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화 (76/182)

68화

경고! ‘비틀린 마류’를 감지합니다.

정화력을 사용하시겠습니까? Yes or No.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는 일단 무시하고, 나는 대공을 바위벽 쪽으로 이끌었다.

“이쪽에 앉으세요.”

“음…….”

대공은 순순히 내가 이끄는 대로 바위벽에 기대앉았다. 상태가 정말로 심각한 듯했다.

‘이 사람이 이렇게 맥없이 순순할 사람이 아닌데.’

그 생각을 하자 겁이 덜컥 났다.

‘이러다 혹시 죽는 건 아니겠지?’

“전하, 전하? 눈을 좀 떠 보세요.”

“잠시만, 공녀…….”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감았다. 붉은 기운은 이제 대공의 얼굴까지 침범해 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 새액새액 숨을 내쉬는 그를 두려운 마음으로 잠시 지켜보았다. 퍼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의식을 완전히 잃게 내버려 둬선 안 돼.’

“전하, 전하? 정신 좀 차려 보세요. 전하?”

나중에 무례하다고 책잡힐 것을 감수하고 뺨도 톡톡 쳐 봤지만, 이미 반응이 없었다.

‘어, 어떡하지?’

당황하던 내 눈에 아직 사라지지 않은 시스템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정화력을 사용하시겠습니까? Yes or No.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꽃밭을 정화했을 때 마물의 피가 사라졌을 뿐 아니라 죽었던 꽃들도 되살아나지 않았던가?

나는 대공의 주변으로 검고 뭉글뭉글하게 퍼지는 기운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왜 이 사람이 비틀린 마류를 두르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닿을 때마다 정화 선택지가 뜨는 이유도 모르겠다.

게다가 전에 한 번 정화에 실패한 적도 있었다. 지금도 성공할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도.’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이 이렇게 상태가 안 좋은데, 시도는 한번 해 봐야 하지 않을까?

내 신성력에 관심을 꽤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 사용하기가 꺼림칙하긴 했지만…….

‘몰래 시도하고 정신 차렸을 땐 모른 척하면 되겠지.’

나는 어렵사리 ‘yes’를 선택했다.

정화력을 사용합니다.

현재 정화력 총량: 327

327만큼 정화를 시도합니다…….

그와 동시에 내 몸에서 금빛 색채가 섞인 하얀 기운이 피어올랐다.

그 기운이 멍하니 서 있는 대공의 몸을 뒤덮기 시작했다.

물론, 대공의 몸 전체를 감싸고 있는 시커먼 기운을 몰아내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였지만, 이번에는 기운이 전처럼 빠르게 사그러들지 않고 검은 기운을 아주 조금씩 삼켰다.

그리고 잠시 후.

327만큼 정화에 성공합니다!

‘……성공했다!’

대공의 피부는 언제 붉은 기가 있었냐는 듯 깨끗해져 있었다.

‘이제 정신을 차리기만을 기다리면…….’

될 것 같다, 고 생각한 바로 그 순간.

“!”

덥석, 손목이 붙잡혔다.

커다란 손이 마치 두꺼운 수갑처럼 손목을 쥐고 있었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 보니, 대공이 언제 눈을 감았냐는 듯 번히 눈을 뜨고 있었다.

붉은 눈동자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어딘가 뒤집힌 것처럼 사람을 오싹하게 만드는 눈빛이었다.

그가 말했다.

“……찾았다.”

“예?”

형언할 수 없는 감각. 소름이 끼쳤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

대공은 대답하는 대신 쥐고 있던 내 손목에 고개를 숙여 코를 박았다.

스으으읍, 숨을 한껏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하아…….”

그르렁, 하고 끓어오르는 소리가 섞인 한숨이 손바닥으로 쏟아졌다. 뜨겁고 습한 느낌에 나도 모르게 움칠 몸이 떨렸다.

“…….”

그 상태에서 그가 천천히 눈을 들었다. 어딘지 몽롱하고, 여전히 알 수 없는 빛으로 번들거리는 붉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친 채로, 그가 내 손바닥에 대고 마치 어린 양하는 짐승처럼 고개를 기울여 뺨을 묻었다.

