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칼릭스는 저도 모르게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
어머니의 녹색 눈동자는 평소처럼 다정했다. 칼릭스는 그 눈을 보며 생각했다.
그래, 과민하게 생각하지 말자. 어머니도 당황하셔서 어쩔 수 없었을 뿐이야.
엘레니도 실수로 말이 헛나온 거겠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려 할수록 석연찮은 느낌은 가실 줄 모르고 크기를 키웠다.
“그럴 수가, 그럴 수는, 제게 이러시면 안 돼요. 저는, 저는 그저 마님이 시키신 대로 했을 뿐이에요!”
……아니다, 그따위 거짓말을 믿을 수는 없다.
‘일단 침착하자.’
칼릭스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표정을 정리했다. 그리고 말했다.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어머니.”
“그래, 그럴래?”
“네, 많이 놀라셨을 텐데, 이만 쉬십시오.”
“고맙구나. 내 아들은 정말 사려 깊기도 하지.”
“아닙니다. 그럼.”
칼릭스는 엘레니 쪽을 향해서도 인사를 남긴 뒤, 흔들림 없는 걸음으로 드레스 룸을 떠났다.
그리고 곧장 소공작의 집무실로 향하는데, 그의 앞에 한 시종이 지나가는 게 보였다.
“……잠깐.”
칼릭스는 저도 모르게 그 시종을 붙잡고 말았다.
“헉, 소공작님!”
“그 편지는 뭐지?”
“아, 네.”
시종은 당황하면서도 착실히 대답했다.
“유리 공녀님께서 에스테반 후작 각하께 보내는 서신입니다.”
“…….”
“……소공작님?”
칼릭스는 조금 생각하다가 손을 내밀었다.
“마침 내가 에스테반 후작을 만나러 갈 일이 있다. 편지는 내가 전해 주도록 하지.”
“아, 네.”
시종은 의심하지 않고 편지를 건네주었다. 어차피 봉랍이 찍힌 편지였기에 뜯어볼 수도 없었고, 소공작이 직접 전해 준다면 그로서는 귀찮은 일을 한 가지 더는 셈이었다.
칼릭스는 그렇게 세드릭에게 보내는 유리의 편지를 건네받아,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에는 그의 보좌관이 대기하고 있었다.
“로윈.”
“예. 소공작님.”
보좌관, 로윈이 깍듯하게 대답했다.
칼릭스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지금 그의 앞에는 두 갈래의 길이 있었다.
어떤 쪽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하는 그의 머릿속에, 유리가 남긴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그런 의미에서, 칼릭스. 나를 믿어 줘서 정말 고마워.”
……그 말을 떠올린 순간, 결정을 내렸다.
“……네가 해 줘야 할 일이 생겼다, 로윈.”
“말씀만 하십시오.”
“오늘 이 집에서 쫓겨난 하녀가 있어.”
“예.”
“그 하녀를 좀 조사해 줬으면 해. 되도록 은밀하게.”
로윈은 가타부타 이유를 캐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 * *
다소 찝찝한 감이 없지 않지만, 대충 사건이 해결된 뒤.
나는 방으로 돌아왔다.
‘그나저나 경합에서 엘레니를 이기다니.’
엄밀히 말하자면 경합에서 엘레니를 이긴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그때는 내 옷차림이 상황에 더 알맞았을 뿐이었으니까.’
지금처럼 수치로 엘레니를 이긴 건 처음이었다.
음, 이렇게 된 김에…….
‘상태창을 한번 볼까?’
나는 오랜만에 상태창을 열어 보았다.
<이름: 유리 엘로즈>
<진명: 유스티엔 리시르 엘라하 로잔헤이어>
<칭호: 어린 마법사, 마탑주의 제자, 베테랑 협상가, 다재다능, 보주의 해방자, 평화의 수호자, 사교계의 신성, 황태자의 동업자, 신성력의 발현자, 구혼자를 거느린>
명성: 7405
마나: 418/1000
지력: 358/1000
화술: 345/1000
매력: 355/1000
기품: 250/1000
정신력: 230/1000
정화력: 1091/????
