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화 (85/182)

13. 돌이킬 수 없는

오후 3시.

공작 부인의 응접실에는 티타임을 위한 준비가 한창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평상시와 다른 점이 있었다.

“…….”

“…….”

시녀들은 이상할 정도로 침묵을 지키는 공작 부인과 둘째 공녀의 눈치를 살피며 평소보다 더 조심스럽게 상을 차렸다.

그때였다. 다기가 가볍게 달그락거리는 소리 외에 조용한 응접실에, 누군가 힘찬 발걸음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발소리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이십니까, 어머니?”

훈련복 차림을 한 칼릭스 로잔헤이어 소공작이었다.

소년이라 부르기엔 장성했고, 청년이라 부르기에는 아직 살짝 부족한 나이.

하지만 이 나이가 될 때까지 칼릭스는 단 한 번도 로잔헤이어 공작 부인의 자랑거리가 아닌 적이 없었다.

공작을 형틀로 찍어 둔 것처럼 준수한 얼굴에, 검술 실력마저도 아버지를 닮아 뛰어났다.

비록 아직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진 못했지만, 한 3년 정도만 시간이 더 주어진다면 오러 마스터가 되는 건 일도 아닐 거라는 게 소년을 둔 주위의 평가였다.

그뿐만 아니라 후계자로서 뒤를 잇기 위한 다른 자질 역시 충분했다.

전 공작 부인은 후계자를 낳지 못하고 죽었다. 그러니 칼릭스는 존재만으로도 로잔헤이어 공작 부인의 자부심이자 권력이 되어 주었다.

겉으로는 레티샤가 딸인 엘레니의 일에만 열을 올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다 유리 엘로즈와 전대 공작 부인을 향한 증오 때문이었지, 엘레니를 더 사랑해서가 아니었다.

레티샤의 마음속에서 칼릭스는 엘레니와 비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귀중한 존재였다.

레티샤는 그를 보며 습관적으로 다정하게 웃었다.

“일은 무슨 일이겠니. 그저 우리 셋이서 오붓하게 차나 한잔하고 싶어서 부른 거란다. 이쪽으로 앉으련?”

“아, 네.”

칼릭스는 반발하지 않고 레티샤가 시키는 대로 자리에 앉았다. 역시 단 한 번도 그녀를 실망시킨 적 없는 아이다웠다.

‘한데…….’

레티샤의 얼굴에 아주 조금 그늘이 졌다.

사랑스러운 아들에게서 이상한 조짐을 발견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레티샤는 일단 손수 내린 차를 첫 잔에 정성스럽게 따라, 아들에게 내밀었다.

“자, 칼릭스. 차를 받으렴. 피곤하지?”

“별로 그렇지는 않습니다. 매일 하는 일이니까요.”

“네가 그렇게 매일 훈련에 열심히 임하다니, 어미로서 참 흐뭇하구나.”

“……그저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아니에요. 오라버니는 정말 늘 성실하신걸요.”

“엘레니, 너 역시 마찬가지지.”

“후후.”

레티샤는 우애가 좋은 두 아이를 바라보며 웃었다.

비록 요즘 칼릭스의 행동에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긴 했지만, 그 점이 먹지 않아도 배부를 만큼 번듯한 두 아이를 바라보는 기쁨을 이길 수는 없었다.

이 아이들, 특히 칼릭스를 볼 때야말로, 레티샤는 자신이 전 공작 부인을 비로소 이겼노라고 실감하곤 했다.

“……그런데 어머니.”

“?”

레티샤는 흐뭇한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그녀의 자랑스러운 아들이 주위를 둘러보며 약간 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 그러니, 칼릭스?”

“바쁘신 겁니까, 누님은?”

멈칫, 레티샤의 얼굴이 굳어졌다.

“누님이라면…….”

“유리 누님을 말씀드린 겁니다.”

칼릭스가 어쩐지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겸연쩍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고 보면 누님은 어쩐지 저희와의 티타임에 함께한 적이 별로 없으신 것 같……”

“유리는 오늘 집에 없단다, 칼릭스.”

레티샤가 드물게 아들의 말을 끊으며 답변했다.

“아무래도 바쁜 일이 있는 것 같더구나.”

“……그렇습니까?”

“그래.”

레티샤는 겉으로만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기울이는 시늉을 하면서 생각했다.

역시 그녀의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이 아이…….’

칼릭스는 최근 들어 유리를 ‘누님’이라고 부르는 일이 잦아졌다.

그전까지만 해도 아주 마지못해, 공작의 앞에서만 유리를 누이라고 칭하던 아이였건만.

처음에 엘레니가 “그러고 보니 요즘 오라버니께서 말이에요.” 하고 말을 꺼냈을 때만 해도, 레티샤는 유리가 요즘 눈에 띄는 행동을 하니 칼릭스가 무심코 그렇게 부르게 된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이제는 무심코 지나가듯 언급하는 수준을 넘어서, 유리를 부르는 칭호가 ‘누님’이라고 완전히 자리를 잡아 버렸다.

