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 * *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혼곤한 정신 속에서 온몸을 두드려 맞은 것 같은 통증에 나는 가늘게 신음했다.
“……정신을 차렸나?”
“으…….”
지끈지끈한 눈꺼풀에 힘을 주었다가, 눈을 뜨자…….
“……대공 전하?”
“정신도 차렸고, 상태도 멀쩡한 모양이군. 운이 좋았어, 공녀.”
연기 냄새에 가늘게 눈을 뜨고 바라보니, 그가 나뭇가지를 꺾어 불 속에 던져 넣고 있었다.
“내 말 듣고 있나, 공녀?”
“듣고 있어요…….”
나는 멍하니 대답하며 몸을 일으켰다. 내 위에서 스르륵 미끄러진 대공의 재킷이 툭 떨어졌다.
“일어났으니 다행이군. 이쪽으로 더 가까이 와서 불을 쬐도록 해.”
“네…….”
나는 무심결에 이쪽으로 내민 대공의 손을 붙잡았다. 그와 동시에…….
경고! ‘비틀린 마류’를 감지합니다.
정화력을 사용하시겠습니까? Yes or No.
‘정말…… 시도 때도 없다…….’
나는 기력 없이 ‘No’를 선택했다.
정화력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
한숨을 돌리며 고개를 드는데, 이쪽을 바라보는 대공의 시선이 묘했다.
“……전하?”
“아니…….”
그가 느른하게 입술을 핥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공녀.”
“……?”
어쩐지 등허리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나는 화제를 전환하기 위해 급하게 말을 꺼냈다.
“여, 여긴 어딘가요?”
“글쎄.”
대공이 어깨를 으쓱하며 나뭇가지 한 다발을 맨손으로 와작 꺾었다.
“물살에 휩쓸려 오긴 했는데…… 아주 멀리 오진 않았을 거야.”
그러면서 꺾은 나뭇가지를 불 속으로 하나하나 던져 넣었다.
“공녀도 해 볼래?”
“…….”
생각 없이 나뭇가지를 받아 드니, 촉촉한 습기가 느껴졌다.
‘젖은 나무로 불을 피우면…….’
당연한 수순으로 매캐한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노을이 지려고 하는 하늘 위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며, 나는 중얼거렸다.
“……신호를 보내고 계시군요.”
“정답.”
싱겁게 대답하며, 대공이 남은 나뭇가지를 모두 불 속으로 던져 넣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어. 하나는 비관적이고 하나는 낙관적인데 어떻게 할래?”
“둘 다 듣죠.”
“낙관적인 쪽부터 이야기하자면 일단 우린 목숨을 건졌어. 그리고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도 않았고 신호를 보내고 있으니 곧 사람들이 우릴 찾아낼 거야.”
“그럼 비관적인 쪽은요?”
“그렇게 큰 마물이 균열을 찢고 나타나면…… 뭐라고 해야 할지, 근방이 불안정해져. 그래서 주변에 또 마물이 출몰할 가능성이 높아.”
“또요?”
물뱀을 떠올리며 어깨를 움츠리자 대공이 “괜찮아, 괜찮아.” 하며 나를 달랬다.
“여차하면 죽여 버리면 돼. 사실 비관적이라고 할 것까진 없는 상황이야.”
“그거 참…… 안심이 되네요.”
나는 후우 한숨을 내쉬며 재킷을 돌려주려고 했다. 그러자 대공이 사양했다.
“덮고 있어. 나보다도 공녀가 상태를 온존하기 어려울 테니까.”
“그렇다면야…… 사양하진 않을게요.”
나는 웅얼거리듯 답하며 재킷을 어깨에 둘렀다. 축축하긴 했지만 바람막이 정도는 되어 주어서 없는 것보단 확실히 나았다.
“……감사합니다, 대공 전하.”
“정말?”
“예?”
이쪽을 바라보는 눈빛이 먹잇감을 낚아챈 솔개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정말 감사하냐고 묻고 있어, 공녀.”
“그으게…….”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목숨을 살려 주셔서 감사하기는 한데…… 또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그렇게 대답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요.”
“하하. 그것도 정답이야.”
웃음을 터트리며, 대공이 의미심장하게 내 쪽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저, 전하.”
