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 * *
이번 일에 대해서는 자기가 계속 조사를 해 볼 테니 크게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엘리야는 돌아갔다.
나는 이 일에 대해서 아버지께 고하지는 않는 쪽으로 결정했다.
‘확실하지도 않은 일인데 잘못 말했다가는 내 행동반경만 좁아질 테니까…….’
바로 그때,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에나입니다, 공녀님.”
“아, 들어와도 돼.”
손님이 마시고 간 찻잔을 정리하려는 건가 싶었는데, 에나의 손에는 못 보던 작은 상자가 들려 있었다.
“그건 뭐야?”
“그게…… 공녀님께 도착한 위문품입니다.”
“위문품?”
“네, 저…… 로엔 대공 전하께서 보내셨다고 합니다.”
“엑.”
나도 모르게 개구리가 짓눌리는 것 같은 소리를 내고 말았다.
“로엔 대공이……?”
절로 그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 떠오르려 했지만,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어 요사스러운 붉은 눈동자의 잔상을 머릿속에서 몰아냈다.
긴장이 풀리지는 않았다.
‘대체 저 안에 뭐가 들어 있을까?’
……혹시 어제 잡은 마물의 독액이라든가, 그런 걸 또 선물한 건 아니겠지?
‘저 정도 사이즈면 수룡의 이빨이라든가…… 뭐 그런 끔찍한 게 들어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찜찜한 기분을 지우지 못하고, 나는 엉거주춤 상자를 받아 들었다.
이번에는 언밸런스할 정도로 화려한 분홍색도 아니고, 리본도 묶여 있지 않았다.
나는 일단 에나를 밖으로 내보냈다. 여기서 뭐가 튀어나올지 알 수 없어서였다.
붉은 벨벳 상자는 마치 평범한 보석 상자처럼 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방심해서는 안…… 응?’
여러 가지 끔찍한 상상이 무색하게도, 상자 안에는 굉장히 의외의 물건이 들어 있었다.
“반지……?”
심플한 은색 링에 푸른 보석이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얼른 상자를 살펴보았다. 다행히 메시지 카드 하나가 들어 있었다.
거기에는 단 한 줄의 메시지만이 적혀 있을 뿐이었다.
-공녀의 성공적인 취미 생활을 위해.
“……내 취미?”
반지를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이제 보니 그냥 반지가 아니라 은은하게 마력의 흐름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것도 내가 익숙하게 느껴 본 흐름이었다.
‘설마?’
나는 반지를 손가락에 끼고, 재빨리 거울을 바라보았다.
‘!’
역시나.
거울 속에는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여자가 서 있었다. 갈색 머리에 개암색 눈동자를 한 평범해 보이는 여자였다.
‘폴리모프 반지.’
예전 반지가 무용지물이 되었을 때, 대공이 나를 구해 준 일이 생각났다.
‘그걸 기억하고 보내다니, 섬세한 선물이기는 한데…….’
한두 푼도 아닌 걸 왜 덜컥 나한테 보낸 거지?
불가항력적으로, 반지를 낀 손목을 단단히 붙잡혔던 일이 내 안에서 되살아났다.
“…….”
떠올릴수록 당황스러운 일이기는 했다.
그때 마치 대공은 반쯤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보였다.
마치 무언가에 단단히 홀린 듯한…….
‘하지만…… 그가 날 구해 준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가만, 이거 사실 내가 선물을 받고 있을 게 아니라, 도리어 선물을 보내야 할 처지인 거 아닌가?
나는 끙 소리를 내며 머리를 싸쥐었다.
‘감사 인사…… 해야겠지.’
다행히 내겐 정신을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핑계가 있으니, 직접 움직이기보다는 감사의 편지와 선물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았다.
나는 아직도 누군가에게 잡혀 있는 것만 같은 손목을 움켜쥐고 품으로 끌어당겼다.
조금이라도 더 엮였다간 그대로 낚아채일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 자꾸만 들어서였다.
* * *
로잔헤이어 공작가, 공작 부인의 침실.
“…….”
벌써 두어 시간째, 방 안에는 죽음 같은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공작 부인, 레티샤는 가운 차림으로 테이블 앞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아무렇게나 던진 페이퍼 나이프, 급하게 찢은 편지 봉투와 편지 한 장이 질서 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녀 외에는 유일하게 신임하는 시녀인 므와쟁 남작 부인이 그림자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편지를 좀 보내야겠구나.”
잠깐 사이에 꺼칠해진 레티샤의 입술이 열렸다.
“다들……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거야. 불미스러운 사건은 있었지만…… 로잔헤이어 공작가가…… 내가 건재한다는 건 알려 줘야겠지.”
“초안을 작성하실 수 있도록 도구를 준비하겠습니다.”
므와쟁 남작 부인이 평소처럼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시 얼마간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레티샤가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분명히 절벽 아래로 추락했었지, 그 아이는.”
“…….”
레티샤는 다시 한번 어제의 광경을 그려 보았다.
아직도 눈앞에 생생할 정도로 떠올릴 수 있었다. 울부짖던 마물과 무너진 절벽, 그 아래로 추락하던 작은 배를 말이다.
그 순간의 엄청난 희열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때 레티샤는 거의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됐다! 성공했어!’
그 깎아지른 절벽에서 추락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머니, 누님이……!”
칼릭스가 너무 놀란 나머지 희게 질려 외쳤으나 레티샤는 개의치 않았다.
