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4화 (94/182)

85화

“로윈입니다, 소공작님.”

“들어와.”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온 로윈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조사 결과가 나왔나?”

“아직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

“소공작님, 몇 년 전에 소공작님의 말의 다리가 부러지는 바람에 해고됐던 마구간지기의 조수를 혹시 기억하십니까?”

“그런 일이 있긴 있었지. 한데 그게 왜……?”

“그 남자는 서북부 므와쟁 출신입니다.”

“!”

“하녀가 죽던 날, 므와쟁 남작 부인이 그자를 개인적으로 만난 정황을 포착했습니다.”

칼릭스가 침을 꿀꺽, 삼켰다.

“저택에서 쫓겨난 뒤로 남자는 일용직을 전전하며 도박을 일삼고 있었습니다.”

“그만, 거기까지 말해라. 충분히 알아들었다.”

칼릭스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진정하려고 애썼다.

로윈의 말대로 확실한 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정황이 의미하는 바를 외면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만약에 므와쟁 남작 부인이 하녀의 독살에 연루되어 있다면.’

칼릭스는 그 피도 눈물도 없어 보이는 여자가 오직 어머니의 명령만을 따르는 사람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하녀를 독살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의 어머니였다.

칼릭스는 길게 신음하며 두 손바닥 위에 얼굴을 파묻었다. 마침내 드러난 진실이 너무 무거워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로윈.”

“예, 소공작님.”

“당분간 므와쟁 남작 부인을 주시해라. 저택 안에서든, 밖에서든. 그 행적을 놓치는 일이 발생해서는 안 돼.”

“알겠습니다.”

“그리고 수상한 점이 있다면 즉시 내게 보고하도록.”

“예, 소공작님. 분부하신 대로 행하겠습니다.”

* * *

그날 밤. 야심한 시각.

“저어, 남작 부인.”

“무슨 일이지, 레아 가렐?”

레아는 침을 꿀꺽 삼키며, 무표정으로 그녀의 풀 네임을 부르는 므와쟁 남작 부인을 바라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레아는 이 지독할 정도로 속을 알 수 없고, 냉정한 남작 부인이 정말 두려웠다.

‘하지만 지금은…….’

가장 두려운 것, 이라고 하면 웃는 얼굴로 자신에게 두 가지 길을 제시하던 공녀의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조용히 두려움에 떨고 있는 레아를 보며, 므와쟁 남작 부인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특별히 보고할 사항이 있다고 하더니, 왜 말을 않는 거지?”

“그게, 남작 부인, 다름이 아니라…….”

레아는 잘 움직이지 않는 뻣뻣한 혓바닥을 필사적으로 움직여 말을 짜냈다.

“유리 공녀님께서 자신을 모함하고 쫓겨난 하녀와 이야기를 나눠 봐야겠다고 하셨습니다.”

“뭐라고?”

므와쟁 남작 부인이 무언가를 작성하고 있던 펜을 내려놓으며 명령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자세히 말해 보거라.”

“저, 저도 언뜻 들은 말이라 다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

“그럼 기억나는 거라도 죄다 말해.”

“그 하녀 때문에 공작 부인을 의심하게 되었다고 하시면서…… 아무래도 그 하녀를 다시 만나 대체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했는지 물어볼 예정이라고 하셨습니다!”

“…….”

“그, 그래야지 마님에 대한 의심을 풀 수 있을 것 같다고…….”

므와쟁 남작 부인은 이를 꽉 악물었다.

유리가 하녀를 만나고자 한다면, 당연히 그 하녀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일은 은밀하게 해치웠지만…….’

만약 그 하녀의 죽음에 자신의 손길이 닿아 있다는 게 알려진다면?

예전의 무능하다 싶을 정도로 착하기만 한 유리 엘로즈라면, 므와쟁 남작 부인도 별로 걱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껏해야 하녀의 죽음에 놀라고 슬퍼하며 그 집에 돈이나 몇 푼 쥐여 주려고 할 테니까.

하지만 지금의 유리 엘로즈는?

과연 그렇게 허술하고 멍청하게 일을 처리할까?

므와쟁 남작 부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때, 그 호수에서 그 아이가 죽어 버렸어야 하는 건데. 그때 그 아이가 죽었어야 이런 일이 없는 건데……!”

“이 모든 게 다 그 아이가 살아남은 탓이야.”

아직도 귓전에 레티샤의 절규가 생생했다.

‘그래.’

유리 엘로즈는 진작 죽어야만 했다. 하지만 끈질기게 살아남아 지금껏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고, 레티샤와 자식들의 사이마저 갈라놓고 있었다.

‘……그래.’

여태까지 그녀도, 레티샤도 생각을 잘못하고 있었다.

어차피 죽어야 할 이라면 좀 더 손쉽게 해치울 방법이 있지 않은가?

‘처음부터 이래야만 했어.’

므와쟁 남작 부인은 마음을 먹었다. 레티샤를 위해 그녀가 나설 때였다.

* * *

다음 날.

나는 일부러 옷을 곱게 차려입고 새어머니를 방문했다.

“공작 부인께서는 몸이 좋지 않으십니다.”

