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화 (77/182)

69화

12. 구혼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헉!”

나는 한 번에 숨을 삼키며 번쩍, 잠에서 깨어났다.

황급히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니, 사주식 침대의 캐노피에서 늘어진 반투명한 흰 천이 살랑거리고 있었다.

익숙한 침실이었다. 이리저리 몸을 살펴보니, 잠옷을 입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머리가 잠깐 뒤엉키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뱃놀이에서 마물이 등장했고…….’

마물이 죽었고, 절벽에서 떨어져서…….

천천히 기억을 되짚다 보니 대공의 벗은 상반신이 인으로 새긴 듯 선명하게 떠올랐다.

‘아, 안 돼. 정신 차려!’

그리고 뭘 어쨌더라? 정화를 했다가…….

‘……대공의 상태가 이상해졌지.’

거기까지 기억을 떠올려 버린 나는 붉어진 얼굴을 싸쥐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이거 말고, 그다음! 그다음엔 대체 어떻게 된 건데!’

하필 그 시점에 기억을 잃어 그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지금은 몸에 아무 이상도 없이, 보송보송하고 깨끗해진 채로 내 방 침대 위에 누워 있지만…….

마지막 기억과 지금의 간극이 너무 큰 탓인지, 불안함은 가실 줄을 몰랐다.

“…….”

손바닥을 바라보자, 생생히 떠올랐다.

손목을 쥔 아귀가 커다란 손, 손바닥에 고이던 뜨거운 한숨, 머리를 기대며 빛내던 붉은 눈동자…….

‘굳이 말하자면…… 요염하다고 해야 하나……?’

꿀꺽.

저도 모르게 침이 넘어감과 동시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 아냐. 정신 차려. 요염하다니! 미인계에 홀려선 안 돼!’

그 사람은 최종 보스다! 그리고 나는 자칫 잘못하면 거기 휘말려 죽을 운명이고!

“……공녀님?”

“아, 어?”

“세상에, 공녀님. 깨어나셨군요!”

“아…….”

아마 내 간호를 하다 잠들었는지, 안락의자에 기대어 있던 시녀가 퍼뜩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좀 괜찮으세요? 물을 가져다드릴까요?”

“어어…… 응.”

“조금만 기다리세요.”

나는 숄을 걸친 시녀의 재빠른 움직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저이가 내 시녀들을 지휘하는 역할이었지…….’

다음 순간, 내 손엔 거짓말처럼 미지근한 물이 담긴 잔이 들려 있었다.

“……고마워, 에나.”

“별말씀을요.”

에나가 걱정스러운 눈빛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싱긋 웃었다.

“잠깐 여기 계세요. 의사 선생님을 부르도록 할게요.”

“그럴 필요는……”

“공작 각하께서 공녀님이 깨어나시면 반드시 소식을 전하고, 의사를 부르라고 지시하셨어요.”

“…….”

그런가.

‘아버지가 그렇게 명했다면 별수 없겠는걸…….’

나는 일단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잠시 후.

“유리!”

침실의 문이 벌컥 열리고, 아버지가 등장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정신을 차리신 겁니까!”

……칼릭스도 함께였다.

‘얘도 안 잤어……?’

조금 놀라 멀뚱히 그들을 쳐다보고만 있자, 아버지와 칼릭스가 성큼성큼 내 쪽으로 다가왔다.

“아직 상태가 안 좋은 모양이군.”

“……네?”

“대체 의사는 뭘 하고 있는 건가!”

“지금 올라오는 중입니다, 공작 각하.”

“……나와 아버지보다 느리다니.”

집사가 차분하게 대답했지만, 칼릭스는 노염이 서린 목소리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유리야, 괜찮으냐?”

아버지가 물었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무렇지도 않아요.”

사실 아무렇지도 않다기엔 전신에 타박상을 입은 듯 우릿한 통증이 올라오고 있었지만, 그걸 그대로 말했다가는 큰일이 날 것 같아 가만히 있었다.

“각하, 의사가 도착했습니다!”

“이리로 오라 해라!”

안경조차 제대로 걸치지 못한 의사가 허둥지둥 이쪽으로 다가왔다.

“공녀님, 괜찮으십니까?”

“전반적으로는 괜찮아요. 그러니까 절벽에서 떨어진 것치고는…….”

“잠시 체온을 좀 재겠습니다. 보자…… 열이 좀 있으시군요.”

그런가? 내가 어리둥절해서 스스로 이마를 짚어 보자, 칼릭스가 기가 막힌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명했다.

“자기가 아픈 것도 제대로 모르는 분이시니, 치료를 제대로 하도록 해라.”

“분부 받잡겠습니다. 공녀님, 일단 회복 포션을 조금 더 드시는 게 좋겠습니다.”

나는 얌전히 그가 건네주는 약병을 받아 내용물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으큼.”

내가 인상을 쓰자, 에나가 재빨리 컵에 물을 더 따라 내밀었다.

“고마워.”

그 상태로 의사가 나를 조금 더 진찰하더니, 마침내 허리를 펴고 말했다.

“천만다행으로 외상도 없으셨고, 의식도 또렷하게 돌아오셨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런가?”

“예. 전신에 가볍게 타박상을 입기는 하셨지만…… 이 정도는 그 절벽에서 떨어진 것치고 심각한 부상은 아닙니다.”

아마 대공이 나를 안고 떨어지면서 뭔가 묘수를 부린 모양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포션을 처방해 드렸으니 하루 이틀만 정양하시면 깨끗이 나으실 겁니다.”

“음.”

괜찮다는 진단이 떨어졌음에도 아버지와 칼릭스의 미간은 풀어질 줄을 몰랐다.

칼릭스가 날을 세우며 물었다.