하필이면 로엔 대공이 사고에 휩쓸린 게 약간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어차피 황제는 로엔 대공의 존재를 마뜩잖게 여긴다.
형식상의 조의를 표하고 약간의 성의만 보인다면, 황실에서는 그 이상으로 보답해 줄 수도 있었다.
설사 황실이 이 문제를 크게 걸고넘어지더라도, 그 순간 레티샤가 느낀 환희를 꺾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드디어 그년의 딸이 죽었어!’
마물이 나타났을 때는 그녀 역시 사람인지라 겁에 질리긴 했지만, 그 마물이 이렇게 기특한 짓만 하고 죽어 버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완전히 핏빛이 되어 버린 호수, 엉망으로 젖어 떨고 있는 사람들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였다.
다행히 — 정말 기적적으로 — 유리와 대공 외에는 실종자도, 사망자도 없었다.
약간의 부상을 입은 사람들이야 있었지만, 그 정도는 별것 아니었다.
최근 들어 국경이 아닌 수도 근처에서도 균열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는 건 모두가 주지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이 일은 그저 불행한 사고일 뿐이었다.
운 좋게도 레티샤의 눈엣가시만을 쓸어 간, 불행한 사고.
“아아…… 유리, 유리가, 내 딸이.”
“어머니!”
레티샤는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여 적당한 타이밍에 실신하는 것처럼 아들의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졌다.
그녀의 아들이 추적대를 꾸리겠다는 둥, 도움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았지만, 레티샤의 기쁨을 망칠 수는 없었다.
‘어차피 추적대를 꾸려 봐야 시신만 되찾게 되겠지.’
그렇다고 해서 곧바로 추적대를 꾸리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좀 더 시간을 끌어, 확실히 유리가 죽어 버릴 수 있게끔 해야 했다.
레티샤는 소공작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려는 기특한 아들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아들은 당황하며 그녀를 설득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처절하게 눈물을 흘리며 당장이라도 실신할 듯 울부짖고 횡설수설하는 어머니. 칼릭스는 그를 유일한 구원인 것처럼 붙잡는 그녀를 차마 모질게 뿌리치지 못했다.
그렇게 레티샤가 혼신의 힘을 다해 시간을 끈 사이 현장의 혼란은 극에 달했고, 덕분에 로잔헤이어 공작가의 추적대는 아주 뒤늦게 출발하게 되었다.
모든 것이 레티샤의 계획대로였다.
유리의 생환을 예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까이서 그들의 추락을 지켜본 에스테반 후작의 망연자실한 얼굴만 봐도, 결말은 자명했다.
……아니, 자명하다고 생각했다.
집에 돌아온 레티샤는 소식을 막 듣고 뛰쳐나갈 채비를 하던 공작의 품 안으로 무너지듯이 쓰러졌다. 그녀는 딱딱하게 굳어 버린 나무토막 같은 공작의 품 안에서 눈물을 쏟았다.
“프레데릭, 아아, 프레데릭! 우리 딸이, 유리가……!”
그녀는 눈물에 젖은 눈으로 남편을 올려다보았다. 믿을 수 없는 소식을 접하고 희게 탈색된 얼굴이 보였다.
레티샤는 저열한 희열을 숨기기 위해 남편의 품에 일부러 얼굴을 묻었다. 남편이 그녀를 마주 안아 주는 일은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남들 눈에 딸아이를 잃어 비탄에 빠진 어미로 보이기만 하면 충분했다.
그때 안심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반전은 레티샤의 기쁨이 극에 달한 순간에 이루어졌으니까.
“공작 각하! 공작 각하-!”
얄밉기 그지없는 집사, 필립이 큰 소리로 외치는 소리.
“무슨 일인가!”
“유리 공녀님, 유리 공녀님께서…….”
시체를 찾았나?
레티샤는 눈물에 젖어 번들거리는 얼굴을 치켜들었다. 기쁜 소식을 듣기 위해서였지만…….
“유리 공녀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콰직.
레티샤는 손안에서 엉망으로 구겨진 종이를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반쯤 쓰다 만 편지였다. 잉크가 마르지 않은 종이를 움켜 버린 탓에 손이 검은색 잉크로 엉망이 되었다.
므와쟁 남작 부인이 다급히 다가와 레티샤의 손을 닦아 주었다. 하지만 레티샤의 혼은 어제의 기억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평생 잊을 수 없을 광경이었다. 죽은 줄 알았던 유리 엘로즈가 로엔 대공의 품에 안겨 돌아온 그 모습은……. 레티샤는 미친 대공이 시체를 안고 돌아온 것이기를 간절히 바랐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유리 엘로즈는 살아 있었다.
의사는 기적이라고 했다. 그 높이에서 떨어지고도 유리는 타박상만 입었을 뿐, 하다못해 어디 찢긴 곳조차 없었다.
“아, 아아…….”
그 순간.
우습게도 레티샤는 공포에 질렸었다.
와들와들 떨기 시작하는 레티샤를, 공작은 냉정하게 뿌리치고 제 딸에게 달려갔다. 내팽개쳐지다시피 한 레티셔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으나, 아무도 그녀에게 신경을 써 주지 않았다.
“공작 각하, 기적입니다, 기적!”
남편은 쓰러지다시피 한 그녀를 돌아보지도 않고, 제 딸을 건네받아 소중히 품에 안았다.
그리고 로엔 대공을 향해 연거푸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제가 살아 있는 한 전하께서 베풀어 주신 이 은혜를 잊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 목소리를 끝으로, 레티샤는 정신을 놓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