므와쟁 남작 부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하지만 나는 물러나지 않았다.

“얼마나 몸이 안 좋으신 거지?”

“오늘 하루는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난 오늘 꼭 어머니를 뵙고 싶은데…….”

“…….”

“부인도 알고 있지 않나? 최근에 어머니와 나 사이에 있었던 일을.”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지 도저히 모르겠군요.”

“부인은 아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어머니를 깊이 존경하고 마음속으로 따르고 있어.”

“…….”

내 뻔한 거짓말에 므와쟁 남작 부인의 눈빛에 적의가 어리기 시작했다.

나는 태연한 얼굴로 도발을 이어 나갔다.

“한데 속상하게도 어머니와 내가 서로를 오해할 만한 일이 생겨 버렸잖아?”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그건 마님의 탓이 아니었습니다.”

“글쎄, 과연 그럴까?”

“!”

“이것 봐, 내가 벌써 어머니를 의심하기 시작했잖아.”

나는 일부러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어 그녀를 달래는 척했다.

“나는 이런 건 옳지 못하다고 생각해. 어머니와 직접 대화를 나누고, 오해라면 풀고 싶어.”

므와쟁 남작 부인이 헛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오해가 아니라면…… 글쎄. 나도 방법을 좀 강구해 봐야겠지?”

“……마님께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그래, 나는 응접실에서 기다릴게.”

나는 순순히 물러나는 척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아 참, 어머니가 준비를 하고 나오시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은데. 그동안 목이나 축일 수 있게 차를 좀 준비해 주겠어?”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 * *

“뭐라고?”

칼릭스가 깜짝 놀라 번쩍 고개를 들었다.

“누님이 어머니를 찾아가셨다고? 대체 왜?”

급하게 소식을 전한 로윈이 헐떡이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안 돼.”

칼릭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살펴보고 있던 서류가 책상 위로 어지럽게 흩어졌다.

“당장 가 봐야 해. 누님은, 누님은 무슨 일을 당할 수도 있다는 걸 전혀 모르고 계셔.”

“진정하십시오, 소공작님. 설마 공작 부인께서 공녀님을 어떻게 하려고 하진 않으실 겁니다.”

“내가 걱정하는 건 어머니 쪽이 아니다.”

그가 걱정하는 건 므와쟁 남작 부인 쪽이었다. 남작 부인은 레티샤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잔혹한 여자가 과연 자기 영역 안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유리를 순순히 보내 주려고 할까?

물론, 칼릭스도 내심으론 알고 있었다. 설마 므와쟁 남작 부인이 무슨 계기도 없이 유리를 죽이려고 들진 않을 거라고 말이다.

‘리스크가 크니까.’

하지만 그 사실을 알면서도, 유리가 걱정되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여기 이러고 있어서는 안 돼.’

칼릭스는 입술을 깨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리고 다급하게 집무실에서 뛰어나갔다.

* * *

므와쟁 남작 부인은 어머니께 소식을 전한 뒤, 곧바로 평소와 같이 담담한 표정으로 응접실로 나왔다.

“마님께서 준비를 마치시면 곧 이리로 오실 겁니다.”

“기다릴게.”

“기다리는 동안 드실 수 있도록 차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

나는 므와쟁 남작 부인이 차를 준비하는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남작 부인의 차를 우리는 모습은 평범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어느 과정에서 독이 들어가고 있는지 파악할 수 없을 정도였다.

“여기, 드시지요.”

마침내, 붉은빛으로 잘 우러난 차 한 잔이 내 앞에 놓였다.

“크림을 좀 주겠어?”

“네, 넣어 드리겠습니다.”

나는 므와쟁 남작 부인이 찻잔에 크림을 붓고, 티스푼으로 젓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다 됐습니다.”

“고마워.”

남작 부인이 손을 물리자, 나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흘긋 눈짓을 했다.

시킨 대로 에나가 문가에 서 있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천천히 찻잔을 들어 입술에 대었다.

마침내, 뜨거운 차 한 모금을 입술에 머금고, 천천히 목으로 넘겼다.

……꿀꺽.

독이 든 차를 마셨습니다!

효과: 사망.

아, 이번에도 역시 예상대로…….

한 모금 마신 차가 위장에 쓰게 내려갔다. 마치 용암을 마신 것처럼 차가 내려간 길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바로 그때, 문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에나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난 순간.

“누님!”

열린 문 사이로 안색이 새하얗게 질린 칼릭스가 등장했다.

‘쟤가 왜 여길?’

이라고 생각한 순간.

“……쿨럭!”

경고! 중독으로 인한 상태 이상이 발생합니다.

각혈을 시작합니다.

중화제를 복용하고 있습니다.

독의 효과가 중화됩니다.

독의 효과를 완벽하게 중화할 수 없습니다.

각혈을 멈출 수 없습니다.

요란하게 경고 메시지가 동시다발적으로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뜨거운 차가 든 찻잔이 손에서 굴러 허벅지로 떨어졌지만, 뜨거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 ……!”

칼릭스가 무어라고 소리치는 목소리가 이명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아.’

나는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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