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대공 전하께서도 참석하셨군요.”
“의외여라. 사교 행사에는 그다지 인연이 없는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러고 보니 로잔헤이어의 행사에는 꼭 얼굴을 비치시네요?”
사람들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멀게만 들렸다.
“유리 공녀?”
이안이 나를 불렀지만, 내 시선은 이쪽을 향해 배부른 맹수처럼 다가오는 대공에게 붙박여 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내 앞에 다가온 그가 내게 인사를 건넸다.
“유리 공녀, 무사해 보여서 다행이군.”
“별말씀을요…….”
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다 대공 전하 덕분입니다.”
“뭐, 그야 그렇기는 하지.”
대공이 뻔뻔할 정도로 하하 웃으며 내 감사 인사를 날름 받아 챙겼다.
“공녀가 보내 준 편지와 선물은 잘 받았어.”
“목숨을 구해 주신 데 대한 보답으로는 너무 소박할 뿐이라…….”
“아, 역시. 공녀도 그렇게 생각하나?”
“……네?”
인사치레로 한 말에 이런 대답이 돌아올 줄이야 미처 몰랐다.
“저, 대공 전하……”
“나야 그냥 넘어가려고 했지만, 공녀가 약소한 답례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니 별수 없군. 공녀가 더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도록 ‘작은’ 부탁을 할 수밖에.”
“예?”
‘작은’이라는 말에 강세가 들어간 게 심상치 않았다.
“무, 무슨 부탁을 하시려는지……?”
“…….”
대공이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피하지 마.”
“네?”
“전에도 말했지 않나. 공녀가 그렇게 피할수록, 나는 더 다가가고 싶어진다고 말이야.”
“그건…….”
“카미엘.”
그쯤에서 이안이 보다 못하겠다는 투로 끼어들었다.
“공녀를 더 이상 곤란하게 만들지 마.”
“…….”
마냥 웃고 있던 카미엘의 시선이 눈을 한 번 깜빡이자마자 서늘하고 호전적으로 변해 버렸다.
그가 무어라 대꾸하려던 순간.
“자, 여러분. 이제 슬슬 만찬장으로 이동하실까요?”
‘후우.’
새어머니가 모두의 주의를 끌어 주었다.
일촉즉발의 순간은 그렇게 무산되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응접실의 사람들은 새어머니의 지시에 따라 둘씩 짝을 지어 만찬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대공이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자, 유리 공녀. 그럼 우리도……”
“러들리 자작!”
나는 그를 피하겠다는 일념만으로 주변에 있던 어느 자작에게 말을 걸었다.
“러들리 자작, 저를 만찬장으로 안내해 주시겠어요?”
“예?”
갑자기 내가 말을 걸어서인지 깜짝 놀란 듯한 그는, 이내 곧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공녀님. 다시없을 광영입니다!”
“그, 그렇게 말씀하실 것까지야…….”
상대방의 반응이 너무 열렬해서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이제 와서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나는 러들리 자작이 내민 팔에 조심스럽게 팔짱을 꼈다.
‘윽, 왠지 드러난 살갗이 따끔따끔한 기분이.’
고개를 들어 보니 대공이 미묘한 표정으로 턱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과연…….”
그가 중얼거렸다.
“러들리 자작, 오늘은 운이 좋았군.”
아무리 들어도 비꼬는 말이었는데, 러들리 자작은 “그렇습니다! 정말로 다시없을 광영입니다!” 하고 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차, 창피해.’
조용히 가고 싶었던 나는 몸 둘 바를 모르고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다행히 사람들이 줄지어 응접실을 나가느라 이쪽에 이목이 쏠려 있진 않았지만…….
“…….”
세드릭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이 나를 뚫을 듯해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더니.
“…….”
이안까지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었다.
‘……나, 잘못된 선택을 한 거 아닐까……?’
어쩌면 애초에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만찬에 참석하지 않는 게 정답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언뜻 스쳤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하하, 왜 갑자기 식은땀이 나는지 모르겠군요. 아마 공녀님을 에스코트하게 되어서 그런가 봅니다.”