“고맙다면 질문에 대답해 줘.”
약간 쉰 듯한 낮은 목소리가 속삭였다.
“공녀, 대체 정체가 뭐지?”
“저요?”
“응.”
“저는 로잔헤이어 공작가의 유리 엘로즈……”
“아니, 신상 정보 말고.”
대공이 홰홰 손을 내저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혹시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내가 게임 속 세상에 들어왔다는 걸 눈치챘다든가……?’
바짝 긴장한 내게 대공이 말했다.
“가끔씩 공녀한테서 아주 묘한 냄새가 나거든.”
“내, 냄새요?”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저 잘 씻고 다니는데…….”
멍하니 중얼거리자, 대공이 실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뭐, 반응을 보아하니 공녀도 짚이는 게 없긴 한가 보군.”
“…….”
짚이는 게 없는 정도가 아니라 내가 무슨 냄새를 풍긴다는 것도 오늘 처음 들었다.
혹시나 싶어 손목을 들어 킁킁 냄새를 맡아 보아도, 희미하게 물비린내가 느껴질 뿐, 다른 불쾌한 냄새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키이이잉…….
금속성의 무언가를 긁는 듯한 불쾌한 소리.
“이건……!”
“이런. 말이 씨가 됐나?”
대공이 나무에 비스듬히 세워 두었던 검을 집었다. 눈앞에서 허공에 금이 생기더니, 시커멓게 입을 벌리기 시작했다.
“균열이 열리는 속도가 빨라요!”
“말했잖아. 지금 여긴 불안정하다고.”
대공이 등 뒤로 나를 숨기며 대답했다.
그오오오오…….
그와 동시에 철퍽, 하는 소리와 함께 마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진흙 더미?’
굉장히 불쾌한 냄새와 함께 진흙 같은 액체를 뚝뚝 떨어트리고 있는 손이었다.
“슬러그로군.”
“으…….”
그오오오오……!
마침내 진흙을 뒤집어쓴 민달팽이 같은 형상이 균열에서 완전히 기어 나왔다!
대공이 스릉, 하고 검을 뽑았다.
“겁먹을 것 없어.”
그와 동시에 내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창이 나타났다.
경고! ‘비틀린 마류’를 감지합니다.
정화력을 사용하시겠습니까? Yes or No.
어, 어떡하지?
아까 물뱀보다는 약해서 정화력을 써도 될 것 같긴 한데, 왠지 사용하는 모습을 대공에게 보여 주는 게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내가 망설이는 그 잠깐 사이에.
그어어어어……!
괴물이 우리 두 사람을 덮칠 듯이 몸을 일으켰다!
“윽…….”
형언할 수 없는 냄새와 시커먼 기운을 이기지 못한 나는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바로 그때.
푹.
대공의 검이 깨끗하게 마물의 머리를 관통했다.
“윽……!”
촤악, 기분 나쁜 액체가 터져 나왔다. 마물의 피보다 더 점성이 있고 냄새는 더 고약한 액체였다.
나에게는 몇 방울 튀지 않았지만, 대공은 거의 액체를 뒤집어쓰다시피 했다.
펄썩.
부르르 떨던 슬러그가 절명했다. 슬러그에서 흘러나온 액체가 땅에 닿자, 땅이 시커멓게 부식하는 게 보였다.
“괜찮으세요?”
“후우.”
대공이 인상을 쓰고 액체에 젖은 금발을 뒤로 넘겼다. 흰 얼굴을 뚝뚝, 액체가 타고 흘렀다.
다행히 살갗에는 별다른 이상 증세가 보이진 않았다.
“이래서 죽이기가 귀찮다니까.”
액체를 뒤집어쓰다시피 한 셔츠는 시커멓게 젖어 엉망이 되어 있었다.
대공은 짜증스럽게 쯧 혀를 차고, 엉망이 된 셔츠를 잡아 뜯듯이 벗었다.
‘헉.’
눈 돌릴 틈도 없이 그의 벗은 상체를 맞닥뜨리고 말았다.
사람의 몸이라기보다는 조각품인가 싶게 온몸에 근육이 단단하게 들어차 있는 몸이었다.
하지만 과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골격 자체가 크고 훤칠해서 터질 듯한 근육마저 늘씬하게 보일 정도였으니까.
