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3화 (93/182)

84화

* * *

“이럴 수는 없어.”

레티샤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럴 수는…… 이럴 수는 없단 말이야. 수잔, 응?”

“마님, 진정하십시오.”

“어떻게 진정을 하란 말이야!”

짝, 하고 뺨을 갈기는 소리가 났다. 레티샤는 잔뜩 흥분해서 씩씩거리고 있었지만, 므와쟁은 덤덤한 표정으로 붉어진 뺨을 한 채 “죄송합니다, 마님.” 하고 사죄할 뿐이었다.

“…….”

괜한 화풀이를 했다. 레티샤도 알았다. 하지만 사과를 할 여력은 없었다.

“아아.”

레티샤는 한탄을 하며 얼굴을 싸쥐었다. 조금 전 엘레니가 남기고 간 말이 귓전에 생생했다.

“말로는 믿어 달라고 하시지만, 어머니께서는 매번 실패만 반복하시잖아요?”

“죄송하지만 어머니, 전 더 이상 어머니를 믿을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엘레니는 평소처럼 너그럽고 선한 얼굴이었다. 마치 레티샤의 실수가 진심으로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 점이 더 레티샤의 마음을 무너지게 했다.

‘내가…… 매번 실패만 해서…… 딸아이가 더 이상 나를…….’

딸아이뿐만이 아니었다.

칼릭스는 레티샤의 이간질조차 통하지 않을 정도로 유리에게 마음을 열고 있었으니까.

사실 엘레니가 자신에게 실망한 것보다 그쪽이 더 큰 문제였다.

‘내가 이날 이때까지 얼마나 노력했는데……!’

유리 엘로즈. 그 밉살스러운 얼굴을 떠올리기만 해도 이가 바드득 갈렸다.

하지만 이제는 미움보다도 무력감이 들 지경이었다.

매번 자신의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능력에, 레티샤는 거의 질리다시피 했다.

‘게다가…….’

레티샤의 연이은 실패로 그녀에게 실망한 사람은 엘레니 하나뿐이 아니었다.

‘그분께서도 나를 질책하셨지.’

엘레니의 실망이 레티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면, 그분의 실망은 레티샤를 밤잠도 못 이루게 할 정도였다.

‘균열을 여는 마나석을 그렇게 허무하게 낭비해 버렸으니…….’

그분이 자신을 버린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제 어떡하지?’

든든한 뒷배였던 그분이 레티샤의 무능력에 질려 그녀를 버렸다. 한데 이제는 자식들마저도 레티샤에게 등을 돌려 버렸다.

반면 유리는 어떠한가?

전 공작 부인을 쏙 빼닮은 그 계집은 어떤 술수를 썼는지 에스테반 후작을 홀린 걸로도 모자라, 오늘은 대공에게서 달콤한 디저트 선물까지 받았다고 했다.

어디 그뿐인가? 그 아이가 황실 무도회에서 황태자의 손을 붙잡고 나타났을 때, 얼마나 경악했던가?

그때는 금방 유리의 상승세를 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평생을 그녀에게 휘둘려 변변한 말 한마디 못 하는 계집애 하나쯤, 다시 원래대로 찍어 누르는 것쯤이야 일도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한데 지금은?

납작하게 짓눌려, 말이 아닌 꼴을 하고 있는 건 바로 자신이었다.

‘나는…….’

이대로 끝인 걸까?

“마님?”

심상치 않을 정도로 와들와들 떨기 시작하는 레티샤를 보며, 므와쟁 남작 부인이 걱정스레 그녀를 불렀다.

“마님? 괜찮으세요?”

“나, 나는, 나는…….”

패닉에 빠진 레티샤는 급기야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물에 빠진 사람처럼 레티샤의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마님, 정신 차리세요, 마님!”

“수잔, 어쩌면 좋아?”

레티샤가 벌벌 떨며 말했다.

“그때, 그 호수에서 그 아이가 죽어 버렸어야 하는 건데. 그때 그 아이가 죽었어야 이런 일이 없는 건데……!”

“마님, 진정하세요. 네?”

