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화 (81/182)

73화

“…….”

세드릭은 대답 대신 침묵을 택했다. 하지만 세드릭의 집사, 론은 말을 꺼낸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론은 아직도 그날의 일을 생생히 기억할 수 있었다. 최근에 테오도어가 말도 안 되는 협잡질을 하러 이 저택에 방문했던 그날을 말이다.

에스테반 후작가의 수치, 노름꾼 테오도어는 태어난 순간부터 세드릭의 골칫거리였다.

세드릭에게 따로 말은 안 했지만, 론은 테오도어의 존재가 언제고 세드릭의 발목을 붙잡을 거라고 늘 생각하고 있었다.

특히, 그는 에스테반 후작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무엄하게도.

‘그러니 아마 각하께서 누군가와 결혼하시는 모습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을 테지.’

불 보듯 뻔한 일이고, 자명한 일이었다.

세드릭 자체만 놓고 보면 이 제국에서 손꼽히는 신랑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간신히 쉬쉬하고 있는 테오도어의 문제가 수면 위로 부상한다면, 세드릭은 더 이상 모두가 원하는 그런 독신남이 될 수 없을지도 몰랐다.

‘그런 개망나니 동생이 딸린 집에 와서 고생하고 싶지 않다고 하면, 할 말이 없겠지.’

세드릭과 격이 맞는 양가의 영애를 안주인으로 모셔, 주인을 닮은 아이를 대대로 보필하는 것이 꿈인 론으로서는 테오도어의 존재가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날, 로잔헤이어의 공녀께서 테오도어와 가신들의 막말을 목격했을 때.

내심 그녀와 세드릭의 사이를 조심스레 점쳐 보고 있던 론은 날벼락을 맞은 듯 놀라고, 실망했다.

하지만 사태는 그의 섣부른 예상과는 다르게 돌아갔다.

“에스테반 후작께서 진지하게 만나는 상대가 없다는 말은 어디서 들으신 건가요?”

무려 로잔헤이어의 공녀가, 세드릭을 비호하고 나선 것이었다.

그것도 세드릭과 결혼을 고려하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면서 말이다.

그녀의 한 방은 멋지게 먹혀들어 갔다. 기고만장했던 테오도어는 변변한 말 한마디 못 하고 돌아가야만 했다.

그 뒤로 론은 남몰래 꿈을 꾸게 되었다.

로잔헤이어 공작가의 첫째 공녀를, 이 에스테반 후작가의 안주인으로 모시게 되는 꿈을 말이다.

론은 세드릭이 그 꿈을 충분히 이루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망나니 동생 테오도어의 일만 아니면, 세드릭은 흠잡을 데 없는 신랑감이었다.

얼굴 잘생겼지, 작위도 갖췄지, 더해 뛰어난 검술 실력으로 온 나라에 명망이 높았다.

게다가 로잔헤이어의 첫째 공녀께서는 테오도어의 만행을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정도로 배포가 컸으니, 그녀가 진지하게 세드릭과의 결혼을 고려하게 된다면 그 점을 문제 삼지 않을 터였다.

이 얼마나 완벽한 한 쌍이란 말인가!

하지만 세드릭의 태도는…… 열정적인 구혼자답지는 않았다.

론은 장담할 수 있었다. 공녀는 몰라도 최소한 세드릭은 그녀에게 아무 마음이 없지는 않았다. 오랜 세월 동안 모셔 온 주인이니만큼,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기만 하시면 될 텐데!’

하지만 짐작되는 마음에 비해 세드릭의 태도는 무척 정중하고 신중해서, 충성스러운 집사의 애간장을 태웠다.

지금도 그랬다.

공녀가 죽음의 위기에서 생환했다. 그렇다면 당장 공작가를 방문해서, 그가 공녀를 얼마나 걱정했는지를 알려 줘야 할 것 아닌가?

론은 세드릭이 눈앞에서 유리를 놓쳤다는 사실을 짐작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집무실에 틀어박혀 서류만 보는 주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간 지 오래라는 것도, 짐작하지 못했다.

“로잔헤이어 공작가에는……”

세드릭은 방문하지 않는다, 라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론이 선수를 치는 게 더 빨랐다.

“적어도 저쪽에서 초대장을 보내신 만큼, 만찬회에는 참석하셔야 합니다.”

“…….”

“로잔헤이어 공작 각하께서도 따로 불러 저녁을 대접할 정도로 각하를 아끼시지 않습니까?”

그 말에 세드릭의 얼굴이 한층 어두워졌다.

로잔헤이어 공작이 정말 그를 아낀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 저녁 초대를 받았던 날 밤에 알아냈던 사실 때문이었다.

그녀를 묘하게 배제하는 로잔헤이어 공작 부인의 태도.

하지만 공작 부인의 만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유리가 무도회를 주최한 날, 그녀에게 독을 먹이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

그날의 일까지 떠올린 세드릭의 뺨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속절없이 유리가 절벽 너머로 떨어질 때, 공작 부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 희열에 차서 그 광경을 지켜보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할수록, 유리를 안전하게 지켜 내지 못한 자신의 무능함이 싫어졌다.

무엇보다 유리를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눈앞에서 그녀를 놓친 자신을, 유리가 무슨 눈으로 볼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아니, 거짓말이다.

상상은 갔다. 주로 부정적인 쪽으로 말이다.

세드릭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믿을 수가 없군.’

자신이 이런 식으로 나약해질 수 있을 거라고, 세드릭은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각하, 유리 엘로즈 공녀님은 전에 각하를 한 번 곤경에서 구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랬다. 그리고 자신은 그녀를 구해 주지 못했다.

