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 * *
얼마나 그렇게 정신을 잃고 있었을까?
의식이 수면 위로 떠오름과 동시에, 목에 타는 듯한 고통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괴로움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얼마간 그렇게 괴로워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나를 받쳐 안아 올리더니, 물을 담은 잔을 입가에 대 주는 게 느껴졌다.
나는 허겁지겁 그 물을 받아 마시려 했지만, 상대는 인내심을 가지고 아주 천천히 컵을 기울였다.
아마 사레가 들릴까 봐 배려하는 것 같았다.
나는 천천히 입가를 적시는 물을 아기처럼 빨아 마시며, 조금씩 눈을 떴다.
눈앞에는…….
“……칼, 릭…….”
“말하지 마십시오, 누님! 목이 많이 손상되었습니다.”
“네가…… 여긴……?”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대……체……?”
칼릭스가 난감한 듯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내가 입술을 달싹이며 무언가를 또 물으려 하자 기겁해서 자기가 먼저 이렇게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다 말씀드릴 테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
시키는 대로 얌전하게 굴자, 칼릭스가 입술을 깨물며 한숨을 내쉬었다.
“먼저, 누님이 이렇게 된 건 음독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므와쟁 남작 부인이 누님의 차에 독을 탔습니다. 지금 그…… 아무튼 지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
내가 입술을 달싹이는 시늉을 하자, 칼릭스가 “말씀을 하시면 안 된다니까요.” 하고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아버지가 어디 계신지 궁금하신 겁니까?”
“…….”
“아버지는 지금 그 여자를 심문하고 계십니다. 저는…… 누님을 지키려고 여기에…….”
바로 그 순간.
“……?”
칼릭스의 눈에 순식간에 맑은 눈물이 차오르더니, 곧이어 주르륵 굴러떨어졌다.
떨어진 미지근한 눈물이 내 뺨을 적셨다.
‘……?’
왜 말을 하다 말고 우는 거지?
“왜……?”
칼릭스가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씹었다.
잠시 후, 그가 이렇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누님.”
“……?”
“제가…… 제가 늦은 탓에 누님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칼릭스의 눈에서 자꾸 방울방울 눈물이 떨어졌다. 창백한 얼굴에 구르는 눈물이 마치 영롱한 구슬 같았다.
“네…… 탓이……”
“아닙니다. 제 탓이 맞습니다.”
“…….”
“어머니께서…… 어머니께서 여태 누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셨는지, 저는 전혀 몰랐습니다.”
“!”
그걸 얘가 어떻게 알게 된 걸까?
‘설마 그때 어머니가 내게 누명을 씌웠던 사건 때문에?’
그 정도 사실만으로 눈치챘다고?
‘히든 에피소드: 소공작의 피보호자’로 진입합니다!
나는 약간 얼떨떨한 기분으로 칼릭스를 주시했다.
* * *
칼릭스는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유리의 푸른 눈동자를 마주할 수가 없었다.
그 눈동자에 빛이 돌아온 게 감사하면서도, 죄책감 때문에 도무지 자세히 바라볼 수가 없었다.
여태까지 그는 유리를 자신이 지켜야 할 대상으로 생각했다.
그건 자신이 로잔헤이어 공작가의 소공작으로 태어난 이상, 당연히 짊어져야 하는 의무와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이 그 일을, 유리를 자신의 보호하에 두고 지키는 일을 해낼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심지어 자기가 그 일을 꽤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착각이었다.’
잔혹할 정도의 무지에서 비롯한 착각이었다.
그가 그런 착각에 빠져 있는 사이에 어머니는 누님을 증오했고, 누명을 씌운 것도 모자라 이렇게 독살까지 하고자 했다.
그런데 그는 어땠는가?
“당신을 걱정하고 있는 겁니다. 정말 몰라서 이러시는 겁니까?”
그 말을 들었을 때, 유리는 어땠을까?
실상 그 말은 투정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이 그녀를 걱정한다는 걸 고려치도 않는 듯한 유리에게 부리는 투정이었다.
내가 당신을 걱정하고 있다고.
내 마음을 생각해 달라고.
그 말을 들은 유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시시각각 목을 죄어 오는 여자의 아들이 그렇게 투정을 부렸을 때, 유리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칼릭스는 울고 싶었다. 이미 울고 있는데도 또 울고 싶었다.
바로 그때.
“울……지 마.”
가느다란 손가락이 톡, 하고 칼릭스의 젖어 있는 뺨에 와서 닿았다.
칼릭스가 무어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 손가락이 천천히 칼릭스의 젖은 뺨을 쓸었다.
칼릭스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울컥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누님을 독살하려 한 그 여자를 가만두지 않겠습니다.”
칼릭스는 저도 모르게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 여자가 독이 든 차를 탄 걸 누님의 시녀가 지켜보았고, 독살에 사용한 찻잔도 증거물로 입수했습니다. 그 여자가 살아서 지상의 햇빛을 보는 일은 다시 없을 겁니다. 제 이름을 걸고…….”
맹세합니다, 라는 말은 완성되지 못했다.
무슨 방해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저 칼릭스, 그 스스로가 그 말을 완성할 수 없었을 뿐이었다.
‘므와쟁 남작 부인…… 그 여자는 진범이 아니야.’
칼릭스도 알고 있었다.
지하 감옥의 므와쟁 남작 부인은 처음부터 자신이 이 일을 주도적으로 꾸미고 실행한 사람이며, 그 외 다른 사람은 아무 관련이 없노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유리를 살해하려 한 이유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원한’이라는 말만 되풀이해서 반복할 뿐.
