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함정이다.’
순식간에 상황을 직감한 나는 새어머니 쪽을 바라보았다. 새어머니는 놀란 척 가슴을 부여잡고 있었지만, 그녀의 녹색 눈동자는 기이하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여태까지 새어머니는 철저히 물밑에서 나를 공격할 뿐, 겉으로는 나와 불화를 만들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런 사람이 왜 갑자기 기조를 바꾼 거지?’
대체 무슨 이유로……?
‘아.’
나도 모르게 방 안을 둘러보다, 당황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칼릭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 푸른 눈과 마주치자마자, 나는 새어머니가 왜 돌연 이런 일을 꾸몄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칼릭스 때문이구나.’
칼릭스와 내 사이가 예전과 달라졌다는 걸 눈치챘기 때문에, 저 애 앞에서 내 이미지를 다시 망치려고 하는 것이었다.
우리 사이를 다시 첩첩한 오해가 가로막도록 말이다.
“그럴…….”
그때, 엘레니가 힘겨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럴 리가 없어. 언니가 이런 짓을 했을 리가 없어요!”
“거, 거짓말이 아니에요. 유리 공녀님께서 분명 제게 엘레니 공녀님의 드레스를 어, 엉망으로 만들라고 명령하셨어요. 정말이에요!”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칼릭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누님이……”
바로 그때.
“아아…….”
“마님!”
새어머니가 때맞춰 머리를 붙잡고 쓰러지는 시늉을 했다. 칼릭스가 하려던 말도 잊고 그런 그녀를 잽싸게 부축했다.
“어머니, 괜찮으십니까?”
“그럴 리가 없어, 유리가, 내 딸이 그럴 리가 없어. 그렇지, 칼릭스?”
“…….”
새어머니가 칼릭스의 팔을 붙잡고 횡설수설했다. 칼릭스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므와쟁 남작 부인에게 새어머니를 부축하게 했다.
그 모습에 사람들 사이에서 “가엾은 마님…….” 하는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흐흑, 마님, 죄송해요! 저는 정말, 정말 유리 공녀님께서 시키신 대로만 했을 뿐이에요……!”
‘이런.’
나는 속으로만 혀를 찼다. 상황은 내게 지극히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지금은 많이 소강된 상태지만, 칼릭스는 원래 나를 오해하고 있었다. 이 일이 꺼진 오해의 불씨를 재점화해도 이상하지 않다.
‘호감도가 떨어지는 걸 각오해야 할 수도…….’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내가 무어라고 입을 열려던 찰나.
“……듣자 하니 참을 수가 없군.”
누군가 나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지금 로잔헤이어의 공녀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우겠다는 건가?”
노기에 가득 찬 음성으로 외친 사람은, 다름 아닌 칼릭스였다.
그 일갈이 얼마나 싸늘하던지, 웅성거리던 사람들의 목소리마저 뚝 멈췄다.
저를 바라보는 냉정한 시선에 하녀는 몹시 당황한 표정으로 손을 내젓기 시작했다.
“아, 아니에요! 저는 정말……!”
“그 입 다물어.”
칼릭스가 싸늘하게 명령하자 하녀가 딸꾹 소리를 내며 입을 다물고 말았다.
“……칼릭스?”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하려던 말도 잊고 멍청히 칼릭스를 바라보고 말았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새어머니도, 엘레니도 놀람을 감추지 못하고 칼릭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칼릭스는 하녀를 추궁하는 데 열중할 뿐이었다.
“누님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사주했다는 증거가 네 말 외에 어디 있지?”
“그, 그건…….”
있을 리가 없었다. 이런 일을 사주하면서 의뢰서나 계약서 같은 걸 작성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칼릭스는 단언했다.
“누님은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이 비슷한 짓조차 저지른 적이 없어.”
“하, 하지만 분명…….”
하녀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도움을 청하듯 새어머니와 엘레니 쪽을 쳐다보았지만, 그쪽에서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저기, 칼릭스……”
“어머니.”
겨우 새어머니가 입을 열었지만, 칼릭스가 대답하는 게 더 빨랐다.
“어머니께서도 누님이 어떤 분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그, 그래, 그렇긴 한데…….”
“그러시면 이런 말도 안 되는 모함에 동요하시면 안 됩니다.”
“전 괜찮아요.”
그때, 엘레니가 입을 열었다. 그녀가 결연한 빛을 담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물론 언니께서 이런 짓을 하실 리는 없지만, 설사 하셨다 해도 전 괜찮아요. 언니께서 하신 일이라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요.”
‘허.’
나는 속으로 탄복했다. 그게 아닌 척하면서 은근슬쩍 나를 다시 범인으로 모는 말솜씨가 대단했다.
“그러니까 오라버니, 전 정말 괜찮아요.”
바로 그때였다.
경합! 엘레니와 당신의 명성 수치를 비교합니다.
어라, 이 타이밍에?
당신의 명성 수치가 엘레니를 압도합니다.
경합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둡니다!
‘칼릭스의 보호’가 강화됩니다.
‘!’
이겼어?
뜻밖의 결과에 살짝 놀란 사이, 칼릭스가 단호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엘레니.”
그런데 칼릭스가 엘레니의 말을 엄격하게 뚝 자르는 게 아닌가?
“괜찮다는 건 이 상황에서 네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오라버니…….”
