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화 (86/182)

77화

* * *

세드릭의 청혼이라는 대사건이 있고, 다음 날.

나는 눈을 뜨자마자 세드릭에게 보낼 편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찾아가서 말을 할까 싶었지만, 청혼을 받은 상태에서 에스테반 저택을 공식적으로 방문하는 게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로 비칠지 알고 있기 때문에 그만두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편지를 쓰는 것이었다.

-친애하는 세드릭에게.

첫 줄을 쓰고 나니, 내용을 채우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젯밤 집에는 무사히 잘 돌아가셨나요?

간밤에 경의 청혼을 두고 생각이 깊었답니다.

일단 먼저, 저를 위해 청혼까지 고려한 경의 마음에 대해 깊은 감사를 드리고 싶어요.

음. 여기까지 좋다. 잘 썼다.

-……하지만 저는 아직 결혼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표현이 적절할지도 모르겠네요.

경께서는 제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알고 계시죠. 그게 경께서 이번 결정을 내리시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저는 생각보다 역경을 잘 견디는 편이랍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놀라실지도 모르겠지만, 가끔씩은 이 모든 일을 헤쳐 나가는 걸 즐기고 있는 것 같기도 해요.

그래서 아직은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하지는 않아요.

세드릭, 당신이 여태까지 보여 주신 호의와 도움이면 제겐 충분합니다.

-추신. 물론, 저도 당신이 어려움 속에 있을 때 기꺼이 손을 내밀고 싶어요. 우리는 비슷한 일을 겪고 있는 일종의 동지잖아요.

좋아. 이 정도면 내용은 대강 된 것 같아.

나는 만족스럽게 ‘진심을 담아, 유리 엘로즈’라고 서명을 마쳤다.

그리고 편지를 잘 접어 봉투에 넣고 봉랍을 찍었다.

“에스테반 후작저에 보내는 편지라고 전해 줘.”

“네, 알겠습니다.”

최근 들어 나는 다른 시녀들과 다 같이 함께 있는 것보다, 에나 하나만을 곁에 두는 데 익숙해졌다.

에나는 그다지 호들갑을 떨지 않는 편이라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나는 편지를 전하러 나가는 에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아무래도 조만간 몰타를 한 번 더 방문해 봐야겠어.’

하지만 지금은 그 일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나는 설렁줄을 당겨 다른 시녀들을 불렀다.

“의상실에 다녀올 거야. 준비를 좀 해 줄래?”

* * *

준비를 마친 나는 곧바로 로제타 의상실로 향했고, 거기서 옷을 갈아입은 뒤 대공이 선물한 폴리모프 반지를 꼈다.

‘……엘리야를 통해 정말로 폴리모프 기능만 있는 반지라는 걸 확인하긴 했지만…….’

……뭐, 괜찮겠지?

‘그렇게까지 확인했으면 믿어야지, 뭐.’

나는 찝찝한 마음을 애써 지우고, 이시스 상단을 향해 출발했다.

이안이 준 ‘로잘린 시드니’의 신분증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시스 상단에 도착해서 안내원에게 신분증을 보여 주고 ‘이안 해더윅 씨를 만나러 왔다’고 말하자마자, 나는 예전처럼 최상층으로 곧바로 안내되었다.

그리고 잠시 후.

“왠지 오랜만에 만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요.”

금빛 눈동자를 즐겁게 반짝이는 이안이 등장했다.

“이렇게 만나는 건 상당히 오랜만이긴 하네요.”

“새로 마련한 반지인가요?”

이안이 느긋하게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안이 돌연 의외의 제안을 하는 게 아닌가?

“여긴 아무도 보는 사람 없으니까, 빼는 게 어때요?”

“네?”

“모처럼 저도 본모습으로 있지 않습니까.”

이안이 생글생글 웃었다. 나는 왠지 모를 압박감을 느꼈다.

“뭐,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압박감에 져서, 나는 반지를 뺐다. 조금 짧아졌던 머리카락이 다시 길게 찰랑거리며 은빛으로 반짝였다.

“…….”

기분 탓인가?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는 이안의 눈빛이 유난히 다정해 뵈는 건.

“그…… 일단 오늘 찾아온 이유는요.”

“벌써 본론입니까?”

“?”

“아닙니다. 말씀하세요. 당신의 용건이라면 언제나 환영이니까.”

말투도 유난히 다정한 것 같았지만, 뭐.

‘오늘따라 기분이 좋은가 보지.’

“오늘 이렇게 찾아온 건, 새로운 사업안을 준비했기 때문이에요.”

“반가운 소식이군요.”

“1000골드씩이나 돈을 받으면 돈값을 해야죠.”

나도 양심이 있다.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하자, 이안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고마운 일이네요. 그래서 새 사업안은 뭔가요?”

“이시스 상단이 로제타 의상실의 옷감을 독점 공급하는 상단이 되었으면 해요.”

“로제타 의상실의?”

“로제타 의상실은 이제 명실상부하게 사교계 유행의 흐름을 주도하는 대세 의상실로 자리를 잡았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카민스키 의상실이 그랬던 것처럼, 이제는 모든 의상실이 로제타 의상실의 스타일을 따라 할 거예요.”

이안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에 용기를 얻어 이어 말했다.

“로제타 의상실에서 특정 원단을 사용하면, 너도 나도 그 원단을 구매하려고 할 거예요. 이럴 때 이시스 상단에서 그 옷감을 미리 전매하고 독점권을 행사한다면 어떨까요?”

“아하…….”

이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런 뜻이로군요.”

“네. 그런 뜻이에요.”