시선을 사로잡는 몸이었지만, 넋 놓고 감상할 틈은 없었다. 대공이 핏줄이 불뚝하니 기어오르고 있는 두꺼운 팔을 들어 제 손등을 날름 핥았기 때문이었다.
‘뭐 하는 짓이야!’
“전하!”
기가 막혀 버럭 외쳤다. 대공이 어깨를 으쓱하며 중얼거렸다.
“맛은 없군.”
“그야 당연하죠!”
대체 어떤 정신머리를 가졌길래 마물의 몸에서 떨어진 고약한 액체를 혀로 핥을 생각을 다 한단 말인가?
“기겁하기는.”
오히려 대공은 나를 보며 쿡쿡 웃더니, 보란 듯이 셔츠를 팽개치고 내 옆을 지나쳤다.
“좀 씻어야겠어.”
“다, 다녀오세요.”
“?”
무슨 말이냐는 듯 대공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공녀도 같이 가야지.”
“네에?”
“그럼 여기 있다 또 마물을 만날 셈인가? 추천하고 싶은 선택은 아닌데.”
“그, 그건 그렇지만…….”
“걱정하지 마, 물가는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까.”
“그럼 일단 이거라도.”
나는 헐벗은 대공을 향해 재킷을 내밀었지만, 대공은 코웃음을 쳤다.
“씻고 난 다음에 줘야지.”
“아 참, 그렇죠…….”
“따라와.”
나는 하는 수 없이 척척 앞서가는 대공을 따라 물가로 향했다.
* * *
어떻게 살아남았나 했더니, 우린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 온 모양이었다.
다행히 아주 멀리 온 것 같진 않았다.
‘우리가 떨어진 절벽도 가까이서 보이고 있고…….’
내가 주변을 둘러보는 사이, 대공은 철벅거리며 물속으로 들어갔다.
물이 허리까지 잠길 즈음이 되자, 그가 손으로 물을 퍼 먼저 세수를 하더니 그대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후우.”
근육질의 몸에 새겨진 자잘하거나 큰 흉터를 따라 물이 또르르 고였다가 흘러내렸다…….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보면 안 돼!’
재빨리 고개를 돌리며 돌아서자, 뒤에서 대공이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렸다.
“공녀도 이리 오지 그래?”
“예? 됐어요!”
“아까 보니까 옷에 피가 튀었던데. 냄새가 고약하니 헹구기라도 하는 게 좋지 않겠어?”
“전하께서 다 씻으시면 할게요.”
“그렇게 내외할 것까진 없는데.”
“있어요.”
단호하게 대답하자 대공이 또 쿡쿡 웃었다.
곧이어 그가 몸을 씻는 소리만이 주변을 울리기 시작했다.
‘이, 이것도 왠지 좀 민망한데…….’
잠시 후.
“다 했어, 공녀.”
“입으세요.”
나는 보지도 않고 재킷을 내밀었지만, 대공은 굳이 내 앞으로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사양할게. 지금은 몸이 다 젖어서, 옷을 입으면 외려 불쾌할 것 같거든.”
물을 머금은 금발이 반짝였다. 붉은 눈동자가 짓궂게 빛나고 있었다.
‘윽…….’
남자의 벗은 몸을 본 적이 없는 건 아닌데, 이상하게 이 남자가 옷을 벗고 있는 건 좀…….
‘유난히 외설스러워.’
눈 둘 곳을 찾아 시선을 옮기려는데…….
“……잠깐만요, 전하.”
“?”
대공의 피부가 붉게 달아오른 게 보였다.
“이거 왜 이런 거예요?”
“아, 맞다. 슬러그의 체액에는 독이 있어.”
“네? 그걸 이제 말씀하시면 어떡해요!”
“나도 까먹고 있었거든.”
나는 아까 땅이 부식하던 장면을 떠올리며 침음을 삼켰다. 그때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괜찮으세요?”
“글쎄…….”
대공이 나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몸에서 좀 힘이 빠지는 것 같기도 한데.”
“네에?”
놀라서 그를 살펴보니 눈이 노곤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큰일이다.’
“일단 이쪽으로 오세요.”
나도 모르게 그의 팔을 덥석 붙잡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