“정말로 하루 이틀이면 되는 건가? 그 험한 일을 당하시고 높은 곳에서 떨어지기까지 하셨는데…….”

“그야 천운이라고 해야지 않겠습니까……?”

의사의 대답에 칼릭스가 더욱 마뜩잖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눈치를 보다 덧붙였다.

“나 정말 괜찮은데…….”

“후우.”

아버지께서 한숨을 내쉬더니, 의사에게 말했다.

“그만 돌아가서 쉬게.”

“예, 각하.”

군말 없이 의사가 돌아가자, 칼릭스의 화살은 곧장 나에게로 돌아왔다.

“하여간에 누님은……!”

“내가 뭘……?”

나는 눈을 끔뻑이며 되물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오늘 뭘 잘못했는지 생각나는 게 없어서였다.

마물이 하필이면 호수에서 나타난 것도, 거기 휩쓸린 것도 다 내가 의도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난 정말 결백하고 억울하다. 그런 눈빛을 보내자 칼릭스가 “윽…….” 하고 시선을 피했다.

할 말이 없는 모양이다.

‘내가 이겼다.’

소소하게 승리감을 만끽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일단 오늘은 이만 쉬는 게 좋겠구나. 시간도 늦었고…….”

“네, 아버지.”

내가 잽싸게 대답하자, 아버지가 심란한 얼굴로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

나를 고이 눕히고, 손수 이불을 끌어다가 덮어 주었다.

그러더니 어설픈 손놀림으로 이불 위를 두어 번 도닥이셨다.

“……자거라.”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라는 뒷말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네.”

얌전히 대답하자,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곤 칼릭스를 데리고 나가려 하셨다.

끝까지 내 쪽을 바라보는 칼릭스를 향해, 나는 이불 밖으로 손을 빼꼼 내밀어 흔들어 주었다.

빨리 좀 가라는 뜻이었는데, 뜻밖에 칼릭스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저도 뭔가를 하려는 듯 손을 버벅거렸다.

“뭐 하느냐?”

“아, 아닙니다.”

결국 칼릭스는 움찔거리던 손을 포기하고 아버지를 따라 방 밖으로 나섰다.

“…….”

나는 그 모습이 어쩐지 좀 귀엽다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 * *

다음 날.

나는 약간 찌뿌드드한 상태로 잠에서 깨어났다.

‘으음, 역시 컨디션이 평소 같지는 않군.’

포션을 먹어서 부상은 회복했지만 뭐랄까, 부상을 입었던 충격이 아직 몸 안에 쌓여 있는 느낌이었다.

‘당분간 몸을 좀 사리기는 해야겠네…….’

그나저나 우리 새어머니께서는 어쩌고 계시려나?

다회에 이어 뱃놀이도 엉망진창으로 망쳤으니, 로잔헤이어 공작 부인의 사교 모임엔 저주가 붙었다는 소문이 돌아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었다.

‘몸져눕지 않으셨을까?’

그 모습이 좀 궁금하긴 했지만 뭐, 굳이 찾아가서 보려고 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럼, 오늘은 뭘 하나……?’

몸을 좀 사려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가만히 침대에 누워 있으려니 좀이 쑤시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괜히 날씨도 맑은 것 같고…… 나가고 싶은 것 같기도 한 게…….

“뭘 하고 계십니까?”

“……!”

화들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칼릭스가 열린 내 방문에 삐딱하게 기대어 있었다.

뒤에서 에나가 “소공작님, 그렇게 함부로 침실 문을 여시면 안 됩니다!”라고 외쳤지만, 칼릭스의 귀에는 닿지 않는 것 같았다.

“설마 오늘도 활기차게 하루를 시작해야겠다, 뭐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신 건 아니겠죠?”

“설마 그럴 리가 있겠니.”

얘가 참 눈치가 좋구나.

“……의심스럽군요.”

“사람을 믿는 마음을 좀 더 길러 보렴.”

칼릭스는 한숨만 내쉴 따름이었다.

“……몸은 좀 어떻습니까?”

“보다시피……?”

“아주 안 좋다는 뜻이시로군요.”

“괜찮다는 뜻이었는데…….”

아무리 봐도 칼릭스는 ‘오늘 하루는 침대에서 나오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을 몸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말이야. 난 반골 기질이 조금 있어서 상대편에서 저렇게 나오면 꼭 모나게 굴고 싶어진단 말이지.

“와 줘서 고마워. 안 그래도 이만 일어나려고 하던 참이란다.”

“일어나신다고요?”

“하루 종일 침대에서 누워 지낼 수는 없잖아? 의사가 절대 안정을 명령한 것도 아니고 말이야.”

나는 일부러 이불을 걷으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잠옷 차림이라 민망한데, 자리를 좀 비켜 주지 않을래?”

“윽…….”

칼릭스가 얼굴을 슬쩍 붉히며 “실례했습니다.” 하고 방문을 닫았다.

“에나.”

“네, 공녀님.”

에나가 재빠르게 간편한 드레스로 갈아입는 일을 도와주었다.

밖으로 나가 보니 칼릭스가 뻣뻣한 자세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어쩐 일이야?”

“……상태를 잠깐 보러 왔을 뿐입니다.”

“보시다시피 아주 건강해.”

“…….”

내 말에 칼릭스가 복잡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죄송합니다.”

뜬금없이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응? 왜?”

“어제…….”

칼릭스는 입술을 깨물며, 아주 중대한 실책을 고백하는 사람처럼 말했다.

“추적대를 보내는 게 좀 늦어졌습니다.”

“?”

“어머니께서 심력을 소모하셔서 제가 꼭 필요한 상황이었고…… 현장이 어수선하여 추적대를 꾸리는 게 늦어져서…….”

“그랬니?”

그러고 보니 나는 내가 돌아온 정황에 대해 기억하는 바가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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