므와쟁 남작 부인이 이상을 감지하고 레티샤의 어깨를 강하게 흔들었다. 하지만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이 모든 게 다 그 아이가 살아남은 탓이야.”

나는, 나는……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두려움에 질린 얼굴로 레티샤가 물었다. 므와쟁 남작 부인은 아무런 대답도 해 줄 수가 없었다.

“아아, 아…….”

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한 레티샤는 다시 식은땀을 비 오듯 쏟으며 몸을 극심하게 떨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남작 부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도무지 이대로 좌시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몰타, 아니, 라메르에서 상자가 도착했다.

“이번에는 대공 전하께서 보내신 게 아니네요?”

시녀, 레아가 붙임성 좋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개인적으로 주문한 거야. 거기 두고 잠깐 자리를 비워 줄래?”

“네, 알겠습니다, 공녀님.”

레아가 자리를 뜨고 문이 닫히자마자, 나는 라메르의 상자를 잽싸게 열어 보았다.

“와.”

오늘은 시럽에 졸인 새빨간 체리 콩포트로 장식한 생크림 케이크였다.

‘망치지 않게, 조심조심…….’

예술 작품에 가까운 케이크를 조심스럽게 들어내고, 상자 밑바닥에서 몰타가 보낸 보고서를 꺼냈다.

나는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보고서를 빠르게 훑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보고서의 시작은 샐리 브라운에 대한 이야기였다.

“……죽었다고?”

샐리 브라운은 공작가에서 쫓겨난 그날 밤에 심장 마비로 죽었다고, 분명히 적혀 있었다.

다행히 보고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샐리 브라운이 공작가에서 쫓겨나던 날 저녁, 외출을 시도함. 조사 결과 브라운이 만난 사람은 윌리엄 샘슨(38, 현재 무직)으로 추정됨.

그 밑에는 윌리엄 샘슨의 약력이 간단하게 적혀 있었다.

“……공작가의 마구간에서 일하다가 쫓겨난 적이 있고, 현재는 일용직을 전전하며 도박장에 드나듦……. 출신지는 제국 서북부 므와쟁이라고?”

좋지 않은 예감이 등허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니, 예감이 아니라 당연한 추론이라고 해야 옳으리라.

‘이 사람, 므와쟁 남작 부인의 사주를 받은 거야.’

하녀는 돌연사한 게 아니라 독살당한 거였다.

‘이유는 당연히…… 입을 막기 위해서겠지.’

반절 정도 남은 보고서를 일단 내려놓고, 나는 생각에 잠겼다.

‘……므와쟁 남작 부인을 이대로 내버려 두어도 될까?’

초반에 새어머니의 악행은 은밀한 말재주로 내 평판을 깎아내리거나, 교묘하게 내가 이득을 보지 못하게끔 상황을 조종하는 선에서 그쳤다.

‘그 정도라면 얼마든지 정면으로 상대해 줄 수 있지만…….’

그런 식의 공격이 내게 먹히지 않자, 사람을 시켜 내게 누명을 씌우려고까지 했다.

하지만 그 수단조차 무위로 돌아갔으니…….

‘이제는 슬슬 나를 상대로 좀 더 과격한 수단을 사용하려 들겠지.’

그리고 그녀가 가장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게 바로 므와쟁 남작 부인이었다.

나는 칼릭스에게 선물받은 티스푼을 매만지면서 생각했다.

‘여태까지는 독살에 대비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런 수동적인 방법으로 대처하는 것만이 최선은 아닐 것 같았다.

물론, 새어머니는 아직 내가 건드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므와쟁 남작 부인 정도는 슬슬 정리해 두는 게, 미래를 위해서도 좋을 것 같아.’

그렇다면…….

나는 일단 보고서의 나머지 부분을 마저 읽어 내려갔다.

거기에는 시녀들 각자의 상세한 인적 사항과 함께, 배신자로 추정되는 인물이 누구인지에 대한 몰타의 견해까지 소상히 적혀 있었다.

‘레아 가렐.’

조금 전 붙임성 있게 굴던 하녀를 떠올리며, 나는 헛웃음을 머금었다.

