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화 (83/182)

75화

그 순간, 왁자지껄하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뚝 멈췄다.

‘!’

다들 아닌 척하면서 이쪽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던 건가?

……아니, 그보다도 잠깐.

“세드릭? 왜 지금……”

무릎을 꿇은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일으켜 주겠다는 건가?

‘그럼 무릎은 왜 꿇었지?’

나는 헷갈리면서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얹었다.

……어쩐지 그의 손끝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러자 세드릭이 다시 한번 더 내 이름을 불렀다.

“유리 공녀.”

“……네?”

“갑작스럽겠지만.”

세드릭이 무덤덤한 특유의 말투로 입을 열었다.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네…….”

……잠깐, 뭐라고?

“네?”

‘히든 에피소드: 후작의 청혼’으로 진입합니다!

아니 잠깐만, 청혼?

‘이게 웬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는 소리야?’

이쪽은 상관도 않는 것처럼 떠들던 사람들이 일제히 숨을 죽이고 이쪽을 주시하는 게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침묵에 나는 나도 모르게 주변을 살펴보고 말았다.

그러다가…….

“…….”

미소를 짓는 것처럼 가늘어져 있는 붉은 눈빛과 눈이 마주쳤다.

……우습게도 그 눈빛을 보자, 내가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그, 세드릭 경.”

나는 간신히 그에게서 눈을 떼고, 세드릭을 불렀다.

하지만 당황스러운 심정은 배가 될 뿐이었다.

‘뭐라고 해야 하지?’

뭐라고 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다.

그런 나를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던 세드릭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알고 있었습니다, 대답하기 난감해하실 거란 걸. 그러니…….”

“…….”

“지금 당장은 대답을 구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기다리겠습니다.”

세드릭이 접었던 무릎을 펴고 다시 일어섰다. 하지만 내 손은 놔주지 않았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숙이는 게 보였다. 그리고…….

“!”

입술이 내 손등 위에 닿았다.

“……언제까지든.”

세드릭의 말에는 미사여구가 없었다.

그래서일까?

언제나 그렇듯 지금도, 진심이라는 게 올곧게 전해졌다.

‘후작의 청혼’을 거절합니다!

칭호, ‘구혼자를 거느린’이 부여됩니다. 칭호의 효과: 매력 +70.

당신을 염두에 둔 남성들의 질투를 유발할 수 있습니다.

* * *

세드릭 에스테반이 청혼을 했다.

평범하게 활기차던 응접실 안에 터져 버린, 폭탄이나 다름없는 청혼이었다.

“…….”

카미엘은 벽에 기대선 채로, 유리 엘로즈를 주시했다.

의도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저 시선이 붙잡힌 것처럼 그쪽을 향했을 뿐.

갑작스러운 청혼에 유리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가, 세드릭 에스테반이 손등에 입을 맞춘 다음에는…….

‘평소와 같아 보이지만.’

귓가가 슬그머니 발그레하게 물들어 있었다. 마치 꽃잎처럼.

“…….”

다른 생각보다도 먼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저 조그만 귓바퀴를 입술로 머금어 보지 못했다.

저도 모르게 잇새에 억세게 힘이 들어갔지만, 그런 카미엘의 심상찮은 기색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세드릭과 유리 쪽에 시선이 팔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네가…….”

폭탄이 터진 뒤,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바로 로잔헤이어 공작이었다.

“내 딸아이를 그런 식으로 보고 있었을 줄은 몰랐군.”

그래서 좋다는 건지 나쁘다는 건지 알 수 없는 말이었지만, 어쨌든 적어도 로잔헤이어 공작의 얼굴에 웃음기는 없었다.

‘흐음.’

저래 보여도 로잔헤이어 공작이 세드릭 에스테반을 사윗감으로 가장 낫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카미엘은 제멋대로 생각했다.

‘하긴, 눈앞에서 딸을 놓친 한심한 놈을 사윗감으로 반길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

그 생각을 하자 억눌렸던 잇새에 살짝 힘이 풀렸다. 카미엘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급작스러운 청혼으로 놀라게 해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뼛속까지 번듯할 것 같은 얼굴을 한 세드릭 에스테반이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며 말했다.

……문득 순간적으로, 자신은 저 정중함만큼은 결코 흉내 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마음이 앞섰습니다.”

꼴이라면 똑같이 따라 할 수 있어도, 그라는 사람이 하면 저런 진심이 담긴 우직한 모습은 나타나지 않을 터였다.

……뭐라고 해야 할까? 배알이 꼴린다고 해야 하나, 눈꼴이 시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좋은 감정은 들지 않았다.

“마음이 앞서 제 누님을 곤란하시게 한 건 아닌지 잘 생각해 보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유리와 반만 피가 섞였을 터인 칼릭스 로잔헤이어가 불쑥 시비를 걸고 나섰다.

‘호오.’

카미엘은 흥미진진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정중한 청혼에도 저렇게 날이 선 반응을 보이는 걸 보니, 그가 유리 엘로즈에게 한 짓을 알면 그를 죽이려고 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를 죽이겠다는 사람은 줄로 세우면 황궁 한 바퀴를 돌고도 남을 정도로 많아서 별생각이 들진 않았다.

“큼, 크흠.”

로잔헤이어 공작이 제 아들에게 눈치를 주며 다시 나섰다.

“뭐, 청혼은 법적으로 금지된 사항은 아니니 말일세. 내 딸이 거절했다면, 자네가 내 선까지 찾아올 일도 없고.”