“정화력이 상당히 많이 올랐네…….”
아무래도 그때 대공의 중독 상태를 정화하는 데 성공한 게 영향이 큰 것 같았다.
‘뭐, 이건 일단 제쳐 놓고.’
문제는 나머지 능력치였다.
‘냉정하게 말해서 이번 경합에서 이긴 건 경합 대상이 명성이었기 때문이야.’
보주의 봉인을 푼 덕분에 현재 내 명성은 유례없이 높은 수준이었다.
‘거의 게임 끝물에 달성하는 수치 정도?’
하지만 나머지 능력치들로는 엘레니와의 경합에서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마나는 꽤 높아서 500에 근접하고 있지만, 엘레니와 마나로 경합하게 되지는 않을 테니까.’
엘레니의 능력치가 넘볼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높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제로에서 시작하는 나보다 높은 수치로 시작해서, 같이 발전하고 있다는 거였다.
‘당분간은 능력치를 올리는 데 좀 신경을 쓰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저, 공녀님.”
“응?”
에나였다.
“공작 각하께서 공녀님을 부르셨습니다.”
“어? 아버지께서 벌써 집으로 오신 거야?”
“네, 조금 전에 도착하셨습니다. 오시자마자 공녀님을 찾으셨다고 합니다.”
오자마자 나를 찾았다면, 아까 엘레니 방에서 있던 소동을 듣고 날 부르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예? 황실이요?”
“그래.”
아버지의 집무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 아주 뜻밖의 소식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네 신성력을 궁정 마법사와 함께 정식으로 시험해 보고자 하신다.”
“황제 폐하께서…….”
하긴, 나는 200년 만에 제국에 나타났다는 신성력의 발현자였다.
엘리야의 보증이 있긴 했지만, 그건 황제가 보고 있지 않은 곳에서 나온 말일 뿐.
나를 따로 불러서 확인해 보려고 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귀찮긴 하지만.’
황제의 부름을 거절할 순 없었다.
‘이 일로 능력치나 올랐으면 좋겠다.’
“언제 입궁하면 될까요?”
“바로 내일이다.”
“네?”
바로 내일? 나는 약간 놀라고 말았다.
“보통 이렇게 급하게 입궁을 명하시나요?”
“네가 신성력을 발현하고도 꽤 시간이 지났으니 말이다.”
하긴 그랬다.
“걱정할 것 없다. 내일 입궁 때는 나도, 칼릭스도 함께할 테니 말이다.”
“네…….”
그렇다면야 확실히 안심이긴 했다.
“조금 긴장은 되네요.”
“긴장할 필요 없다. 물론, 네 신성력이 마물을 상대로 능력을 발휘한다는 점을 확인하게 되면 여러모로 귀찮아질 수도 있겠지만…….”
“역시 그렇겠죠?”
안 그래도 ‘균열’이라는 게 시도 때도 없이 발생하는 요즘 같은 시기에, 내 신성력이 마물 퇴치에 탁월한 효과를 보인다는 걸 공식적으로 인증받으면…….
“걱정하지 마라, 유리. 너는 신성력의 발현자이기 이전에 로잔헤이어의 공녀다. 너를 차출하려면, 먼저 나를 넘어야 해.”
“하하,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든든하긴 하네요.”
그래. 뭐, 신성력의 발현자라고 해 봤자 아직은 쥐꼬리만 한 능력이다.
‘크게 곤란해지지는 않겠지.’
……아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아버지 쪽에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아버지? 왜 그러세요?”
“유리.”
아버지의 시선은 굉장히 복잡해 보였다.
“에스테반 후작의 청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네?”
아, 그러고 보니 이 일에 대해서 아버지와 한 번도 대화를 안 했구나.
“음…….”
나는 약간 난감함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께서는 제가 에스테반 후작과 결혼하기를 바라고 계시죠.”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그 정도는 아니다.”
