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6화 (96/182)

87화

그럴 상황이 아니었지만, 유리는 잠시 칼릭스의 명석한 두뇌와 빠른 상황 판단 능력에 내심 혀를 내둘렀다.

칼릭스의 추리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언제입니까? 아니, 말씀하시지 않아도 알 것 같군요.”

“…….”

“그때, 누님이 무도회를 여신 날…… 축배를 들고 쓰러질 뻔하신 적이 있었죠.”

유리는 아무런 대답도 해 주지 않았지만, 칼릭스는 그 침묵 속에서 대답을 읽어 낼 수 있었다.

“남작 부인을 계속 내버려 두면…… 이 집을 떠나기도 전에 죽을 것만 같았어.”

“…….”

“그래서…… 내 쪽에서 선수를 쳤을 뿐이야.”

유리는 평소보다 약간 느리고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므와쟁 남작 부인이 주장하는 관련자가 없다는 말, 사실일 거야. 내가 도발한 건 어머니가 아니라 남작 부인이었거든.”

“남작 부인이…… 단독 행동을 하길 원해서 누님이 먼저…….”

칼릭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목이 타는 듯한 기분이었다.

“왜? 어째서 그렇게까지……?”

말하다 말고 그는 깨달았다.

유리에게는 그 방법밖에 없었다.

왜냐면 그녀에게는 의지가 되어 줄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를 도와, 이렇게 스스로 독을 마시는 끔찍한 일을 하지 않아도 되게끔 지켜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유리는 줄곧 혼자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마음대로 생각하고 오해하는 동안 내내 혼자서 외로운 싸움을 싸워 왔다.

유리는 정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는 게 유리의 최선이었다.

죽을지도 모르는 길에 스스로를 내던지는 것만이, 유리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음을 칼릭스는 인정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칼릭스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제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창피하고 부끄러웠고, 슬펐고 화가 났다.

아무것도 모르고 세드릭 에스테반의 앞에서 기고만장하게 군 멍청한 칼릭스 로잔헤이어의 행동에 이가 갈리고 구역질이 나왔다.

그가 이제까지 믿고 따랐던 어머니의 모습도 다 허상처럼 느껴졌다. 남은 것은 환멸뿐이었다.

그런 칼릭스에게 유리가 조용히 입을 열어 말했다.

“걱정하지 마, 칼릭스.”

“…….”

“나만 없어지면 돼. 나만 없어지면 이 집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을 거야.”

“아닙니다, 누님. 아니에요…… 그것만큼은 절대 아닙니다.”

이대로 유리가 떠난 세상에서, 예전처럼 하하 호호 웃으며 화목하게 살라고?

그는 이미 수면 아래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다 봐 버렸는데?

불가능한 일이었다. 칼릭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예전처럼은 돌아갈 수 없었다.

아니, 설사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다 하더라도, 유리가 떠난다면 아무 의미가 없었다.

아무 의미가 없었다.

“괜찮아, 칼릭스.”

유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를 열심히 달래기만 할 뿐이었다.

“정말 괜찮을 거야. 나는 여기를 떠나서 행복하게 살 거고…… 내가 떠나면 여기 남은 사람들도 그렇게 살 수 있을 거야.”

“……저는 아니에요, 누님.”

“…….”

“저는 아니에요, 저는…….”

지금 상황에서 칼릭스가 할 수 있는 말은 고작 이 정도가 다였다.

“음…….”

유리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칼릭스를 어떻게 무슨 말로 달래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칼릭스는 그런 유리를 바라보며 애써 감정을 추슬렀다.

그에게는 지금 울 자격이 있지도 않았고, 이 이상 매달리는 것도 유리에게 도움이 되는 행동은 아니었다.

“일단…… 쉬십시오, 누님.”

“그래. 알았어.”

힘없이 꺼질 듯한 유리를 바라보며, 칼릭스는 침중한 표정으로 “가 보겠습니다.”라고 인사하고 방을 나섰다.

‘쯧.’