‘그거 아냐.’
나는 러들리 자작을 빤히 바라보는 세 남자의 시선을 무시하려고 애쓰며 만찬장으로 향했다.
걱정한 것과 달리 만찬 시간은 무난하게 흘러갔다.
새어머니가 초청한 ‘수다쟁이’에 속하는 러들리 자작은 다행히 나보다 사람들과의 대화에 정신이 팔린 상태였다.
주된 화제는 호수에서 등장했던 마물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갑자기 급증하기 시작한 균열에 대한 이야기로 번졌다가, 마물을 물리친 세드릭과 대공의 무용담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두 분께서는 정말 굉장하셨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광경은 두 번 목격하기 힘든 진귀한 광경이었던 것 같습니다.”
목숨을 위협당한 일이 지나고 보니 진귀한 광경이 되었다.
“솔직히 저희가 여기 이렇게 무사히 모여 있는 건 다 에스테반 후작과 로엔 대공 전하 덕분이 아닙니까?”
“그럼요, 그럼요. 두 분의 무용은 정말 대단하셨죠.”
식탁 위에 자신들의 칭찬이 오가고 있는데도, 대공과 세드릭은 별 반응이 없었다.
‘아니, 좀 다른가?’
대공이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 없이 사람들의 말을 흘려듣고 있다면, 세드릭은 약간 어두운 표정으로 침묵하고 있었다.
……왜 그럴까?
마침 자리도 가까웠기 때문에, 나는 조용히 물었다.
“……경, 어디가 불편하신가요?”
세드릭이 어깨를 흠칫했다.
그는 곧 눈을 내리깔며 — 어쩐지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 대답했다.
“……아닙니다.”
“…….”
어색한 반응에 나도 약간 뻘쭘해지고 말았다.
하지만 깊이 생각할 틈도 없이, 만찬이 끝나 버렸다. 곧 사람들은 다과를 들기 위해 다시 응접실로 이동해야만 했다.
“가시죠, 공녀!”
“아, 네에…….”
러들리 자작이 워낙 소란스럽게 구는 통에, 세드릭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신경을 쓸 새는 없었다.
마침내 모두가 응접실로 옮겨 갔다. 새어머니는 기어코 이안이 엘레니를 에스코트하게 해 놓고 뿌듯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응접실에 도착하자마자…….
“유리, 우리 모두를 위해 피아노를 좀 쳐 주지 않을래?”
……라고, 내게 권유했다.
‘으음.’
아무래도 이안이나 세드릭, 혹은 대공이 나와만 대화를 하려 할 것을 염려해서 나를 피아노 쪽으로 쫓아내려는 모양이었다.
‘BGM 생산 기계 취급을 하겠다는 거지.’
뭐, 나도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남주인공들과의 친분을 유별나게 과시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다 사귄다느니 어쩌니 소문이라도 퍼지면 곤란하거든.’
“네, 그렇게 할게요. 어머니.”
나는 감사히 구석진 곳에 있는 피아노 앞에 앉았다.
‘흠.’
예전에 응접실에서 한 번 피아노를 건드려 봤을 때 느낀 거지만, 원래 이 몸은 피아노 실력이 꽤 좋았던 것 같았다.
나는 원래 피아노를 못 치지만, 지금은 내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음률도 충분히 이 손으로 구현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뭘 연주할까……? 이 세계의 음악은 모르니까, 역시 저쪽 세계의 음악을 연주해야겠지.’
몇 가지 곡을 속으로 고르다가, 한 가지를 꼽은 다음 손가락을 건반 위에 얹었다.
바로 그때였다.
“……유리 공녀.”
“!”
고개를 들어 보니, 세드릭이 피아노 바로 옆에 다가와 있었다.
“세드릭 경? 무슨 일이에요?”
“……걱정이 되어서 와 봤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새어머니 쪽에 흘긋 시선을 주었다.
“아.”