“예. 공작 각하의 말이 옳습니다.”

흔들림 없이 대답하는 세드릭 에스테반을 바라보는 유리의 시선에는 여전히 당혹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귀가 여전히 붉군.’

이 자리에서 할 생각은 아니지만, 문득 유리 엘로즈의 손에 얼굴을 묻었던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기억이라기보다는 그때의 감촉, 그 순간의 느낌이 선연했다고 해야 옳을까?

기실 그때에 그를 감염시켰던 마물의 독은 심각하지는 않았다.

물론 슬러그는 상급 마물이었고, 평범한 사람들은 그 피에 노출되면 곧바로 심각한 혼수상태에 빠진다.

그 상태에서 시간이 오래 지나면 살이 녹아내릴 수도 있는 극악무도한 개체였다.

하지만 카미엘이 대상이라면 상황은 좀 달라진다.

어차피 그 자체가 오염 덩어리나 다름없는 상황. 검은 잉크를 담은 병에 잉크를 한 방울 더 떨어트린다고 해서 별일이 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잠시 의식이 멀어지긴 하겠지만, 잠깐 잠이 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조금 집중만 한다면 수마를 떨칠 수도 있었다.

또 다른 증상이라면…… 피부가 붉어지고 좀 가렵긴 하겠지만 그뿐이다.

하지만 카미엘은 그날, 독에 내성이 있다는 걸 자랑하고 싶진 않았다.

불쑥 이상하게, 평범한 사람인 척 잠시 정신을 잃고 싶어졌다.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저 여자가 당황하는 모습을 좀 보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한데…….’

어쨌든 카미엘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했다.

침투하는 독에 몸을 맡기고, 잠시 의식을 수면 아래로 떨어트렸다.

아주 얕은 잠이었다. 다른 위협이 오면 금방 깨어날 수 있는.

하지만 그를 엄습한 건 위협이 아니었다.

그게 문제였다.

카미엘은 아직도 묻고 싶었다.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얕게 정신을 잃었던 그를 일깨운 건 엄청나게 달콤한 체향이었다.

순식간에 입에 군침이 고일 정도로 달고, 신경을 보드랍고 포근하게 자극하는 냄새.

카미엘은 그 냄새를 기억하고 있었다.

언젠가 그의 코끝을 잠시 스쳐 지나갔던 유리의 체향이었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핑 도는 느낌이었다.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손이 먼저 움직였다.

맥이 작은 새의 날갯짓처럼 팔딱대는 가느다란 손목을 잡은 순간, 저도 모르게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

“……찾았다.”

그때의 감각을 뭐라고 형언하면 좋을까?

환희? 희열?

아니, 그런 순수한 말로 포장하기엔 조금 더 저열한 감정이었던 것 같다.

‘……지금 느끼는 감정은 그때보다 조금 더 저열한 것 같고 말이야.’

왜 그는 그날 수룡의 앞에서 세드릭 에스테반을 없애 버리지 않았을까?

‘등을 보이고 있었는데.’

잠깐만 손을 쓰면 그 목숨을 노릴 기회가 있었는데.

자각하지 못한 사이에 허무하게 기회를 날려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웠다.

카미엘은 살벌하게 입맛을 다셨다. 그가 미처 다 억누르지 못한 기세가 슬금슬금 주변 공기를 장악했다.

“……?”

은연중에 그 기세를 느끼고, 갑자기 소름이 돋아 주변을 둘러본 사람들은 설마 벽에 얌전히 기대 있을 뿐인 대공이 원인이라 생각지 못하고, 그저 이렇게만 생각했다.

‘……좀 추운가?’

카미엘은 그렇게 주변 사람들을 이유도 모른 채 떨게 만들면서, 상황을 주시했다.

유리는 다시 연주를 계속하려는 듯 피아노 앞에 다시 앉았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이때 사람들 사이에 섞여 들면 폭발적으로 밀려드는 질문과 관심을 감당해야 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세드릭은 아까처럼 그 옆을 지킬 수 없었다.

어쨌거나 청혼을 한 직후였기 때문이었다.

“자네, 나를 잠깐 보지.”

다행히 로잔헤이어 공작이 그를 점잖은 신사들의 세계로 이끌었다. 사람들이 소곤거렸다.

“과연. 오늘 밤 가까이 두고 그 심사며 심성을 파악해 보겠다는 의중이신 거죠.”

“공작 각하 곁에 두면 쓸데없는 질문으로부터 보호할 수도 있고요.”

유리의 곁에는 로잔헤이어 공작 부인이 다가가, 그녀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무어라 묻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서는…….

‘……아하.’

이안, 그의 친애하는 사촌이 유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미엘이 무언가를 깨달은 순간, 이안의 눈빛이 돌연 유리에게서 카미엘을 향했다.

아마 그가 바라보고 있는 시선을 이안도 눈치챈 모양이었다.

“…….”

카미엘은 손에 든 잔을 들어 보이며 씨익 웃었다. 이안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눈썹을 슬쩍 구겼다.

그렇게 두 적수는 서로를 인식했다.

‘재미있군.’

카미엘은 입맛을 다시며 생각했다. 감정을 제대로 분류해 본 적이 없는 그의 입장에서, ‘재미있다’는 그 말은 단지 호승심을 표현하는 단어에 불과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칼로 눈을 쭉 째 버리고 싶은 감정도 호승심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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