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한밤중에 깨어났을 때, 그녀는 이 일이 차라리 악몽이길 바랐다. 하지만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유리는 멀쩡히 살아 있었고, 이 저택에서 숨을 쉬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레티샤는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아아아악……!”
끔찍한 비명을 지르는 그녀에게 시녀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평소 레티샤는 므와쟁 남작 부인을 제외한 시녀들에게는 제 속내를 확실하게 숨겨 왔으므로, 시녀들은 이렇게 그녀를 달래기 시작했다.
“진정하세요, 마님!”
“유리 공녀님께서는 무사히 살아 돌아오셨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마님. 유리 공녀님께서는 무사하세요!”
레티샤는 한동안 진정하지 못했다.
그게 바로 간밤에 일어났던 일이었다.
유리 엘로즈는 살아 돌아왔다. 레티샤는 또다시 실패한 것이다.
‘엘레니…….’
깨끗하게 닦인 손을 멍하니 바라보며, 레티샤는 제 딸을 생각했다. 그 가여운 아이를 떠올리자 눈물이 절로 흘렀다.
‘이 어미를 믿어 주겠다고 했는데, 나는…….’
딸아이의 믿음에 보답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가슴 찢어지게 아팠다.
그년의 딸이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이 달군 쇳덩이로 가슴을 지지는 것만 같았다.
깨끗해진 손으로 레티샤는 다시 기계적으로 편지를 써 내려갔다.
어제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 공식적으로 유감을 표하며, 그 불행하고도 우연한 사건에도 로잔헤이어 공작가의 유리 엘로즈가 기적적으로 생환한 것은 여러분들의 기도 덕분이었다는 헛소리를 적으면서, 레티샤는 처절히 무너지는 느낌을 맛보아야만 했다.
“……마님.”
편지를 다 적었을 무렵.
“엘레니 공녀님께서 오셨습니다.”
유려하게 서명을 그리던 레티샤의 손이 뚝 멈추고 말았다.
“……들어오라…… 하렴.”
마침내 문이 열리고, 엘레니가 등장했다.
“어머니, 좀 괜찮으세요?”
“……미, 미안하구나, 엘레니.”
딸을 보자마자, 겨우 진정했던 감정이 울컥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이번 일을 통해 이 어미에게 많이 실망했을 거야……. 그렇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면…….”
엘레니가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안타깝다는 듯 대답했다.
“거짓말이겠죠.”
“!”
“하지만 오늘은 어머니를 탓하려고 찾아온 게 아니에요.”
“그, 그럼……?”
“한 가지, 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요, 어머니.”
* * *
다음 날.
로잔헤이어의 식구들은 모두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여 오찬을 들기로 했다.
어제 내 방을 찾아와 한바탕 지독하게 울고 간 새어머니를 근시일 안에 다시 만나고 싶진 않았지만, 뭐. 별수 없었다.
나는 알려 준 시간보다 조금 느지막이 식당으로 내려갔다.
“유리, 늦었구나. 아직 몸이 많이 아프니?”
새어머니가 가장 먼저 나를 반겼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전 괜찮아요.”
“회복하셨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언니.”
“고마워, 엘레니.”
“…….”
“…….”
칼릭스와 아버지는 내가 엘레니, 새어머니와 인사를 나누는 동안 눈 한 번도 깜빡하지 않고 나를 주시했다.
마치 어딘가 조금이라도 미령한 기색이 보이면 나를 당장이라도 올려보낼 듯한 그런 눈빛들이었다.
하지만 의사의 훌륭한 처방과 스승님의 회복 마법 덕에 약간의 근육통마저 거의 다 회복한 나는 흠잡을 데 없는 자세로 자리에 앉는 데 성공했다.
“……식사를 가져오도록 해라.”
아버지가 명령하자, 시종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점심 식사이니만큼 정찬처럼 무겁지 않고 비교적 간단한 메뉴들이 식탁에 올랐다.
다들 말없이 반쯤 음식을 해치웠다. 식사가 중반을 넘어가자, 새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온 가족이 모여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게 정말 믿기지 않아요, 여보. 그렇죠?”
“…….”
대답 대신, 아버지의 눈이 곧바로 나에게 꽂혔다.
“유리.”
“네, 아버지.”
“몇 가지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지만, 천운으로 별 탈 없이 넘어갈 수 있었지. 당분간 몸을 아끼는 데 집중하도록 해라.”
“네, 알겠습니다.”
“너를 구해 주신 대공 전하께는 나도 로잔헤이어의 이름으로 감사를 표하긴 할 테지만, 너 역시 따로 개인적으로 감사 인사를 드리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안 그래도 인사 편지와 약간의 선물을 보내 드렸어요.”
“음.”
아버지가 그만하면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보.”
새어머니가 재차 아버지를 불렀다.
“이렇게 유리도 무사하고 하니…… 아무래도 제 생각엔 몇몇 사람만이라도 집에 초대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무슨 말이오, 그게?”
아버지가 미간을 찌푸렸다.
“본의는 아니었다지만 로잔헤이어에서 주최한 행사를 두 번이나 망쳤잖아요.”
새어머니는 그렇게 말하고는 나를 바라보며 난처한 듯 웃었다. 마치 그 행사들이 망한 게 내 탓이라는 투였다.
