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화 (78/182)

70화

‘막연히 로잔헤이어에서 보낸 사람들에게 발견되었거니 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인가?

칼릭스의 사죄는 계속되었다.

“현장을 제대로 통솔하지 못한 제 책임입니다. 어머니께서 아무리 붙드신다 하더라도 보다 중요한 일을 우선했어야 했는데…….”

“아니, 뭐.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상황이 여의치 않았을 거란 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로잔헤이어 공작가의 주최로 다들 모였는데 마물이 나타났으니…… 상황을 통제하고 부상자나 실종자가 없는지 살피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큰일이었을 것 같은데.”

“추적대를 너무 늦게 꾸리는 바람에, 로잔헤이어의 공녀를 대공가의 마차를 타고 돌아오게 만들었습니다. 면목 없는 일이 맞습니다.”

“……으음…….”

그렇게까지 사과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칼릭스는 끝내 고개를 숙였다.

“소공작으로서도, 남동생으로서도 역할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칼릭스의 표정은, 이미 자책과 스스로를 향한 실망으로 가득했다.

‘내가 말 한마디라도 잘못 얹으면 저대로 딱 죽어 버릴 것 같은데…….’

음……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그래, 상황하고 네 마음은 알겠어. 사과…… 잘 받도록 할게.”

“……감사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막무가내로 죄송할 것 없다며 사과를 거절하면, 칼릭스는 더 큰 좌절감에 빠질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무슨 말이야?”

“무엇 말씀이십니까?”

“그…… 내가 대공 전하의 마차를 타고 돌아왔다는 말…….”

“말씀드렸다시피 상황을 수습하는 데 바빴던 저희와 달리, 대공가에서는 추적대를 꾸리는 게 빨랐습니다.”

“…….”

“숲으로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대공 전하와 누님을 발견했고, 그대로 공작저로 와 누님을…….”

“…….”

칼릭스가 어딘지 심기가 불편한 표정을 짓더니 손을 내저었다.

“아무튼, 그렇게 돌려보내 주셨다고 합니다.”

……얼버무릴 만큼 뭔가 이상한 광경을 연출한 걸까?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아무래도 캐묻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모르고 넘어가는 게 정신 건강에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래, 아무튼…… 설명해 줘서 고마워. 그리고 너무 죄책감을 가지지는 말았으면 좋겠어.”

“…….”

“어쨌든 나는 무사히 돌아왔으니까…….”

“……저, 공녀님.”

그때, 에나가 나를 불렀다.

“응?”

“마탑주님께서 공녀님을 찾아오셨습니다.”

“어?”

하필이면 지금?

‘수업을 하기로 약속한 날도 아닌데 웬일이지?’

의아하긴 했지만, 방문 요청을 거절할 정도로 아픈 것도 아니었다.

대충 이야기가 끝난 칼릭스를 물리고, 엘리야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잠깐, 마탑주님! 그렇게 들어가시면 안 됩……!”

소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벌컥, 응접실의 문이 열렸다.

“엘리야 경?”

다급하게 문을 연 사람, 엘리야 마라케시가 숨을 몰아쉬며 잠깐 나를 바라보았다.

“앗.”

그러더니 바로 다음 순간, 긴 다리를 훌쩍 이용해서 내 앞으로 다가왔다.

“무슨……!”

당황하고 발끈한 칼릭스가 그를 막는 것보다, 그의 손에서 하얀 빛이 터져 나오는 게 더 빨랐다.

환한 빛이 순식간에 전신을 감쌌다가 사그라들었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눈만 깜빡였다.

미간을 찌푸린 진중한 얼굴로, 엘리야가 물었다.

“……좀 괜찮습니까?”

“네?”

“몸이 좀 괜찮아졌을 거 아닙니까. 이걸론 모자랍니까?”

몸이 좀 어떠냐고? 나는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그, 그러고 보니 나른하던 느낌이 좀 사라진 것 같기도 하고…….”

“하아.”

내 말에 엘리야가 안도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괜찮으세요?”

“그게 지금 나한테 물을 말입니까?”

엘리야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얼굴을 팍 찌푸리고 대답했다. 그에 내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칼릭스가 “잠깐.” 하고 끼어들었다.

“제 누이에게 너무 말씀을 함부로 하시는 것 같군요, 마라케시 경.”

“하? 이게 무슨 헛소리?”

