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나는 이미 한 번 새어머니가 사용한 독에 당한 적이 있었다.
므와쟁 남작 부인이 있는 이상, 독에 대한 의심을 놓을 순 없었다.
다행히 식사 시간에는 집사가 꺼내 온 출처가 확실한 은제 식기를 사용하기 때문에 별문제가 없지만, 문제는 티타임을 즐길 때였다.
고민하고 있던 부분을 마침 해결해 주는 그런 선물이었지만…….
‘딱 맞춰 이런 선물을 하다니, 과연 우연일까?’
혹시 칼릭스도……?
‘아냐, 설마. 얘가 벌써부터 자기 어머니를 의심할 리가 없지.’
칼릭스 루트를 공략해 본 적은 없지만, 대충 듣기로 그가 새어머니의 본색을 눈치채는 건 아주 후반부라고 했다.
나는 일단 깊은 생각은 접고, 선물은 고맙게 받아 두기로 했다.
“고마워, 칼릭스. 잘 사용하도록 할게.”
“네.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바로 그때,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공녀님, 에나입니다.”
“들어오렴.”
문이 열리고, 커다란 상자 하나를 든 에나가 등장했다.
‘!’
라메르의 상자였다.
‘벌써 의뢰를 완료한 건가?’
어제 오후에 맡긴 의뢰를 오늘 아침에 완료해서 보고서를 보내다니. 가능한 속도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에나가 말했다.
“대공 전하께서 보내신 선물입니다.”
“……뭐?”
나는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되물었다.
“대공 전하께서…… 라메르의 과자를 선물로 보내셨다고?”
“네.”
에나가 빙그레 웃으며 상자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마침 잘되었어요. 공녀님께서 자주 주문하시는 과자점이잖아요.”
“그, 그렇지.”
“같이 드실 수 있게 준비해 드릴까요?”
나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에나가 미리 준비한 나이프와 접시를 가져와, 상자에 담긴 간식을 꺼내 예쁘게 잘라 주었다.
……공교롭게도, 애플파이였다.
‘……설마.’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생각했다. 아니겠지……?
그저 우연의 일치일 거라고 믿고 싶다.
“……흥, 선물로 보낸 게 고작 애플파이 한 상자라니. 대공 전하의 수준을 알 만하군요.”
칼릭스가 투덜거리며 포크로 애플파이를 못생기게 뭉개기 시작했다.
하지만 충격에 빠진 나는 칼릭스의 무례함을 지적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그 광경을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누님?”
칼릭스가 그런 내 기색을 예민하게 눈치채고 물었다.
“뭐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아, 아니. 문제없어.”
황급히 대답하느라, 나는 대공의 의미심장한 선물에 포크 대신 칼릭스가 선물한 은제 티스푼을 쑤셔 박고 말았다.
칼릭스가 묘한 눈빛으로 그 장면을 지켜보았지만,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멀쩡한 티스푼을 다시 찻잔에 담글 뿐이었다.
* * *
카미엘이 보낸 애플파이를 반쯤 뭉개다가, 칼릭스는 왠지 묘하게 허둥지둥하는 유리의 배웅을 받으며 방 밖으로 나왔다.
‘대공이 누님이 애용하시는 과자점을 알고 있었다니…….’
언제 둘이서 그런 대화까지 나눈 걸까? 칼릭스는 부루퉁하게 입술을 삐죽였다.
‘역시 그때 황궁에서 마주쳤을 때 생각보다 오래 대화를 나누신 모양이로군.’
……누님이 좋아하는 디저트와 좋아하는 디저트 가게. 그는 모르고 있던 사실을 대공은 알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그 얄미운 대공에게 진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소공작님, 말씀하신 대로 마차를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패배감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칼릭스는 재빨리 로윈이 준비한 마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마부에게 명령했다.
“에스테반 후작저로 간다.”
팔그란츠 1가에 있는 에스테반 후작저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이렇게 가까웠다니…….’
심기가 한번 꼬이니 별것이 다 불편했다. 칼릭스는 인상을 쓰며 마차에서 내렸다.
“로잔헤이어의 소공작님을 뵙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에스테반 후작가의 집사가 그를 정중하게 응접실로 안내해 주었다.
칼릭스는 금방 떠날 거라는 사실을 주지시켜 주듯, 외투와 장갑을 벗지 않은 채 응접실로 향했다.
응접실에는 미리 도착 소식을 들은 에스테반 후작이 있었다.
치가 떨리게 잘생긴 남자가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소공작.”
“에스테반 후작.”
칼릭스는 끓어오르는 속내를 감추며 에스테반 후작과 악수를 나누었다.
먼저 입을 연 쪽은 세드릭이었다.
“무슨 일로 찾아오신 겁니까?”
‘거두절미하고 바로 본론이라 이건가?’
칼릭스는 만만하게 보이지 않으려 단단하게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품 안에서 봉랍이 찍힌 서신을 꺼냈다.
“누님께서 보내시는 편지를 전달하려고 왔습니다.”
“!”
과연, 유리의 편지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세드릭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공녀께서 편지를 쓰셨단 말입니까?”
“…….”
청혼에 대한 답변으로 서신을 보낸다. 거절일 게 뻔한데도 세드릭의 말투에는 묘하게 감동한 기색이 배어 있었다.
그리고 그 점이 칼릭스를 짜증 나게 했다.
‘제까짓 게 누님의 편지를 받는다는 게 얼마나…….’
아직 그조차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편지가 아닌가? 아무리 거절의 말을 담은 서신이라지만, 전달해 주기가 심히 짜증이 났다.
