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무슨 수를 썼는지 내려앉는 발걸음이 사뿐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고양잇과 맹수가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그렇게 서운한 소리를 하면 쓰나.”
“아니, 정말 괜찮은데…….”
“내가 여러 번 충고하지 않았던가?”
대공이 도무지 말귀를 못 알아듣는 어린 짐승을 대하듯, 나를 약간 안쓰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자꾸 피하면 더 다가가고 싶어진다고 하셨죠.”
나는 오기가 들어 그가 하려는 말을 가로채 버렸다.
“알고 있어요.”
“그걸 아는 사람이.”
대공이 훅, 하고 나와의 거리를 좁혔다.
“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걸까?”
하, 하하,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흐음, 하고 대공이 약간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에스테반 후작이 청혼했을 때는 피하지 않았잖아.”
“……네?”
여기서 갑자기 그 얘기가 왜 나와?
뜬금없는 소리에 내가 눈만 껌뻑이고 있자, 대공의 표정에 돋아난 심술기가 조금 더 명확해졌다.
“그러고 보니 나는 열심히 피하면서 에스테반 후작은 청혼까지 하는데도 가만있었군.”
“네?”
이 사람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람?
대공의 붉은 눈빛이 위험하게 희번덕거리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게 아니라…….” 하고 운을 떼고 말았다.
“그게 아니라면? 좀 더 자세히 말해 줘.”
떼쓰듯이 요청하는 그의 얼굴에 뭔지 모를 초조한 기색이 엿보였다.
나는 음…… 하고 난감하게 대답했다.
“청혼을 하시는데 어떻게 자리를 피해요?”
“아, 그래?”
대공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어쩐지 불길했다.
그가 씩 웃으며 물었다.
“그럼 나도 청혼을 하면 되나?”
“……예?”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전하, 제 말뜻은 그게 아니라……”
“덕분에 좋은 걸 배웠군.”
이 사람이 진짜!
대공이 나를 놀리듯이 눈으로 웃으며 휘파람을 휙 불었다.
“걱정하지 마. 배운 걸 지금 써먹지는 않을 테니까.”
“왠지 불안한데요…….”
“지금은 관객이 없잖나.”
……이 악랄한 인간을 좀 보게?
내가 눈에 쌍심지를 돋우자, 대공이 피식 웃었다.
“농담이야. 그렇게 무서운 표정 안 해도 돼, 공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쏘아보자, 대공이 어깨를 으쓱했다.
“정말이야. 그치하고 똑같은 행동을 해서 비교당하는 건 사양이거든.”
“…….”
“그래서 말인데, 공녀.”
대공이 내 쪽으로 허리를 숙였다. 붉은 눈동자가 즐겁게 반짝이고 있었다.
“충고 하나 해 주는데, 다음에 그런 놈들이 또 나타난다면…….”
“…….”
“공녀의 남동생을 한번 적극적으로 활용해 봐.”
“칼릭스를요?”
“그래. 내가 보기엔 번견 노릇을 아주 훌륭히 해낼 것 같……”
바로 그때였다.
“누님!”
“……칼릭스!”
알현이 끝났는지, 칼릭스가 나를 찾아 정원으로 나오고 있었다.
“대공 전하께서도 계셨군요.”
칼릭스가 짤막하게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대공이 뭐라 대답할 새도 없이 이어 말했다.
“저희는 황궁에 볼일이 끝나 이만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누님, 대공 전하와 인사를 나누시죠.”
“어? 아아.”
옳다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공에게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전하.” 하고 인사를 올렸다.
“허.”
그가 한 방 먹었다는 듯 중얼거렸다.
“나한테까지 번견을 써먹으라는 뜻은 아니었는데.”
“가시죠, 누님. 그럼.”
칼릭스가 매몰차게 대공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나를 돌아가는 길로 이끌었다.
곧이어 우리는 집으로 가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우려했던 것과 달리 황제 폐하께서 현명한 판단을 내려 주셨군요.”
“응?”
칼릭스가 적잖이 안심한 어투로 말했다.
나는 대공에 대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
황제가 현명한지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에 대한 결정은 운이 좋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칼릭스가 아버지를 향해 물었다.
“폐하께서도 누님의 일로 로잔헤이어와 대립각을 세울 수는 없다고 생각하신 걸까요?”
“폐하의 의중까지야 알 수는 없지만…….”
아버지가 팔짱을 끼며 대답하셨다.
“그것도 이유 중 하나는 될 수 있을 것 같구나.”
“……아버지께서는 다른 이유를 짐작하고 계신 건가요?”
“…….”
칼릭스의 질문에 아버지는 이번엔 침묵을 택하셨다.
‘아무래도 지금은 대답할 수 없는 내용인가 봐.’
그래도 이유가 어찌 됐건, 향후 대(對)마물 토벌전에 차출될 가능성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마음은 편했다.
* * *
생각보다 알현이 일찍 끝나서, 집에 돌아왔을 때는 오후 3시가 약간 지나 있었다.
‘시간이…… 괜찮을 것 같은데?’
나는 일단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주렁주렁한 장신구와 무거운 드레스를 벗었다.
평상복이라고 할 수 있는 간편한 드레스로 갈아입은 다음, 나는 폴리모프 반지를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공녀님, 어딜 가시게요?”
“로제타 의상실에. 저번에 맞춘 옷의 가봉 작업을 하기로 한 날이거든.”
에나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물었다.
“공녀님, 아무래도 저도 따라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뭐? 됐어. 괜찮아.”