“저기, 전하……? 으읏!”

그가 사르르 눈을 내리깐다 싶더니, 내 손바닥의 오목한 곳을 혀로 스윽 핥았다.

“뭐, 뭐 하시는 거예요!”

한계였다. 나는 에비, 지지! 하듯 버럭 외치면서 잡힌 손을 홱 빼 버렸다.

“……안 돼…….”

“으, 으앗!”

그와 동시에 대공이 무릎을 일으켜 나와 거리를 확 좁혔다. 나는 반사적으로 피하려다가 뒤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몸이 완전히 뒤로 넘어가기 전에 잽싸게 땅을 짚었다. 대공이 마치 느긋하게 먹이를 덮치는 짐승처럼 그런 내 몸을 타고 오르듯이 거리를 좁혔다.

여전히 몽롱하게 취한 듯한 눈빛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아. 이 사람 지금 제정신이 아니구나!’

“저, 전하, 제발 이쯤에서 정신을 차리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으왓, 안 돼요!”

“피하지 마…….”

그의 얼굴이 목 근처로 바짝 붙었다. 귓불 아래 오목한 목선에 그의 코가 와 닿는 게 느껴졌다.

킁킁거리는 게 느껴졌지만, 더 이상 몸을 젖히면 완전히 뒤로 드러눕게 되는 꼴이라 그럴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엉덩이를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나려 시도하는데…….

“안 돼.”

“흐익!”

대공이 남은 한 팔로 내 허리를 꽉 끌어당겨 안았다.

‘미쳤어, 진짜……!’

몸을 비틀어 봤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팔이 어찌나 굵고 힘이 센지 마치 어지간한 사람이 다리로 몸을 억죄는 것 같았다.

옴짝달싹 못 하게 된 나를 빤히 내려다보는 대공의 입가에 스르륵 미소가 번졌다.

‘아.’

이 사람이 웃는 건 대강 다 봤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미소를 보고 깨달았다.

지금까지 그가 웃었던 건 그저 근사한 포장지일 뿐이었다는 걸.

‘진심일 땐…… 이렇게 웃는구나…….’

어?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왠지 시야가 흐려지고 있는 것 같았다.

‘기분 탓이…… 아닌 것 같은데…….’

눈을 부릅뜨려고 노력해 봤자 소용없었다. 마치 물속에서 녹아내리는 것처럼, 속절없이 몸에서 힘이 빠지고 있었다.

‘지금 정신을 잃으면 안 돼……!’

까마득해지는 의식 속에서 눈을 감으며, 그게 내가 마지막으로 한 생각이었다.

* * *

부스럭.

“…….”

카미엘은 저 멀리서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바위벽에 등을 기대고 앉은 상태였다. 하지만 혼자는 아니었다.

“…….”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유리가 그의 쇄골과 가슴팍 사이 어디쯤에 머리를 묻고 있었다.

카미엘은 웅크려 앉은 유리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빈틈없이 그 몸을 끌어안고 있었다. 마치 요만큼이라도 땅에 닿을세라 노심초사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

들이쉬고, 내쉬고.

두 사람의 호흡만이 존재하는 이곳, 인기척이 충분히 가까워지지 않은 이곳은 아직 평화로웠다.

명료하게 빛이 돌아온 눈빛으로, 카미엘은 고개를 숙여 유리의 정수리 근처에 코를 묻었다. 어린애처럼 따끈따끈한 체온과 함께 희미하게 유혹적인 향기가 퍼지고 있었다.

작은 새 같은 온기를 독점한 채 맘껏 누리고 있기를 얼마나 했을까?

부스럭, 누군가가 수풀을 헤치고 등장했다.

“……전하!”

그의 수하였다.

“쉿.”

카미엘이 남은 한 손의 검지로 입술을 가로막고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수하는 입을 떡 벌린 채 카미엘이 하고 있는 양을 보며 더듬더듬 중얼거렸다.

“대체 이게 무슨 꼴이십니까……?”

카미엘은 충성스러운 수하의 말을 완전히 무시하고, 유리를 번쩍 안아 올렸다.

