다.

……완벽한 성공이었다.

* * *

같은 시각, 로엔 대공저에서는…….

“대공 전하.”

“……으음?”

부름에 한 박자 늦게 대답하는 나른한 음성을 들으며, 수하, 헤일런은 내심 혀를 차고 말았다.

한나절 동안 아무도 드나들지 못한 카미엘의 침실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침대는 반파되어 있었고, 의자며 테이블도 성한 곳이 없이 깨어지고 긁힌 채로 방 안을 이리저리 나뒹굴고 있었다.

헤일런이 카미엘의 상태를 살피려 한 발짝 다가가는 순간, 깨진 꽃병이 와작 발에 밟힐 정도였다.

“…….”

하지만 카미엘은 자기가 만든 난장판이 아무렇지도 않은지, 엉망이 된 침대에 파묻혀 나른하게 눈만 깜빡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 근처를 작은 크리스털 약병들이 텅 빈 채로 나뒹굴고 있는 걸 발견하고는, 헤일런은 한숨을 참지 못했다.

“또 억제제와 진통제를 과량 복용하셨군요.”

메마른 웃음소리가 답을 대신했다. 헤일런은 약에 취해 늘어진 카미엘을 향해 통하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도 잔소리를 시작했다.

“전하, 잊으셨을 것 같아 다시 한번 말씀드리는데, 전하께서 복용하시는 약은 그 자체로 독이나 다름없이 독한 약입니다. 예?”

“그래, 그래.”

카미엘은 대수롭잖게 대답했지만, 그가 복용하는 약은 사자도 한 방울로 잠재울 수 있을 만큼 지독한 것이었다.

여러 가지 면에서 평범한 인간의 수준을 아득히 초월하고 있는 카미엘은, 그런 약을 일상적으로 복용해서 상태를 다운시켜 놔야 그나마 인간 비슷한 흉내라도 내며 살 수 있었다.

강력한 진통제와 억제제의 조합은 감각을 둔화시키고 반응 속도를 느리게 했다. 굳이 비유하자면 사람을 흐느적거리는 해파리 수준으로 만들어 버리는 약이라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런 독한 약이라도 먹지 않으면, 카미엘은 여러 가지 면에서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다.

‘그걸 몇 병이나 연달아 비웠으니…….’

하지만 바꿔 말해 그 정도로 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이나마도 쉴 수 없는 게 지금 카미엘의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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