공작의 명령하에 고문을 시작한 지 여섯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므와쟁 남작 부인은 제 주장을 바꾸지 않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칼릭스는 냉정하게 생각했다.
물론, 므와쟁 남작 부인의 단독 범행일 가능성이 영 없는 건 아니었다. 그 여자는 원래부터 어머니에게 이상할 정도로 충성스러웠으니까.
하지만 설사 그렇다고 해서 그의 어머니가 무죄라고 할 수 있을까?
그의 어머니가 유리를 죽이고 싶을 만큼 싫어하지 않았다면, 므와쟁 남작 부인도 유리를 독살하려고까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속이 쓰라리도록 괴로웠다. 먹은 것도 없이 토악질이 자꾸 올라오려고 했다.
‘어머니, 어째서……?’
어째서 어머니는 누님을 그토록 미워하는 걸까?
칼릭스는 이번 일을 그냥 좌시할 수 없음을 인정했다. 그 스스로 도저히 용납이 되질 않았다.
“누님.”
막 그가 어머니에 대해 말하려던 순간.
유리가 불편한 듯 얼굴을 찡그리더니, 물병 쪽을 향해 손짓했다.
“물이 더 드시고 싶으신 겁니까?”
칼릭스는 하려던 말도 잊고 허둥지둥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동안 유리는 끙끙대며 자세를 고쳐 반쯤 일어나 앉았다.
“누님! 움직이지 마세요.”
“괜찮, 아.”
그것보다 얼른 물을 달라는 듯 유리가 손을 내밀었다. 칼릭스는 조심스럽게 유리의 손에 컵을 쥐여 주면서 제 손을 겹쳐 잡았다.
“조심해서 드셔야 합니다. 한 번에 너무 많이 드시려고 하지 마세요.”
물 한 잔을 천천히 다 마시고서야, 유리는 큼큼 하며 말라붙은 목을 가다듬었다.
“……더 이상 아무 말도 안 해도 돼.”
“하지만 누님……”
“그만, 난 정말 괜찮아.”
“므와쟁 남작 부인이 누님을 독살하려고 한 건……”
“나도 알아, 칼릭스.”
“…….”
“때론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는 법이지.”
유리의 목적은 공작 부인을 찍어 내는 게 아니었다.
어차피 그녀는 올해만 무사히 잘 넘기면 페르가나로 떠날 예정이었다.
독수공방 엔딩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능력치를 쌓고 관계를 만드는 것만으로도 몸이 모자라게 바쁜 지경이었다.
그 바쁜 와중에 공작 부인을 가문에서 몰아내는 일까지 추가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냥 내버려 두렴. 그게 내가 원하는 거야. 어차피 난 떠날 테니까…….”
“떠나신다고요?”
아차.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서 그런지 안 해도 될 소리까지 해 버렸다.
칼릭스는 그런 유리의 기색을 기민하게 눈치챘다.
‘떠난다는 말.’
진심이시구나.
칼릭스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유리의 ‘떠난다’는 말은, 단순히 결혼을 해서 가문을 떠나게 됨을 의미하고 있지 않았다.
더 먼 곳으로의 여정, 필요에 따라서는 로잔헤이어와의 인연을 모두 정리하고 끊어 내겠다는 내용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직감하자 더 무너질 곳도 없다고 생각했던 마음 한구석이 또 한 번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떠나…… 떠나신다고.’
“대체…… 어디로 떠나실 겁니까? 언제부터 그런 계획을 세우신 겁니까? 설마 처음부터……!”
유리는 얕게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된 이상 칼릭스에게 자신의 비밀을 약간 털어놓을 수밖에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마음을 품은 지는 얼마 안 됐어. 그리고 떠날 장소는 아직 구체적으로 확정한 건 아니야.”
“누님은 로잔헤이어의 공녀입니다. 대체 이곳을 떠나서 어떻게……”
“어차피 결혼을 해도 가문을 떠나게 되는 건 마찬가지잖니.”
“결혼을 한다고 해서 누님과 로잔헤이어의 연이 완전히 끊어지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 누님의 말씀은……”
“……장담하는데, 내가 떠나는 게 문제를 가장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길일 거야.”
“…….”
칼릭스는 창백하게 질린 채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유리의 말을 도저히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흔들리는 눈동자 위로 다시 맑은 눈물이 차올랐다. 주르륵 흐르는 눈물을 보며 유리는 난감하게 웃었다.
“왜 자꾸 우니? 울 일이 아닌데…….”
“……죄송합니다.”
칼릭스는 눈물을 닦아 냈다. 지금 울어야 할 사람은 그가 아니었다.
그는 최대한 냉정하려고 애쓰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설사 누님이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신다 하더라도 이번 일은 그냥 좌시할 순 없습니다. 아무리 어머님이시라 해도 이번엔 선을 넘으셨습니다. 이 일은……”
“내가 일부러 독을 마셨어.”
“용납될 수 없는…… 예?”
칼릭스는 우뚝 말을 멈추고 말았다.
지금, 그의 누이가, 누님이 무슨 말을 했는지 얼른 이해가 가질 않았다.
“일부러…… 독을 마셨다고요?”
앵무새처럼 말을 반복해서 따라 한 후에야 내용을 간신히 이해했다.
칼릭스의 입술이 경악으로 벌어졌다.
“누님, 어떻게 그런 짓을!”
“실망했다면 미안해.”
유리는 담담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칼릭스의 양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므와쟁 남작 부인을 처치하려고 그러신 거군요.”
“그 방법밖에는 없었어.”
칼릭스가 예리하게 되물었다.
“혹시 어머니께서 누님께 독을 먹인 게 처음이 아닌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