“잠깐, 잠깐만요, 전하!”

수하가 급급하게 널브러진 그의 재킷을 집어, 맨살을 훌러덩 내놓고 있는 그의 상체에 걸쳐 주었다.

안아 올리면서 자세가 바뀐 탓일까, 그의 수하가 시끄러웠던 탓일까? 깊이 잠들어 새근새근하고 있던 유리가 작게 끙 소리를 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다, 다시 보니 눈가에 햇살이 닿아 있었다.

카미엘은 얼른 어깨를 추어올려 자세를 약간 고쳤다. 그러자 유리가 그의 품에 더 깊이 파묻혔다. 동시에 미간에 드리웠던 햇살도 완전히 가려졌다.

“…….”

찌푸렸던 미간이 다시 스르륵, 풀렸다. 카미엘의 입가에도 희미하게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전하……?”

수하가 대체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그런 카미엘을 바라보았다. 눈빛에 약간 경악이 섞여 있기도 했다.

하지만 카미엘은 그런 사소한 것에 연연하는 성정이 아니었다.

“가지.”

“아, 아아. 길을 안내하겠습니다.”

“필요 없어.”

“예에?”

길안내가 필요 없다니? 수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카미엘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의 대공 전하께서는 정말로 정확한 방향으로 발을 내딛고 있었다.

“전하, 설마 알고 계셨……?”

“대충.”

“아니, 그러면 왜 가만히 계셨던 겁니까……?”

라고 묻다가, 수하는 제가 본 광경 — 무려 로엔 대공 전하께서 여자를 품에 보듬고 있던 모습 — 을 떠올렸다.

‘설마.’

품속의 저분을 깨우기 싫어서?

저 성질머리에?

수하가 뒤에서 입을 떡 벌리거나 말거나, 카미엘은 길도 없는 숲속을 요령껏 헤치며 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걸음을 척척 옮겼다.

“마차를 가지고 왔나?”

“예, 예. 그렇습니다.”

“공녀를 찾는 사람들은?”

“그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는데 그쪽은 출발이 늦어졌습니다.”

“이유는?”

“저도 자세히 듣진 못했는데, 공작 부인이 너무 놀란 나머지 기진맥진해서 추적대를 꾸리는 게 늦어졌다고 하더군요.”

“……흠.”

수하는 정말로 안내 없이도 잘만 걸음을 옮기는 주군을 경악과 찬탄이 뒤섞인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정말 이럴 때 보면 같은 인간이 맞는가 싶다니까.’

어쨌든 덕분에 그들은 금방 마차를 세워 둔 곳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대공 전하!”

“쉿.”

다가오려던 사람들이 대공의 팔에 안긴 짐 덩이가 무엇인지 깨닫고 경악했다. 수하는 뒤에서 다 이해한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미엘은 말했다.

“문.”

“아, 아. 예!”

기사가 허둥지둥하며 새카만 마차의 문을 열었다. 카미엘은 두 팔에 유리를 안은 상태로도 재주 좋게 마차에 올랐다.

“…….”

몸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는지 유리가 다시금 미간을 찌푸렸다. 카미엘이 쉬이, 하며 다시 그녀를 안정적으로 추어올렸다.

“전하, 로잔헤이어 공작가로 먼저 가시겠습니까……?”

수하가 침을 꿀꺽 삼키며 묻자, 카미엘이 화사하게 웃으며 되물었다.

“집으로 갈까?”

“전하!”

“농담이다. 로잔헤이어 공작가로 가야지. 나도 그 정도의 상식은 있어.”

상식 운운하기에는 지나치게 파격적인 꼴이었지만 거기까지 저격하기에는 심력이 모자랐다.

‘무슨 이유에서 저러고 계시는지 별로 알고 싶지 않달까…….’

어쨌든 한 가지는 분명했다. 수하는 돌아서며 남몰래 혀를 쯧쯧 찼다.

‘어쩌다 우리 대공 전하에게 걸리셔서…… 아직 앞날 창창한 양가의 아가씨인데…….’

안타까웠지만, 이미 때는 늦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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