어려울 건 없었다. 로제타 의상실의 원단을 독점 공급한다는 사실만 알려져도 너도나도 이시스 상단과 공급 계약을 맺으려고 할 테니 말이다.

“관련 사업부를 꾸리고 추진을 해 봐야겠군요.”

“제가 로잘린으로서 신사업부를 맡을게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3 대 7로 하시죠. 물론 제가 7이에요.”

“그렇게까진 양보할 수 없어요. 반으로 나누죠.”

“이 사업안은 저나 로제타 의상실이 없으면 성립이 안 돼요. 제가 얼마든지 다른 상단과도 비슷한 계약을 체결할 수 있는 거, 아시죠?”

이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분명 그와 나는 흥정을 하고 있건만, 이안의 미소는 왠지 나를 마냥 기특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좋습니다. 4 대 6까지 양보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아요.”

나는 씩 웃으며 우리의 전통대로 손을 내밀었다. 이안이 웃으며 내 손을 마주 잡고 악수를 해 주었다.

뭐랄까, 이렇게 악수를 하면 기분이 좋았다. 꼭 그에게서 인정을 받은 것 같았다.

‘신사업, 잘해 봐야지.’

그렇게 의지를 다지고 있는데, 내 손을 놔주지 않은 이안이 불쑥 이렇게 물었다.

“그나저나 에스테반 후작의 청혼에 대해서는 어떻게 답할 생각입니까?”

“……네?”

전혀 생각지 못한 질문이었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어쩐지 내 손을 잡은 이안의 손이 뜨겁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에스테반 후작의 청혼에 대해 어떻게 답할지 듣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어…… 거기에 관심을 가지실 줄은 몰랐는데요. 그보다 손을 좀.”

“실례.”

이안이 그제야 내 손을 놓아주었다. 나는 꽉 잡혔던 감촉이 남은 손을 어색하게 감추며 대답했다.

“뭐…… 놀라실 일은 아니에요, 사실. 에스테반 후작께서 제게 청혼하신 건 전하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의도가……”

“이안입니다.”

“아, 네. 그랬죠. 어쨌든 이안이 생각하는 그런 뜻은 아니에요.”

“흐음.”

이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물었다.

“그럼 청혼이 달리 무슨 뜻이 될 수 있습니까?”

“자세하게 말씀드리기는 좀 어렵지만, 에스테반 후작께서는 저를 좋은 친구로 생각하세요.”

“좋은…… 친구.”

“네, 좋은 친구.”

“그렇다면 공녀의 말은 후작이 우정의 의미로 공녀에게 청혼을 했다는 겁니까?”

“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그래요.”

“……이것 참.”

이안이 푸흐, 웃음을 터트리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매력이 30 오릅니다.

……왜 이 타이밍에 매력이 오르는 거지? 나는 어리둥절해 고개를 갸웃했다.

이안이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한 번도 이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후작이 좀 불쌍해지는군.”

“……잘 못 들었어요.”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그냥 혼잣말이었어요.”

그런가?

“아무튼 두 사람이 ‘좋은 친구 관계’를 맺고 있다니, 제 마음도 흐뭇하군요.”

‘좋은 친구 관계’라는 말에 어쩐지 강세가 좀 들어간 것 같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라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은 흐뭇한 얼굴로 그런 나를 바라보았다.

“점점 더 공녀가 마음에 드는군요.”

“당연히 그러셔야죠. 이렇게 좋은 사업안을 가져다드렸는데.”

“하하하!”

돌연 이안이 배를 잡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래도 오늘따라 진짜 기분이 좋은 모양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 * *

이안과의 회의는 무사히 마무리했다.

이안은 차를 마시자며 나를 붙잡았지만, 곧 황태자 쪽의 그를 찾는 사람들 때문에 먼저 돌아가 봐야 했다.

나는 다시 로제타 의상실에 들러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무슨 일이지?”

묘하게 집안이 소란스러웠다.

“공녀님.”

집사가 굳은 얼굴로 내게 다가와서 말했다.

“지금 당장 엘레니 공녀님의 방으로 가 보셔야겠습니다.”

“엘레니의?”

의아했다.

“갑자기 그 아이의 방은 왜?”

“그러니까 그게……”

집사가 내게 무언가를 설명하려는 순간.

“오셨습니까, 유리 공녀님.”

므와쟁 남작 부인이 갑자기 나타났다.

“무슨 일이지?”

“마님께서 유리 공녀님을 엘레니 공녀님의 방으로 부르셨습니다.”

“어머니께서?”

대체 무슨 일이지?

‘좋지 않은 예감이 드는데.’

하지만 대놓고 이렇게 불렀는데 안 가겠다고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집사 쪽을 한 번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바로 가지.”

“모시겠습니다.”

므와쟁 남작 부인이 나를 데려간 곳은 엘레니의 드레스 룸 쪽이었다.

무슨 일인지 저택의 사람들이 와글와글하게 몰려 있다가, 내가 나타난 것을 보고 황급히 길을 비켜 주었다.

“어머니.”

방 안에는 새어머니와 엘레니, 그리고 칼릭스가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 새어머니와 엘레니가 희게 질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지?’

내가 막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던 순간.

“정말이에요! 저, 전 정말 유리 공녀님이 시킨 대로 했을 뿐이에요!”

“?”

나는 재빨리 소리를 지른 사람을 바라보았다. 얼굴을 모르는 하녀 한 명이 토르소 앞에 털썩 주저앉아 있었다.

손에는 가위를 들고 있었고, 토르소에는…….

끔찍하게 찢긴 드레스가 너덜거리며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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