유리는 살짝 혀를 차며, 눈가가 붉어질 정도로 운 칼릭스가 조금 가엾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방 밖으로 나간 칼릭스가 얼마나 싸늘한 표정으로 돌변했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유리가 다시 저 혼자 남은 방에서 천천히 잠에 빠져드는 동안, 칼릭스는 지하 감옥으로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로윈, 아버지는 거기 계신가?”

“공작님께서는 혹시 협력자가 없는지 색출하시느라…….”

“내가 내려가도록 하지.”

그렇게 말하는 칼릭스의 얼굴에, 온기라고는 일절 남아 있지 않았다.

그가 그대로 지하 감옥을 향해 걸음을 옮기려고 한 순간.

“칼릭스! 칼릭스!”

“공작 부인, 진정하세요!”

“칼릭스, 아아! 내 아들!”

복도 저 끝에서 내달리다시피 들이닥친 공작 부인이 품 안 가득 아들을 끌어안았다.

칼릭스는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으나, 눈물 젖은 얼굴을 아들의 가슴팍에 파묻은 공작 부인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내 잘못이야, 다 내 잘못이야.”

공작 부인이 횡설수설하듯 말했다.

“수잔이 설마 유리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는 줄은 차마 몰랐어! 어떻게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

칼릭스는 제 품에 매달려 서럽게 흑흑 우는 어머니를 내려다보았다.

도저히 형언하지 못할 어떤 감정이 울컥 속에서 치받았다.

“이 모든 게 다 내가 부덕했던 탓이야. 앞으로 유리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어머니, 진정하세요. 또 쓰러지시겠어요.”

옆에서 엘레니가 걱정스럽게 말했지만, 공작 부인은 듣는 눈치가 아니었다.

“…….”

칼릭스는 잠시 말없이 흐느끼는 제 어머니를 내려다보다가, 말없이 그 어깨를 붙들어 품에서 떼어 냈다.

“칼릭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는 이해했습니다.”

“…….”

예상과 전혀 다른 아들의 태도에, 레티샤는 뚝 울음을 그치고 말았다.

“칼릭스, 나는……”

“하지만 어머니, 어머니께서 이 일에 연루되시지 않았다 하더라도 아랫사람을 잘못 관리하신 책임은 피하실 수 없으실 겁니다.”

“!”

칼릭스의 냉엄한 말에 레티샤는 갑자기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굳어 버렸다.

그녀의 남편도 이와 똑같은 말을 했다.

하지만 그건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남자는 한 번도 저를 사랑한 적 없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칼릭스, 내 아들. 네가 어떻게!

레티샤는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 칼릭스가 그보다 더한 배신감에 치를 떨고 있다는 걸 전혀 모른 채.

“당분간은 자중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아랫것들에게도 걷잡을 수 없이 소문이 퍼지게 될 테니 말입니다.”

“…….”

“엘레니.”

“네, 오라버니.”

칼릭스는 예상외로 침착하게 대답하는 여동생을 잠시 의외다 싶어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도 잠시뿐이었다.

“……어머니를 방으로 모셔다드리도록 해라.”

“네, 알겠어요.”

“잠깐, 기다리렴, 칼릭스. 이 어미는……”

“쉬십시오, 어머니. 저는 가 볼 곳이 있습니다.”

레티샤는 망설임 없이 그녀를 지나치는 아들의 모습을 충격에 빠진 채로 바라보았다.

“하, 어떻게……!”

“마님!”

무너지려는 그녀의 몸을 시녀와 엘레니가 양쪽에서 붙들었다.

“에, 엘레니. 너도 보았지? 네 오라버니가…….”

“네, 봤어요, 어머니.”

엘레니는 차분하게 대꾸하며 시녀에게 눈짓했다. 두 사람은 곧 비틀거리는 레티샤를 부축해서 방으로 이끌어 가기 시작했다.

충격에 빠진 레티샤는 자신이 어디로 끌려가고 있는지, 아니, 끌려가고 있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듯했다.

엘레니는 어머니를 부축하면서 딱 한 번, 오라버니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녹색 눈동자가 살짝 가늘어졌지만, 누구도 그 사실을 눈치채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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