“자, 자자자, 잠깐만!”

나는 황급히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공략 대상들 중에 가장 날이 서 있는 두 사람이다. 여태까지 제대로 부딪친 적이 없는 사람들이니만큼 어떤 식으로 얼마나 시너지가 폭발할지 모른다.

다급히 끼어든 나는 일단 칼릭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칼릭스, 용건은 다 끝난 거지?”

“누님!”

“엘리야 경은 날 찾아오신 손님이자 내 스승님이셔.”

“…….”

칼릭스가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로 침묵했다. 어마어마하게 불만이 많은 듯했지만, 차마 토해 낼 수 없어서 참는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서.”

“…….”

칼릭스는 이를 악문 채 잠시 침묵하다가, “알겠습니다. 돌아가 보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긴 채 뒤돌아섰다. 감정을 엄청나게 절제한 태도였다.

“…….”

쪼끔 미안하긴 하지만 뭐, 어쩔 수 없지.

“흥.”

엘리야는 코웃음을 쳤다. 마치 자신이 이겼다는 투였다.

“경.”

가볍게 나무랐지만 엘리야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투로 나를 다시 면밀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이 사람이 설마? 나는 약간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경, 설마 경께서 직접 회복 마법을 걸어 놓고 제 상태를 의심하시는 건 아니죠?”

“……입이 살아 있는 걸 보니 멀쩡하긴 한 모양이로군요.”

엘리야가 복잡한 기색으로 깊은 한숨을 쉬며, 칼릭스가 앉았던 내 맞은편에 앉았다.

“그나저나 어쩐 일이세요? 이렇게 곧바로 찾아오실 줄은 몰랐는데.”

“곧바로 찾아올 줄 몰랐다니?”

엘리야가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내가 제자가 절벽에서 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도 생사 한 번 확인하지 않을 사람이라고 생각한 겁니까?”

……글쎄, 지금이라면 몰라도 얼마 전까지는 충분히 그럴 수도 있는 사람이었지 않나?

‘태세 전환이 빠르다니까…….’

라고 생각했지만,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나는 대충 ‘내가 잘못 생각한 것 같다’고 맞장구를 쳤다. 그러자 엘리야가 새침한 얼굴로 흥 소리를 냈다.

“아무튼, 그건 그거고.”

“?”

무사 안위를 확인하는 것 외에 다른 용건이라도 있는 걸까?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엘리야가 어쩐지 불편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경? 도대체 왜 저를 그렇게……?”

“……솔레아 호수에 다녀왔습니다.”

“네?”

솔레아 호수라면, 어제 사고가 났던 거기 말인가?

“거길 다녀오셨어요?”

“어지간한 균열로는 수룡이 이 땅에 현신할 수 없습니다. 수룡이 현신할 정도의 균열이라면, 당연히 조사가 필요합니다.”

“아.”

그런 거였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균열에 대해서 연구를 하고 계셨죠. 좋은 사례가 되었겠네요.”

“…….”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그렇다고 대답할 줄 알았는데, 엘리야는 의외로 대답이 없었다.

“?”

침묵이 길어진다. 의문을 담은 눈으로 바라보자, 엘리야가 왠지 착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그 정도로 연구에 미친 놈 같습니까?”

“어…… 솔직히 말씀드릴까요?”

“……됐습니다. 그걸로 이미 대답이 되었습니다.”

엘리야는 약간 삐죽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뭐지?’

나 뭐라도 잘못했나?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갑자기 엘리야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 쪽으로 다가와서…….

“으왓.”

눈을 가려 버리는 게 아닌가?

“왜 그러세요?”

워낙 합리적인 근거에 의거해 움직이는 사람이라, 저항 대신 이유를 물었더니 정수리 위로 깊은 한숨이 쏟아졌다.

“그렇게 쳐다보지 마세요.”

“제가요? 뭘 어쨌는데……?”

“아무튼.”

엘리야가 내 눈을 덮었던 손을 슬쩍 치우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슬며시 손을 뻗어 흐트러진 내 앞머리를 정리해 주는 게 아닌가?

‘왜, 왠지 간질간질한데.’

“……호수 근처의 마류가 대단히 불안정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 정도 마물이 나타나서 패악을 부리고 갔으니 거기가 쑥대밭이 안 될 수는 없겠네요.”