그나마 요새 가깝게 지내던 에나가 배신자가 아니라는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흠.’

나는 한숨을 쉬며 설렁줄을 당겼다. 그러자 레아가 “부르셨어요, 공녀님?” 하고 등장했다.

“마치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네, 레아.”

“공녀님께서 디저트를 먹기 좋게 준비해 달라고 하실 것 같아서…….”

나는 손을 홰홰 내저으며, 이런저런 절차를 건너뛰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레아. 너, 므와쟁 남작 부인으로부터 돈을 받고 있지?”

“……네?”

레아의 표정에 균열이 갔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거짓말은 못 하겠군.’

“무슨……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공녀님? 저는 잘 이해가…….”

“정보 길드에서 보내 준 서류를 보면 꽤 오래된 것 같더구나. 내 시녀로 일하기 시작한 직후부터 돈을 받은 걸로 보이는데, 그럼 애초에 계약을 맺고 내 밑으로 들어온 게 되는 건가?”

“고, 공녀님.”

레아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마 내가 거기까지 소상히 알아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모양이었다.

레아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오, 오해하지 마세요, 공녀님. 제, 제가 돈을 받긴 했지만 그건 다 공작 부인께서 공녀님을 소상히 돌보시는 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 드렸을 뿐이지 결코 해를 끼치려는 게……”

“그만. 나는 논점을 흐리는 이야기를 싫어해.”

“공녀님, 저는……”

“어쨌든 사실은 네가 내 일거수일투족을 돈을 받고 어머니께 고해바친 거잖니?”

“…….”

“난 네가 그 행동이 가져올 결과를 모를 만큼 멍청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고, 공녀님.”

레아가 엉금엉금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내 치맛자락을 붙들었다.

“제, 제가 깜박 잘못된 생각을 했어요. 어머니께서 몸이 아프셔서 어쩔 수 없이…….”

“어머나. 그렇다면 지난주에 칼라일 거리에서 옷을 맞춘 것도 아프신 어머니를 위해서였니?”

“…….”

마침내 레아가 희게 질린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네게는 두 가지 길이 있어.”

“…….”

“하나, 내게 얌전히 협력한 뒤 조용히 이 집을 나가는 것.”

“고, 공녀님!”

“두 번째는 추천서조차 받지 못하고 쫓겨난 다음, 입막음을 위해 독살되는 것.”

“!”

나는 여유롭게 서류를 팔랑거리며 말했다.

“자아, 어느 쪽이 좋을까? 네가 골라 보렴.”

* * *

같은 시각, 칼릭스의 집무실.

에스테반 후작저에서 돌아온 칼릭스는 복잡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침착하게 잘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거다. 여태까지 자라 오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네가 보고 있던 사실의 이면에 무슨 일이 도사리고 있었는지.”

“…….”

단정하게 다물고 있던 칼릭스의 입매가 비틀어졌다. 자신에게 충고하던 에스테반 후작의 모습을 떠올릴수록 마음속 깊은 곳에서 반발심이 솟구쳤다.

‘자기가 누님의 뭐라도 된다는 양…….’

하지만 반발심 따위 때문에 그의 의미심장한 충고를 완전히 무시해 버릴 정도로, 칼릭스는 멍청하지 않았다.

그랬다. 무척 유감스러운 일이었지만, 에스테반 후작의 충고는 요즘 칼릭스가 품고 있던 고민을 관통하는 데가 있었다.

‘의심해도 되는 걸까?’

칼릭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어머니를…….’

아니다. 사실 칼릭스는 알고 있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유리에게 은제 티스푼, 그것도 은에 반응하지 않는 독까지 검출할 수 있는 마법이 걸린 물건을 선물한 건, 그가 이미 어머니를 의심하고 있다는 방증이나 다름없었다.

에스테반 후작은 말했다. 유리를 지키려면 그가 경계해야 할 대상은 자신이 아니라고.

그 말은 즉, 누님을 지켜야 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었다.

칼릭스의 눈빛이 깊이 침잠한 순간,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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