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유리 엘로즈 공녀!”
알현실로 들어가자마자, 황제가 가장 먼저 반긴 것은 나였다.
바로 그때.
미니 이벤트 발생!
당신은 신성력을 검증하기 위해 황제를 알현하게 되었습니다.
신성력을 검증받고 무사히 알현을 마칠 시, 보상이 주어집니다.
실패 시 황제의 ??를 얻게 됩니다.
……실패 시 황제의 ??를 얻게 된다고?
‘대체 ??가 뭐지……?’
길게 고민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나는 일단 칼릭스에게 이끌려 옥좌 앞에 다가갔다. 그리고 치맛자락을 펼치며 인사를 올렸다.
“로잔헤이어 공작가의 유리 엘로즈가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래, 그래. 소공작도 왔구나. 남매 사이가 친해 보이는 게 아주 보기가 좋아.”
황제가 껄껄 웃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과찬이세요. 저희는 태자 전하와 황녀님만큼 우애가 좋진 못하답니다.”
“음, 이안이 세실리아를 꽤나 아끼기는 하지.”
화술이 10 오릅니다.
황제의 흐뭇한 미소에 내 화술 수치가 덩달아 올랐다.
“그나저나 유리 공녀, 오늘 내가 그대를 부른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느냐?”
“감히 폐하의 의중을 짐작하지는 못했습니다만, 제 아버지께서 알려 주셨습니다.”
“그래. 오늘은 그대가 발현한 신성력을 검증하고자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황제가 너그럽게 웃으며 옆을 손짓했다.
“여기 궁정 마법사 수잔 일레인이 그대의 신성력을 검증할 것이다.”
황제의 손짓에 날카로운 인상을 한 마법사가 고개를 숙여 보였다.
“로잔헤이어 공작 각하, 그리고 소공작과 공녀님을 뵙습니다. 수잔 일레인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미욱하나마 공녀님의 신성력을 검증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내 딸을 잘 부탁드리오, 일레인 경.”
“예, 물론입니다.”
“공작,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내 이미 수잔에게 단단히 일러 놓았으니 말이야.”
“성은에 감사드립니다, 황제 폐하. 딸아이의 일이라면 걱정이 앞서는지라.”
“짐도 딸 가진 아비인지라 그대의 심정을 능히 짐작한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일레인 경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외알 안경 너머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무 불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공녀님.”
“네, 감사해요.”
“그럼, 이것을.”
수잔이 비로드 쿠션에 작은 유리병을 받쳐 내밀었다.
“!”
병 안에는 검붉은색의 액체가 담겨 있었는데, 나는 그 액체의 정체를 쉬이 유추할 수 있었다.
“이건…… 마물의 피로군요.”
“예, 그렇습니다.”
일레인 경이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녀님께서 처음으로 신성력을 발현한 것이 마물의 피를 정화한 일이라고 들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레인 경이 이어 말했다.
“같은 조건을 준비해 드리는 것이 능력을 발휘하기 쉬우실 것 같아, 준비해 보았습니다.”
“그렇군요. 배려에 감사드려요.”
나는 정화를 시작하기 전에 황제를 한 번 바라보았다. 황제가 미소 띤 얼굴로 시작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나는 사이한 기운이 느껴지는 마물의 피를 담은 유리병 가까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익숙한 시스템 메시지가 나를 반겼다.
경고! ‘비틀린 마류’를 감지합니다.
정화력을 사용하시겠습니까? Yes or No.
고개를 끄덕이자, 내 손을 통해 익숙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정화력을 사용합니다.
현재 정화력 총량: 1091
정화력이 30 소모됩니다…….
이미 죽은 마물의 피고, 양이 적어서 그런지 굉장히 적은 양의 정화력이 소모되었다.
‘이 정도면 됐나?’
유리병을 덮은 손을 치우자…….
“아아!”
일레인 경이 탄성을 내질렀다. 마물의 피로 가득 차 있던 유리병이 어느새 깨끗하게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소문을 듣고 거의 확신하고는 있었습니다만, 정말로 정화력을 발현하셨군요……!”
“그런가?”
황제가 고개를 기울였다.
“한데 내가 듣기론 유리 공녀가 처음 정화력을 발현했을 때는 금빛 기운이 사방에 충만했다고 들었는데……. 오늘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군?”
“그건 아마도 그때와 정화한 양이 달라서 그럴 겁니다, 폐하.”
일레인 경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와 달리 오늘은 적은 양의 정화력을 사용하긴 했어요.”
전에 대공을 상대로 40만큼 정화력을 사용했을 때도, 대공은 내게서 피어오른 아지랑이 같은 흰 기운을 보지 못했다.
‘아마도 정화력을 100 이상 사용해야 남들 눈에도 기운이 보이는 것 같아.’
나와 일레인 경의 설명에 황제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감축드립니다, 폐하. 200년 만에 신성력의 발현자가 나타나다니, 정말이지 제국의 홍복입니다.”
“그렇기는 하다만…….”
황제가 난감한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로잔헤이어 공작.”
“예, 폐하.”
“유리 공녀가 신성력을 발현한 것은 축하할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작, 자네 입장에서는 마냥 축하할 일도 아닐 걸세.”
“…….”