“네?”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일 줄 알았던 아버지에게서 의외의 대답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아버지, 전에 저한테 편지를 전해 달라고 부탁하시면서 그를 자연스럽게 알아볼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셨잖아요?”
“큼, 커험!”
아버지가 요란하게 헛기침을 했다.
“그건! 그때야 그놈이 이렇게 빨리 너를 채 가려 할 줄 모르고 그런 거였지…….”
“그놈이요?”
“에스테반 후작 말이다!”
“아, 아니. 저도 알아는 들었어요, 아버지.”
아버지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아무리 네가 마음에 들어도 그렇지, 그렇게 공개적인 자리에서…….”
“하지만 아버지, 그때 분명 청혼은 법적으로 금지된 사항이 아니라고…….”
“그야 남들 보는 눈이 있으니 그런 것이지, 아니었으면 내 그놈을 확!”
“지, 진정하세요, 아버지.”
분명 세드릭을 좋은 신랑감이라고 여기고 밀어주시려던 분이 왜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이 태도를 바꾸신 걸까?
‘이해할 수가 없네!’
하지만 어쨌든 지금은 아버지를 말리는 게 급선무였다.
“세드릭은, 그러니까 에스테반 후작님은 저를 좋은 친구로 생각하고 계세요. 청혼을 하긴 하셨지만, 그건 엄밀히 말하자면 일종의 사고 비슷한 거라……”
“뭐라고!”
진정하실 줄 알았던 아버지가 갑자기 벌컥 화를 냈다.
“그럼 그놈이 널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청혼을 했단 말이냐!”
“네? 그게 그런 뜻이…….”
돌겠네, 진짜.
‘어느 쪽에 장단을 맞춰야 하는 거야?’
“그렇게 안 봤는데 에스테반 후작, 그놈이 그렇게 여자를 가지고 노는 놈이었다니…….”
글렀다, 이건.
내가 아무리 어떻게 말해도 아버지는 화를 푸실 기색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마치 세드릭이 내게 청혼한 게 대역죄나 다름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청혼 그 자체를 몹시 마음에 안 들어 하시는 것 같달까…….’
세드릭을 지지하시던 분이 대체 어디서 저렇게 심사가 단단히 꼬이신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 * *
다음 날.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황궁에 입궁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했다.
평소에 입는 것보다 더 화려한 스타일의 드레스를 입고, 귀와 목, 팔과 손가락에 낄 수 있는 보석은 다 낀 데다가 가슴에는 브로치를 달고 머리에는 티아라까지 썼다.
정식으로 황제를 알현하러 황궁에 입궁하는 차림치고도 상당히 화려한 감이 있었지만…….
‘다 일부러 그런 거지롱.’
이번 자리에서는 내가 신성력의 발현자라기보다는 그냥 평범한 귀족 아가씨로 보이는 편이 나았다.
그래야 나를 실제 전투 현장에서 써먹으려는 생각을 하기 어려울 테니 말이다.
“누님, 준비는 다 마치셨…….”
열린 문으로 들어오던 칼릭스가 내 모습을 보고 말을 흐렸다.
“왜 그래, 칼릭스?”
“……아니, 아닙니다. 저, 그게…….”
칼릭스는 약간 더듬거리며 말했다.
“이렇게까지 차려입으신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아서…….”
“음, 그렇긴 하지. 왜, 많이 어색하니?”
“그, 그렇지 않습니다!”
칼릭스가 즉각 부정하고 나섰다. 그 열렬한 반응에 나는 약간 당황했다.
“그, 그래?”
“정말입니다. 어색한 게 아니라, 오히려…….”
칼릭스는 말을 잇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더니, 곧 내게 손을 내밀었다.
“……에스코트를 하겠습니다.”
“음…… 그래, 고마워.”
어차피 내가 칼릭스와 친해졌다는 건 어제부로 명명백백하게 다 알려진 사실이었다. 이젠 집 안에서라고 특별히 조심할 필요가 없었다.
곧이어, 우리는 아버지와 함께 마차를 타고 황궁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