“물론 제가 사정을 설명하는 편지를 보내기는 했지만, 그래도 몇 분만큼은 제대로 초대를 해서 대접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그 난리가 벌어졌는데도 또 사람을 부르자는 거요?”
아버지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당분간은 됐소. 유리에게는 휴식이 필요해.”
“……최근 유리에게 일어난 일련의 일들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 말들이 많아요.”
“감히 그런!”
아버지의 얼굴에 노기가 치솟았다. 하지만 새어머니는 태연했다.
“이럴 때일수록 로잔헤이어에는 아무 일도 없음을,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다는 걸 보여 줘야 해요.”
“떠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내 딸이 아무 이상 없다는 걸 굳이 입증해야 한단 말이오?”
“진정하세요, 여보. 이건 다 유리를 위해서예요.”
“…….”
“유리에게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걸 보여 주지 않으면, 소문은 점점 더 걷잡을 수 없게 될지도 몰라요.”
그건…… 놀랍게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 때문에 나도 근시일 내로 사교 행사에 참석해서 얼굴을 비칠 계획이었다.
하지만 나는 새어머니가 새로운 모임을 계획하는 이유가 나 때문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연이은 두 번의 실패로 큰 타격을 입은 건 새어머니 쪽이지, 내 쪽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를 핑계로 대서라도, 이 불운한 사건의 연쇄 작용을 끊어 버릴 기회가 새어머니에게는 절실히 필요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해할 필요는 없어.’
어느 정도는 나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잠시 한숨을 쉬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마침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을 너무 무리시키는 일은 없어야 하오.”
마침내, 아버지의 허락이 떨어졌다.
새어머니가 생긋 웃으며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물론이죠. 저도 아이들을 위해서가 아니면, 당분간은 조용히 지내는 쪽을 택했을 거예요.”
날짜는 일주일 후로 잡혔다. 정찬회였다.
* * *
“그럼 태자 전하, 신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음. 그래.”
집무실에 혼자 남은 이안은 잠깐 펜을 내려놓고, 피곤한 그늘이 드리운 눈가를 문질렀다.
그의 앞에는 두 통의 서신이 놓여 있었다.
모두 다 로잔헤이어 공작가에서 보낸 서신이었다.
이안은 그중 한 통의 편지를 다시 집어 들었다. 그리고 반복해서 읽었던 한 구절을 다시 읽어 보았다.
불미스러운 사고에도 불구하고 유리 엘로즈 공녀가 살아 돌아온 것은 바로 여러분의 기도 덕분이라는 그 한 문장을, 다시 한번 반복해서 읽었다.
‘그래…….’
유리는 무사했다.
“…….”
하지만 그 사실이 뇌리에 각인처럼 새겨진 그날의 장면을 몰아내지는 못했다.
호수를 가르고 용솟음치던 뱀 형태의 마물, 그 앞에서 나뭇잎처럼 떠다니던 유리가 탄 조각배.
“오라버니, 오라버니……!”
하지만 이안은 섣불리 그쪽으로 다가갈 수 없었다. 수룡이 갑자기 이쪽으로 진로를 틀 때를 대비해서, 그의 여동생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을 지켜야 하는 책임이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초조함으로 등에서 진땀이 흘렀다.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당장이라도 곁으로 다가가 힘을 보태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기가 힘겨울 정도였다.
그리고 끝내 유리가 절벽으로 떨어질 때는 어땠던가?
“…….”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차라리 그가 유리와 함께 저 절벽 아래로 떨어질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일국의 태자로서 할 만한 생각은 아니었다. 타당하지도 올바르지도 않았다.
한순간 느꼈던 끔찍한 감정을, 이안은 유리의 생환에 초점을 두어 몰아내려고 했다. 하지만 쉽지는 않았다.
그러던 차에 로잔헤이어 공작가에서 두 번째 편지가 도착했다. 초대장이었다.
정찬회를 연다는 초대장에 이안은 기가 막혔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다른 건 다 둘째 치더라도 유리가 생환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저택에서 먹고 마시는 만찬회를 연다는 게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았다.
‘아무리 공작가의 건재함을 보여 주려고 한다지만…….’
이렇게까지 무리할 필요가 있을까?
이안은 그가 알고 있던 정보를 떠올렸다.
분명 사교계에서는 로잔헤이어 공작 부인을 ‘보기 드문 호인’으로 평했다.
전 부인의 자식인 유리를 차별 없이 기르는 건 물론, 어떤 때는 친자식보다 더 사랑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게 과연 사랑하는 자식의 생환을 대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을까?
……이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제는 쓸데없는 의심까지 고개를 들고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이런 식의 의심은…… 공녀에게도 실례가 될 수 있어.’
어쨌든 두 가지는 확실했다.
다소 비상식적이라는 생각이 들어도, 그는 로잔헤이어가의 만찬에 참석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절대로…….
‘…….’
유리 엘로즈를 단순한 동업자로 보고 있지 않았다.
* * *
같은 시각, 팔그란츠가의 에스테반 저택.
그곳 주인의 집무실도 불이 꺼지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저, 각하.”
집사가 조심스럽게, 같은 서류를 30분째 들여다보고 있는 주인을 불렀다.
“……무슨 일이지?”
“외람된 말씀이옵니다만…… 로잔헤이어 공작가를 방문하지 않으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