“이 자리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건 억울하게 누명을 쓰신 누님뿐이야.”
“…….”
정적이 찾아왔다. 사람들이 “하긴…….” 하며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쨍그랑!
마침내, 나를 범인으로 몰았던 하녀의 손에서 가위가 떨어졌다.
“저, 전, 저는, 정말 억울한, 저는…….”
하녀는 필사적으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그녀를 도와주려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바들바들 떨다가, 무릎걸음으로 새어머니에게 다가가 옷자락을 붙들었다,
“마님, 도와주세요, 마님……!”
“감히!”
므와쟁 남작 부인이 새어머니에게 매달리려 드는 하녀를 매몰차게 떼어 냈다. 칼릭스가 내게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누님?”
“……글쎄, 이 아이가 나와 엘레니, 어느 쪽에 원한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고, 공녀님, 저는……!”
“어머니.”
나는 새어머니 쪽을 일부러 구슬프게 쳐다보면서 말했다.
“제 생각에는, 안주인이신 어머니께서 이 아이의 처분을 결정하시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그래.”
새어머니가 어딘지 억눌린 것 같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집사.”
“예, 마님.”
“이 아이를 집에서 내보내게. 추천서 없이.”
“마님!”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하녀가 울부짖었다.
“그럴 수가, 그럴 수는, 제게 이러시면 안 돼요. 저는, 저는 그저 마님이 시키신 대로 했을 뿐이에요!”
새어머니는 이를 악물고 호통을 쳤다.
“참으로 입만 열면 거짓말을 지어내는 계집이로구나!”
“마, 마님……!”
“유리, 내 사랑하는 딸.”
새어머니가 다급히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설마 이 아이가 하는 헛소리를 믿는 건 아니겠지?”
나는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만 냉정히 계산했다.
‘역공을 할 수 있는 타이밍은 아니야.’
하녀에게는 이미 거짓말쟁이의 낙인이 찍혔다. 조금 분하긴 하지만, 이렇게 넘어가는 게 최선이었다.
‘그래야 저 하녀가 나에 대해서 한 말도 거짓말로 치부할 수 있어.’
계산을 마친 나는 대답했다.
“……그럼요, 어머니.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만 한 사람을 어떻게 믿겠어요?”
“그래, 고맙구나, 내 딸. 나를 믿어 줘서…….”
“별말씀을요. 저는 그저…….”
나는 씁쓸한 척 미소를 지었다. 새어머니의 눈에 짧게 긴장이 스쳤다.
“어머니와 엘레니도 처음부터 저를 믿어 주셨더라면, 정말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뿐이에요.”
“그건…….”
새어머니의 입에서 “내가 너무 놀랐다”는 둥 변명이 튀어나오기 전에, 나는 빠르게 칼릭스에게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칼릭스. 나를 믿어 줘서 정말 고마워.”
“……누님.”
“저는 이만 물러가 볼게요.”
“공녀님, 공녀님……!”
하녀가 이번에는 내 옷자락을 잡으려고 시도했지만, 새어머니가 “당장 저 거짓말쟁이의 입을 막고 끌어내라”고 명령하는 게 더 빨랐다.
나는 난처함과 당황스러움, 그리고 알 수 없는 감정이 뒤섞인 복합적인 시선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는 칼릭스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하며 웃어 보인 후, 그대로 돌아서서 내 방으로 향했다.
당황하지 않고 품위 있는 대처를 선보이는 데 성공합니다.
기품이 30, 정신력이 30 오릅니다.
* * *
칼릭스는 곧게 어깨를 펴고 제 방으로 돌아가는 유리의 뒷모습을 끝까지 바라보았다.
그러는 사이에 하녀는 다른 하인들의 손에 붙잡혀 끌려 나갔다.
“우읍, 읍!”
하녀는 끌려 나가면서도 끝까지 몸부림을 쳤다. 칼릭스는 그 모습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감히 누님에 대해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칼릭스.”
그때, 그의 어머니가 그를 불렀다.
“어머니.”
“네가 있어 줘서 정말 고맙구나. 네 덕분에 유리와 서로 오해를 만들지 않을 수 있었어.”
“…….”
“비록 유리는 내 태도를 약간 오해한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이만하길 정말 다행인 것 같구나.”
그 말을 들으며, 칼릭스는 마지막에 유리가 했던 말을 무심결에 떠올리고 말았다.
“어머니와 엘레니도 처음부터 저를 믿어 주셨더라면, 정말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뿐이에요.”
……그건 절대로 오해가 아니었다.
유리의 말이 맞았다. 부정할 수 없이, 어머니와 엘레니는 유리를 의심했다. 비록 한순간일지라도.
순간적으로, 칼릭스의 마음속에 이런 의문이 스치고 지나갔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누님을 의심하신 거지?’
기억 속의 어머니는 언제나 유리에게 다정했다. 그와 엘레니를 대하는 것과 별 차이를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사용인들도 항상 말했다. 마님께서는 정말 훌륭하신 분이라고, 첫째 공녀님을 정말 친딸처럼 여기신다고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쉽게……?’
곤경 속에 빠져서 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유리를 비호하기 전까진 아무도 유리를 감싸 주지 않았다.
어머니도, 엘레니도.
‘이상해…….’
그때, 어머니가 다정하게 그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칼릭스? 무슨 생각을 하는 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