“그게 아니라…….”

엘리야의 장미꽃 같은 눈동자가 약간 어둡게 가라앉았다.

“누군가 억지로 균열을 비틀어 연 것처럼, 그 지역 자체가 엉망이 되어 있었습니다.”

“……!”

누군가 억지로 균열을 열었다고?

“설마요…… 그런 일이 가능한가요?”

“강력한 힘을 가진 마물들은 본래 자기들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입구를 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마물들의 세계 쪽에서 우리 세계로 건너오기 위해 균열을 낼 수 있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엘리야는 마물들이 이 세계로 건너오는 건 자연적으로 벌어진 균열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그 세계에서 이쪽 세계로 통하는 균열, 즉 역방향으로 균열을 열 수 있는 건, 200년 전 봉인된 용제 정도일 겁니다.”

“……한데 이번 균열이 그렇게 역방향으로 열렸다는 건가요?”

“현장에 남은 흔적으로 추측하건대,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을 뿐입니다.”

엘리야가 내 이마를 타고 난 잔머리를 스르륵 매만지며 말했다.

“아직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정말 누군가가 이쪽에서 균열을 연 거라면?”

“굉장한 악의를 품고 저지른 일이겠죠.”

“…….”

악의라는 말에 나는 저절로 새어머니와 엘레니를 떠올렸다가 고개를 저었다.

‘나를 끔찍하게 싫어한다고 해도, 그 두 사람은 평범한 인간이야.’

원작 게임에서 새어머니는 나를 겨냥해 거듭 함정을 꾸몄지만, 이 정도로 스케일이 큰 일은 해낸 적이 없다.

‘그럴 마음이야 있을지 몰라도, 능력이 안 돼.’

“……엘리야 경, 혹시 이 사실에 대해 누군가에게……”

“당연히 당신에게 처음 말하는 겁니다.”

엘리야가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내 제자가 연루된 일에 입을 가볍게 놀릴 수는 없죠.”

“…….”

그건 참…….

“감사한 일이네요.”

“감사할 필요는 없습니다. 당연한 일이니까.”

엘리야는 정말 아무렇지 않게 그렇게 단언했지만, 그럴수록 나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솔직히 좀…….’

감동받았다, 고 말해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솔직하게 내 입으로 감동받았다고 말하기는 어색해서, 입술을 꼭 깨문 채 고개를 살짝 숙이고 말았다.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엘리야가 그런 내 태도를 오해하고 서둘러 말하기 시작했다.

“아직 그렇게 확정이 난 것도 아니고, 만약 누군가가 당신을 노리고 악의적으로 벌인 일이라면 제가 끝까지 그 누군가를 추적해 죽여 버릴……”

“네에?”

뭘 죽여?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엘리야가 아차 하고 헛기침을 했다.

“……큼, 말이 헛나왔군요.”

“아닌 것 같은데요!”

“죽여 버린다는 게 아니라, 그냥 생명 활동이 자연적으로 불가능한 상태라고 할까…… 뭐, 그렇게 될 뿐입니다.”

“아무리 돌려 말해 봤자 죽인다는 뜻으로밖에 안 들리는데요!”

“크흠.”

헛기침으로 시치미를 뚝 떼려는 엘리야를 보며, 나는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뭐. 나도 사람인지라, 날 위해 손에 피를 묻히는 것도 불사하겠다는 그의 말이 감동적이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 솔직히 말하는 건 부끄러우니까.’

“스승님의 해결 방식을 닮으면 큰일 나겠네요.”

“큰일까지야 나겠습니까?”

엘리야가 태평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당신의 뒤에는 치외 법권인 마탑의 주인이 있습니다.”

그가 내 이마를 가볍게 톡, 튕겼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사람이라면, 죽여 버려요.”

“…….”

엘리야의 속삭임은 나긋하고 나른했다.

“뒷일은 내 초법적인 권한을 사용해서라도, 어떻게든 해 볼 테니까요.”

“그거…… 스승님이 제자한테 권해도 되는 거예요?”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지는 말라는 뜻이에요.”

엘리야가 웃었다. 처음에는 비웃음 정도가 고작이었는데, 어느새 꽤 진심이 깃들어 있는 자연스러운 미소로 변해 있었다.

“내 제자가 맞고 다니면 내가 어떻게 돌아 버릴지 나도 모르겠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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