‘대체 언제부터인 걸까?’

레티샤는 근심스럽게 칼릭스를 주시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리를 싫어하는 기색을 감추지 않는 아이였는데.

그녀가 엘레니의 일에 좀 더 신경을 쏟는 사이, 칼릭스의 유리에 대한 반감은 적잖이 수그러들어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차근차근, 유리에 대한 반감을 은연중에 심어 준 레티샤로서는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렇게나 공을 들였는데.’

대체 유리 엘로즈, 그 간악한 것이 무슨 말을 속살거리고 다녔길래 칼릭스, 저 아이가 이토록 단시간 내에 저렇게 무장 해제되었단 말인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다.

“오라버니.”

엘레니가 레티샤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입을 열었다.

“요즘 유리 언니와 사이가 많이 좋아지신 것 같아요.”

“……좋아지긴 무슨.”

칼릭스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불편한 기색으로 헛기침을 했다.

저런 모습을 보면 여전히 유리를 불편해하는 것도 같았지만…….

“마음이 앞서 제 누님을 곤란하시게 한 건 아닌지 잘 생각해 보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레티샤는 유리에게 청혼을 한 세드릭에게 보인 칼릭스의 반감을 떠올렸다.

그 말은 여러 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칼릭스는 유리를 손위 누이로 인정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청혼을 하는 남성에게 반감을 보일 정도였다.

‘대체 어느새?’

레티샤는 보이지 않게 이를 악물었다. 칼릭스가 제 여동생에게 이어 답했다.

“나는…… 그저 한 가족으로서 적당한 관심을 보인 것뿐이야.”

아니야.

그년의 딸은 우리와 한 가족이 아니야.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레티샤가 미소를 지었다.

“음…… 그렇다고 보기엔 칼릭스, 요즘 네 관심은 조금 지나친 것 같구나.”

“……예?”

칼릭스가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하는 것처럼 당황한 눈빛으로 제 어미를 바라보았다.

레티샤는 아들을 구슬리고 타이르기 위해 말을 골랐다.

“어제 유리가 청혼을 받았을 때, 네가 에스테반 후작에게 충고한 것 말이다.”

“…….”

“유리는 어엿한 성인이야. 청혼 역시 남녀 간에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

레티샤는 아들의 얼굴을 주의 깊게 관찰하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네가 그 자리에서 그렇게 나서 버리면, 외려 유리를 곤란하게 만드는 일 아니겠니?”

“하지만 어머니, 에스테반 후작의 청혼이 너무 급작스러웠고, 많은 사람 앞에서 누님을 곤란하게 한 것도 사실이지 않습니까?”

“…….”

‘그렇습니까’ 하며 순응할 거라 예상했던 칼릭스가 즉각 반발한 것에, 레티샤는 너무 놀랐다.

‘대체 언제 이런 지경에까지 이른 거지?’

그때, 엘레니가 맑게 웃음을 터트렸다.

“오라버니께서 정말로 언니를 생각하시는군요. 두 사람의 사이가 좋아져서 정말 기뻐요.”

“……그렇게까지 말할 정도는 아니다.”

칼릭스가 헛기침을 하며 부인했지만, 레티샤의 마음은 진정되지 않았다.

‘예전이었다면 어처구니없다는 듯 인상을 팍 찌푸리고 부인했을 텐데!’

레티샤는 후들거리는 손에 힘을 주어 찻잔을 잡고,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남매지간에 사이가 좋아진 건 축하할 만한 일이지.”

“제가 누님을 오해하고 있었던 건 사실입니다.”

칼릭스가 약간 시무룩해져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저 오해가 풀렸을 뿐이지, 누님 입장에서는 딱히 저를 그전과 다르게 생각하진 않으실 겁니다.”

“…….”

마치 그 사실이 마음에 큰 상처가 된다는 듯한 투였다.

레티샤는 노염을 감추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 했다. 대체 왜 그녀의 아이가 유리 엘로즈 따위를 상대로 저런 얼굴을 해야 한단 말인가?

‘간악한 것. 도대체 무슨 말로 아이를 홀려 놓았길래!’

여태까지 레티샤는 칼릭스의 마음속에 유리에 대한 반발감을 심어 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없는 일이나 말을 꾸며 내기도 했고, 사실을 왜곡하기도 했다.

그 다년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있다는 걸 확인한 순간, 분노도 분노지만 질린다는 감정이 먼저 들었다.

‘대체 유리 엘로즈 따위가 뭐기에!’

레티샤의 오랜 노력이 무색하게 남편도, 이 아이도 최근 들어 그 아이에게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레티샤는 뿌드득 이를 갈았다. 이 상황을 더 이상 좌시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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