“각하께서 정찬회에 참석하지 않으시면, 공녀님께서 실망하실지도 모릅니다.”

“…….”

과연, 세드릭을 잘 아는 론의 말은 대단히 설득력이 있었다.

‘그래…….’

세드릭은 공녀에게 빚이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랬다. 로잔헤이어 공작 부인은 유리가 죽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기뻐했을 터였다.

한데 그런 유리가 멀쩡히 살아 돌아왔으니, 얼마나 속이 뒤집어질 것인가?

그런 억하심정이 무사히 살아 돌아온 유리에게 향할 거란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렇게 비상식적인 초대장이 도착한 것도 그랬다. 표면적으로는 유리의 생환을 축하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었지만, 공작 부인의 속은 그저 자신의 연속적인 실패를 무마할 생각으로만 가득할 터였다.

그런 식으로, 그 집에서 유리의 처지가 더 곤란해졌을 거라고 생각하니 입맛이 썼다.

‘……엄밀히 말하자면 내게는 그럴 자격이 없지만.’

그날 호수에서 대공조차 그렇게 말했다.

“후작이 공녀의 대변인인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다못해 피앙세라도 되나?”

“대공 전하.”

“거봐. 후작은 공녀의 그 무엇도 아니지 않나.”

조롱하듯 말하던 목소리를 떠올리자, 손아귀에 순간적으로 강하게 힘이 들어갔다.

빠직.

“가, 각하!”

나무로 만든 펜대가 세드릭의 손에서 맥없이 부서져 버렸다.

“세상에, 갑자기 왜……?”

“론.”

세드릭이 감정을 싣지 않은 어투로 집사를 불렀다.

“로잔헤이어 공작가의 정찬회에 참석할 채비를 해 둬라.”

“예? 저, 정말이십니까?”

세드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여태까지 유리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유리가 눈앞에서 음독하는 장면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리고 다시 주어진 기회에서도 유리를 지키는 데 실패했다.

하지만 유리가 처한 곤경은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그녀를 집어삼키려고 하는 적은 여전히 같은 집 안에서 도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눈치챈 건…… 적어도 아직까진 세드릭, 그 하나일 터였다.

“후작은 공녀의 그 무엇도 아니지 않나.”

그랬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세드릭은 유리의 그 무엇도 아니었다.

피앙세는 언감생심, 겨우 친구라는 칭호를 붙일 수 있을 정도일까?

하지만 세드릭은 최소한 알고 있었다.

유리에게는 조력이 필요했다.

그 사실을 아는 한, 세드릭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 * *

정찬회를 기획하게 된 이유는 별것 없었다.

불미스러운 사건 뒤에 갑자기 무도회 따위를 열 순 없었고, 시간도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초대장은 여러 부류의 사람들에게 보내졌다.

서른 명 정도를 기재한 리스트를 살펴보니 대체적으로 계급이나 사회적 명망이 높은 사람들 사이에, 발이 넓거나 입이 가벼워 정찬에서 보고 들은 것을 잘 떠들어 줄 사람들이 적재적소에 끼어들어 있었다.

당연히 그 리스트에는 이안, 세드릭, 그리고 대공 전하께서도 포함되어 있었다.

“……상당히 복잡하겠는걸.”

“네? 공녀님?”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치장이 끝난 몸을 일으키고, 나는 방문을 열게 했다.

응접실에는 이미 대부분의 손님들이 도착해 있었다. 그 사이로 내가 등장하자, 사람들의 대화가 잠시 멈췄다.

“어머, 공녀!”

“소식만 들었는데, 정말 무사하셨군요! 세상에나.”

곧이어 다시 응접실이 왁자지껄해졌다. 나는 나를 열렬히 환대하는 사람들에게 섞여 들어갔다.

그러다가 살짝 눈을 들어 보니, 저쪽 벽에서 믿을 수 없다는 듯 커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세드릭과 눈이 마주쳤다.

“…….”

나는 인사 대신 살짝 손을 들어 알은척을 해 보였다. 하지만 세드릭은 마치 얼음처럼 굳어 내게 아무런 답도 해 주지 않았다.

‘음.’

나는 살짝 민망하게 손을 거두어들였다.

“공녀.”

이미 무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있던 이안이 나를 불렀다.

“전하.”

“무사하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실제로 무탈한 모습을 보니 적잖이 안심이 되는군요.”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친 곳은 없습니까?”

“정찬회에 참석할 만큼은 다 나았어요.”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지만, 이안은 그저 가만히 미소를 짓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가 다정한 눈빛을 한 채 내게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을 해 보였다.

그 미모에 홀린 탓일까? 나도 모르게 고개를 가까이 하자, 이안이 내 귓가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속삭였다.

“다 나았다는 말이 그다지 믿기지 않는데, 혹시 다른 방식으로 신뢰를 주실 수 있겠습니까?”

“……네?”

대체 어떤 방식으로?

나도 모르게 이렇게 대답하고 말았다.

“멍도 하나도 안 들었는데…… 옷이라도 풀어서 보여 드려야 할까요?”

“…….”

아차. 뇌에 힘을 풀고 대답해서 그런가, 공녀답지 않은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공녀…….”

“아, 그러니까……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정말 사람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군요.”

내가 창피해서 그런가, 이안의 눈가가 슬쩍 붉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죄송합니다. 주의할게요.”

“아니…… 제 앞에서는……”

이안이 무언가를 말하려던 순간, 갑자기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어머, 저기 로엔 대공 전하가 아니신가요?”

뭐!

나는 깜짝 놀라 응접실 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그리고 시선을 돌리자마자, 말없이 서서 이쪽을 향해 웃고 있는 붉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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