아무래도 나를 소외시키려는 새어머니의 전략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나는 겸연쩍게 미소를 지으며 속닥거렸다.
“괜찮아요, 사실 저 틈에 있기 좀 피곤했거든요.”
“그렇습니까.”
세드릭이 묵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내 옆을 떠날 기색은 아니었다.
‘음…….’
나는 천천히 건반을 누르기 시작했다. 눈에 띄는 곡을 연주하고 싶지 않았기에, 선곡은 드뷔시의 달빛이었다.
‘수다 떠는 소리에 묻힐 수 있게…….’
내 예상대로, 사람들은 물론 연주를 부탁한 새어머니도 내 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
아마 내 연주는 바로 옆에 서 있는 세드릭에게만 들렸을 것이다.
와글와글한 사람들한테서 외따로 떨어진 침묵 속에서, 나는 조심스럽게 연주를 이어 나갔다.
그러다가 슬쩍 위를 쳐다보니…….
“…….”
“…….”
이크.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세드릭과 눈이 마주쳤다.
“가만히 듣고 있기 좀 지루하실 것 같은데요, 경.”
“……그렇지 않습니다.”
세드릭이 나지막이 대답했다. 방해가 되고 싶지 않다는 듯이.
“무척…… 듣기 좋습니다.”
“…….”
칭찬을 듣자니 어쩐지 좀 민망했다.
습관대로, 나는 가벼운 말로 어색한 분위기를 넘기려 했다.
“다 그 호수에서 경이 지켜 주신 덕분에 이렇게 살아서 연주도 하고 그런 거죠.”
“…….”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렇지 않습니다.”
“네?”
내가 드뷔시의 달빛을 두 번째 반복하기 시작할 때쯤, 세드릭이 말했다.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경?”
“저는 당신께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그런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경께서요?”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거대한 수룡 앞에서 내 앞을 막아섰던 사람이, 뭐 어쩌고 어째?
나는 연주의 속도와 세기를 늦추며 빠르게 물었다.
“경, 설마 경이 수룡을 처리하지 못하고 제가 절벽에서 떨어졌다고 해서 제게 도움이 못 됐다고 자책하고 계신 건 아니죠?”
“…….”
이런 세상에. 정답이었나 보다.
나는 너무 황당한 나머지 이렇게 물었다.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세요?”
세드릭은 당황한 눈치였지만, 나는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 수룡 앞에서 경이 막아 주시지 않았다면, 전 반 토막이 났을 수도 있었는데요?”
“하지만…….”
“설사 막타를 대공 전하께서 치셨다고 해도 그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죠.”
“…….”
흥분한 나머지 예전 세상에서 쓰던 말이 막 튀어나왔다.
“공녀, 저는……”
“저는 충분히 경에게 감사하고 있어요.”
“…….”
“보세요. 지금 피아노 앞에 버려진 절 알아본 것도 경뿐이잖아요.”
어깨를 으쓱해 보이자, 세드릭의 입가에도 그제야 희미한 미소 비슷한 게 번졌다.
“……그렇습니까?”
“비밀인데요, 경.”
나는 엄숙한 척하며 손가락을 건반 위에서 튕겼다.
“전 사실 지금 이렇게 옆에 계셔 주시는 게 더 감사한 것 같아요.”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대공도 내 옆에 다가오지 않고 있었고…….
……또 그가 있으니까 정말 인파 속에서 혼자 아무도 듣지 않는 연주를 하는 그 민망한 기분이 안 느껴졌다.
세드릭에게는 항상 그 점이 고마웠다.
내가 이 집에서 겉도는 순간을 알아채 주는 것이 말이다.
‘아닌 척했지만 그게 꽤 스트레스가 됐나 봐, 나.’
그렇게 생각하며 빙그레 웃자, 세드릭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유리 엘로즈 공녀.”
“네?”
나는 세 번째로 달빛을 반복할 준비를 하며, 세드릭에게 대답했다.
바로 그 순간.
“!”
세드릭이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