칼릭스는 당연하다는 듯 그를 향해 손을 내미는 세드릭에게 편지를 순순히 건네주는 대신, “그 전에,” 하고 말을 꺼냈다.
“누님이 주신 편지를 드리기 전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세드릭의 표정에 의문이 떠올랐다. 칼릭스는 편지 봉투를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누님은 최근 들어 신경 쓰실 일이 많이 생겼습니다.”
“…….”
“늦은 나이에 마법사로 개화하셔서 힘든 공부를 이어 가고 계시는 건 물론, 최근에는 신성력까지 발현하여 황제 폐하께 따로 검증을 받기도 하셨습니다.”
“……그렇습니까.”
“여러모로 자랑스러운 누님입니다만, 그렇기 때문에 누님께 번거로운 일이 더 생기는 것이 달갑지가 않습니다.”
“…….”
세드릭의 회색 눈동자에 살짝 이채가 돌았다. 묵묵해서 눈치가 없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제가 소공작의 누님을 귀찮게 해 드렸다는 겁니까?”
“마음에 두지 않은 상대가 하는 갑작스러운 청혼만큼 부담스럽고 껄끄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
잘 벼린 칼날같이 날카로운 말에 단단하던 세드릭의 표정에도 마침내 균열이 생겼다.
칼릭스는 만족스럽게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으려 했다.
“부디 경이 누님의 거절의 말을 잘 이해하시고, 다시 그런 일을 반복하지 않기를……”
“소공작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군요.”
“!”
갑작스러운 말이었다. 날도 서 있지 않았다. 그저 사실이 그렇다는 것을 정확히 적시하는 어투였을 뿐.
하지만 칼릭스는 그 말에 칼에 찔린 듯 놀라고 말았다.
“대체 그게 무슨……?”
한 박자 늦게, 분노가 치솟았다.
“대체 그게 무슨 말입니까, 에스테반 후작!”
“소공작께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계신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말 그대로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화를 참지 못한 쪽은 칼릭스였다.
“내가 대체 무엇을 모른다는 말입니까?”
“말 그대로의 뜻이라고 말했습니다.”
세드릭이 무표정하게 맞받아쳤다.
“소공작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래서 유리 공녀를 지킬 수도 없습니다.”
“……!”
칼릭스는 이를 꽉 악물었다. 하지만 차마 도저히 헛소리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른다.
그 말이 치가 떨리게 싫은 이유는, 그 말을 듣자마자 짚이는 게 있었기 때문이다.
세드릭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분노에 몸을 떠는 칼릭스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유리가 그 집에서 당하는 일을 알아챈 그로서는 칼릭스의 무지함이 우스웠다.
그렇게 오래 유리와 같이 한집에서 살아 놓고서, 아무것도 모르는 저 무지함이 한심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소공작은 적어도 고의로 유리를 소외시키지 않았다.
태도에 대해서는 주의를 주고 싶은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지만, 이렇게 그를 찾아와서까지 경고랍시고 하는 말을 들어 보면 제 누님을 아끼는 건 사실인 것 같았다.
그 아끼는 누님이 처해 있는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게 괘씸한 부분이기는 했으나…….
세드릭은 냉정하고 침착하게 생각했다. 그는 여기서 칼릭스에게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을 수도 있었다.
저 건방진 청년이 뭐라고 치를 떨든 간에, 단호하게 그의 집에서 몰아내고 모른 척하면 그만이다.
그는 어른이었고, 흥분한 나이 어린 사람을 효과적으로 무시하는 방법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게 과연 공녀에게 도움이 될까?’
세드릭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칼릭스의 태도를 보아하니 유리가 집안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싸움을 홀로 싸우고 있다는 게 분명해졌다.
세드릭은 언젠가 유리에게 도움을 받은 만큼 그녀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유리는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안다. 그의 청혼은 충동적이고 갑작스러운 면이 없지 않았다. 그 자신조차도 자기가 내뱉은 말에 조금 놀랐을 정도였으니까.
유리 공녀를 사랑하느냐고 묻는다면 거기에도 명확히 대답할 순 없었다.
‘하지만.’
최소한 청혼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절대로.
‘그래 봤자 거절당했을 뿐이지만.’
하지만 세드릭은 침착하게 생각했다. 거절당하긴 했지만 유리는 그를 싫어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세드릭에게는 이 주제를 두고 충분히 시간을 들여 유리를 설득할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적잖이 필요할 터였다.
유리에게는, 최소한 얼마간이라도 그녀를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다.
유리에게 도움이 되기만 한다면.
세드릭은 저 건방진 소공작에게 자신이 아는 사실을 공유할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자존심이 센 소공작이 과연, 자신의 어머니가 그렇게 경애하는 누님을 괴롭히고 있다는 말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하는 수 없군. 세드릭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오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넌지시 힌트를 주는 정도일 듯했다.
“소공작.”
“…….”
“그대가 경애하는 누이를 위해 날을 세워야 할 대상은 내가 아니다.”
“……!”
뜻밖의 말과 태도에 칼릭스가 흠칫 놀랐다. 세드릭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침착하게 잘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거다. 여태까지 자라 오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네가 보고 있던 사실의 이면에 무슨 일이 도사리고 있었는지.”
칼릭스는 이를 빠득 악물었지만,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고 대들지 않았다. 세드릭은 내심 생각했다.
‘짚이는 곳이 아주 없진 않은 모양이군.’
그가 말을 이었다.
“관찰하고 생각해. 그게 네가 누이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
“그리고 여기까지가, 내가 네게 베풀 수 있는 친절의 마지막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에게 베풀어 줄 아량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 그마저도 유리를 위한 게 아니었다면 베풀어 주지 않았을 테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