뜻밖에 제안에 나는 재빨리 손을 내저으며 거절했다. 오늘도 내 최종 목적지는 로제타 의상실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더더욱 에나와 동행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전에도 말했다시피 잠깐 외출하는 정도는 나 혼자 가볍게 움직이고 싶어.”
“그러신가요……? 알겠습니다. 공녀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이해해 줘서 고마워. 그럼, 나 다녀올게.”
“네, 조심히 다녀오세요.”
마부가 익숙하게 칼라일 거리 쪽으로 마차를 몰았다.
로제타 의상실 쪽은 오늘도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탄 로잔헤이어 공작가의 마차는 맨 뒤에 줄을 서지 않고 곧장 의상실의 정문으로 향했다.
마차에서 내리면서 흘긋, 옆 가게인 카민스키 의상실의 동정을 살펴보았다. 카민스키 의상실은 예전과 다르게 완전히 한산한 분위기였다.
‘흐음.’
나는 일단 의상실 안으로 들어갔다. 로제타 부인이 곧바로 나를 반겼다.
“공녀님! 오셨군요. 마침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5층으로 올라가시지요.”
5층에 도착하자마자, 로제타 부인은 익숙하게 내게 중산층 아가씨가 외출할 때 입을 법한 평범한 옷을 내밀었다.
부인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으며, 나는 물었다.
“오다가 카민스키 경의 의상실을 봤는데, 손님이 아주 없진 않던걸?”
“네. 나이가 들어 의상실을 바꾸고 싶어 하지 않는 오래된 고객들이 남았다고 해요.”
“하지만 그 정도로는 예전 규모로 의상실을 유지하기가 힘들 텐데.”
“안 그래도 솜씨 좋은 재봉사들이 몇 명 직장을 잃었어요.”
“그 재봉사들은……?”
“아래층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답니다.”
“역시.”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그 아이들이 말하길, 카민스키 경이 제 의상 스타일을 따라 하려고 준비 중이라고 하더라고요.”
“한참 늦었네. 그거야 이미 온 수도의 의상실들이 하고 있는 거잖아.”
“그래도 카민스키 의상실은 워낙에 기본 퀄리티가 있어서…….”
“글쎄. 그것도 이제 더는 아닐걸.”
나는 고개를 저으며 설명했다.
“규모를 줄이기 위해 솜씨 좋은 재봉사를 잘랐어. 그 정도면 아마 예전 같은 좋은 원단이나 부자재를 사용하긴 힘들 거야. 상품의 질이 떨어지면 남아 있는 고객들이 떨어져 나가는 것도 당연한 수순일 테고.”
나는 옷을 다 갈아입은 다음, 폴리모프 반지를 손가락에 끼며 빙긋 웃었다.
“아무래도 내 생각에는 카민스키 경의 가게가 로제타 모자 가게가 되는 날이 그리 머지않은 것 같네.”
* * *
로제타 의상실에서 나온 나는 곧바로 라메르 과자점 쪽으로 향했다.
‘몰타를 방문하는 건 상당히 오랜만이네.’
“어서 오세요! 라메르입니다.”
예전 같았으면 점원들이 내 바뀐 얼굴을 알아보았겠지만, 폴리모프 반지를 바꾼 덕에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였다.
“찾으시는 상품이……?”
“몰타의 다섯 번째 산호섬에서 바라보는 노을을 한 잔.”
“……알겠습니다, 손님. 그 상품이라면 위층에서 안내를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예전과 같이 안쪽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안내되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손님.”
점원이 물러간 후, 조금 기다리자…….
“주문하신 산호섬의 노을이랍니다, 손님.”
익숙한 멘트와 함께, 붉은 머리카락을 아름답게 휘날리는 레이첼 콘스탄스가 등장했다.
나는 생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반가워요.”
“어머나.”
레이첼이 내 앞에 앉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한 일이네요. 분명 처음 뵙는 손님인데, 낯이 익다니.”
“아하하.”
이야. 역시 작중 최고의 정보 길드 수장답다.
그래도 세드릭이나 대공처럼 나를 완전히 알아본 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짐작은 하고 있는 정도?’
하긴. 이 정도 나이 또래의 평범한 여자가 작중 최고의 정보상을 찾아오는 건 흔한 일이 아닐 테니 말이다.
내 생각이 맞았는지, 레이첼이 씩 웃으며 말했다.
“뭐, 손님의 비밀을 캐묻는 건 정보상의 덕목이 아니니까요. 이쯤에서 그만하고, 어디 한번 의뢰를 받아 볼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품에서 몇 명의 인적 사항을 적은 서류를 꺼냈다.
“여기 적은 사람들의 뒷조사를 좀 해 줬으면 좋겠어요.”
“으흠.”
어디 보자…… 하고 중얼거리며 레이첼이 서류를 훑었다.
“레아 가렐, 헤일리 홀스턴, 에나 모린스…….”
“모두 한 저택에서 일하는 시녀들이에요.”
“그렇군요. 제가 어떤 점을 주안점으로 잡아 정보를 캐면 될까요?”
“목록에 기재해 뒀다시피 이 사람들은 고급 사용인이고, 매월 300골드 정도의 월급을 받고 있어요.”
나는 내준 차를 호록 마시며 설명했다.
“하지만 제 예상이 맞는다면, 이 중에 분명 자기가 받은 월급 이상의 소비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아하…….”
그제야 감을 잡았다는 듯, 레이첼이 씩 웃었다.
“배신자를 색출하시려는 거군요.”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