아버지는 대답 대신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황제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공녀의 능력은 분명 진짜지만, 그 능력을 실전에서 활용하기엔 분명 여러 가지가 부족할 것으로 보이는군.”
“그렇습니다, 폐하. 제 딸아이는 여태까지 공작가 담벼락 밖의 세상을 알지 못하는 아이로 자라 왔습니다.”
나는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속으로는 번쩍번쩍하게 차려입고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며 씩 웃고 있었지만 말이다.
“음. 짐의 딸도 마찬가지야. 그래서 경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네.”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짐이 보기엔 최소한 지금은…… 공녀가 대대적으로 능력을 선보이는 게 아니라 최소한 내실을 다져야 할 때 같아. 공녀는 어떻게 생각하나?”
나야 그렇게 말해 준다면 땡큐지.
……라고 대답할 수는 없어서.
“폐하의 고견이 옳습니다. 저는 보시는 바와 같이 평범한 아녀자일 뿐이라…… 제국의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다면 무한한 영광이겠으나, 그러기에는 부끄럽게도 제가 많이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화술이 20 오릅니다.
“음. 공녀도 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이구나.”
“하오나 폐하.”
일레인 경이 끼어들었다.
“공녀님의 능력은 무척 귀중한 능력입니다. 게다가 이뿐만이 아니라 보주의 봉인을 풀기도 하셨으니, 최소한 그 재능을 발전시킬 기회가 필요하다고 사료됩니다.”
“폐하, 그 점은 염려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곧바로 맞받아쳐 말했다.
“제 딸은 마탑주에게 사사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아아……!”
일레인 경이 탄성을 내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제가 잠시 그 사실을 잊고 있었군요.”
“그래. 짐이 보기에도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여겨지는구나.”
후. 다행이다. 여기서는 엘리야 덕분에 무사히 넘어가는구나.
황제가 턱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공녀가 보주의 봉인도 풀었지. 이렇게 신성력까지 발현하게 될 줄은 그땐 몰랐는데 말이야.”
“그저 운이 좋았습니다.”
“겸양이 지나치구나. 아, 혹시 그 보주는 현재 공녀가 가지고 있느냐?”
“보주는 지금 제 스승님이 연구 목적으로 맡아 두고 있습니다.”
“호오, 마라케시 경이…….”
황제가 좋다, 하고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무릎을 쳤다.
“오늘은 기념비적인 날이로구나. 200년 만에 제국에 신성력의 계승자가 나타난 것을 짐의 눈으로 확인했으니 말이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폐하.”
“다만, 아직 그 능력이 미약하니 공녀는 훌륭한 스승에게 사사하며 자신을 갈고닦도록 해라.”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미니 이벤트: 황제 알현을 성공적으로 끝마쳤습니다!
보상으로 명성이 100, 매력이 50, 기품이 50, 정신력이 30 오릅니다.
미니 이벤트에 무난히 성공하면서, 결국 실패 시 얻게 되는 황제의 ??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알현이 끝나고, 칼릭스와 아버지는 황제 폐하와 따로 나눌 이야기가 있다고 잠시 남게 되었다.
나도 남아 있어도 된다고 하셨지만, 불편한 차림으로 더 이상 골치 아픈 이야기를 듣는 건 사양이었기에 자리를 물러나겠노라고 말했다.
황제는 내 퇴실을 너그럽게 허가하고, 자유롭게 정원 구경을 해도 좋다고 허락해 주었다.
나는 알현실을 나와 정원까지만 시종의 안내를 받은 다음, 자유롭게 정원을 산책하기 시작했다.
황궁 정원은 우리 집 정원과 굉장히 비슷한 면이 있었다. 아무래도 새어머니가 우리 정원을 꾸밀 때 황궁 정원을 많이 참고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정원 한쪽에 아직 남아 있는 내 어머니의 온실은 꾸밈새가 좀 다르다고 들었는데.’
그러고 보니 아직 거길 방문해 본 적이 없었다.
‘따로 시간을 내 보긴 해야 하는데…….’
그런 생각에 잠겨 잠시 정원을 거닐고 있는데…….
“유리 공녀.”
“!”
익숙한 음성에 뒤를 돌아보았는데,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환청을 들은 건가?’
“거기가 아니고 여기야.”
“!”
좀 더 위쪽에서 들린 두 번째 음성을 따라 고개를 들어 보니…….
“대공 전하?”
대공이 굵은 나뭇가지 위에 길게 걸터앉아 열없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거긴 어쩐 일로……?”
“공녀야말로 여긴 어쩐 일이지?”
“아, 저는 오늘 폐하를 알현하러 왔다가…….”
“……황제 폐하를?”
‘어라?’
순간 약간 소름이 끼쳤다.
‘왜 그러지?’
바람이 불어서인가? 나는 드러난 팔뚝을 살짝 문질렀다.
‘그러고 보니 또 단둘이 있게 됐네…….’
무심결에 중얼거리다가 상황을 자각하게 되었다. 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그런 나를 보며 대공이 달콤하게 미소를 지었다.
“올려다보느라 목이 아프겠군, 공녀.”
“네? 아니, 저…… 괜찮아요. 대공 전하의 휴식을 방해할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 부디 그대로…….”
내가 간청하거나 말거나, 대공은 몸을 우아하게 움직여 나무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