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4화 (74/182)

66화

* * *

선착장에서 내준 배에 대공이 먼저 발을 디뎠다. 그다음으로 세드릭도 손쉽게 배 안으로 건너갔다.

나는 두 사람의 움직임에 따라 출렁이는 배를 바라보면서 뜻밖의 난관을 발견하고 말았다.

‘어떻게 건너가지, 이거……?’

저렇게 출렁거리는 배 위에서 균형을 잘 잡을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내가 고민하고 있는 그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별거 아니야, 공녀.”

내 쪽으로 동시에 두 사람이 손을 내밀었다.

“아…….”

나는 그 어느 쪽의 손도 쉽사리 잡지 못하고 잠깐 망설였다.

그에 세드릭과 대공도 서로 물끄러미 시선을 주고받았는데…….

“…….”

“…….”

적대적인 시선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먼저 양보할 기색이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저길 좀 봐요.”

“어머, 저게 웬 재미있는 그림이람?”

설상가상으로 사람들의 이목이 점점 이쪽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지.’

나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손을 들어 두 사람의 손을 동시에 붙잡았다.

“!”

“잘 잡아 주세요.”

“아, 그래.”

“알겠습니다, 공녀.”

일국의 대공과 후작. 양손의 꽃이라 해도 부족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부럽다고 하면 때려 줄 테다.’

경고! ‘비틀린 마류’를 감지합니다.

정화력을 사용하시겠습니까? Yes or No.

대공의 손을 잡아서인지 익숙한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지만, 나는 무시하듯 마음속으로 간단히 ‘No’만 외쳤다.

‘이놈의 정화력은 정말 시도 때도 없다니까.’

속으로만 투덜거리면서 두 손에 의지해 조심스럽게 배에 안착했다.

자연스럽게 대공, 나, 그리고 세드릭의 순서대로 배 안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 상태로 배가 선착장을 떠나 출발하기 시작했다.

나는 눈치를 보다 슬쩍 말했다.

“나, 날이 참 좋네요.”

“흐음.”

“…….”

분위기를 어떻게든 해 보려고 건넨 말에, 대공은 어깨를 으쓱했고 세드릭은 침묵하며 노만 저었다.

‘와, 이거…….’

어떡하지? 죽겠는데.

입에 침이 마르는 기분에 “하하…….” 하고 의미 없는 웃음만 흘리며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던 차.

“공녀.”

갑자기 세드릭이 나를 불렀다.

“네?”

“볕이 따갑습니다. 양산을 쓰시는 게 좋겠습니다.”

“양산이요?”

그 말에 주변을 둘러보니 아가씨들은 뙤약볕에 피부라도 탈까 죄다 양산을 펴고 있었다.

안 그래도 이쪽으로 집중되는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고 싶었던 나는 잘됐구나 하고 양산을 펴서 그 속으로 숨었다.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심리적인 안정감은 있었다.

“챙겨 줘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그 말을 끝으로 세드릭과의 대화는 끊겼다.

대공이든, 세드릭이든 차라리 둘만 있으면 어떻게든 대화를 해 보겠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든 나머지 한 사람이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도무지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들끼리 대화를 할 생각이 있어 보이지도 않고…….’

숨 막혀 죽겠다, 진짜.

“공녀.”

그때, 대공이 나를 불렀다.

“네?”

“듣자 하니 말이야.”

대공의 목소리는 늦은 오후의 공기처럼 나른하고 부드러웠다.

“공녀가 이번에 신성력을 발현했다고 하던데.”

“쿨럭.”

……하지만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나는 갑자기 기침을 하다니 어디 아프냐며 가증스럽게 묻는 대공을 향해 아니라고 손을 내저어 보였다.

‘언젠가 얘기를 꺼낼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가볍게 본론으로 들어갈 줄은…….’

바로 그때, 노만 젓고 있던 세드릭이 입을 열었다.

“외람되오나 대공 전하, 그 일에 대해선 황제 폐하께서 함구령을 내리신 상태입니다.”

“에스테반 후작.”

대공의 붉은 눈동자가 온기 없이 반짝였다.

“설마 내가 그걸 몰랐을 것 같나?”

“공녀를 곤란하게 만드는 질문은 삼가 주시기……”

“그건 후작의 권한이 아니지.”

대공이 가차 없이 세드릭의 말을 잘랐다. 뒤이어 송곳으로 후벼 파듯 질문했다.

“후작이 공녀의 대변인인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다못해 피앙세라도 되나?”

“대공 전하.”

“거봐. 후작은 공녀의 그 무엇도 아니지 않나.”

“…….”

그 말에 세드릭의 미간에 금이 가듯 주름이 졌다.

나는 당황스러웠다.

‘아니, 이 사람들 왜 이렇게 급발진이야?’

“저기……”

어떻게든 말려 보려고 입을 열었지만, 나보다 대공이 더 빨랐다.

“레이디를 싸고돌겠다는 후작의 마음이야 갸륵한데, 뭐든지 지나치면 월권이 되는 법이거든.”

“……월권은 대공 전하께서 하시는 게 월권입니다.”

하지만 세드릭도 지지 않고 싸늘하게 맞받아쳤다.

“황제 폐하께서 함구령을 내리셨음에도 언급을 하시는 건 신하로서의 권한을 넘어서는 행동이 아닙니까?”

“그야 그렇지.”

대공이 뻔뻔하게 대답했다. 그 입술에 걸린 미소가 얼마쯤 비틀려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런 걸 신경이나 쓸 것 같나?”

“…….”

두 사람의 말싸움이 극에 달한 그때.

“!”

출렁, 하며 배가 급속히 기울었다.

‘뭐, 뭐지?’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니, 우리 배를 둘러싼 물결 위에 이상한 소용돌이가 몰아치고 있는 게 보였다.

‘이건…….’

단순한 소용돌이가 아니었다.

나는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저 안에서 마물의 기운이 느껴져……!’

“균열이로군.”

뒤에서 대공이 침착하게 판명을 내렸다.

“균열이라면……”

“아무래도 물속에 균열이 생긴 것 같아요.”

나는 재빨리 말했다. 그리고 1서클 기초 마법인 바람을 일으키는 마법을 사용했다.

최대한 균열로부터 멀어지려는 시도였지만, 이미 휘말린 소용돌이에서 탈출하기에 바람의 힘은 너무 미약했다.

“가만히 있어, 공녀.”

대공이 내 어깨를 짚어 배에 앉혔다.

“이건 내 예감인데, 저기서 마물이 나온다면……”

촤아아아악!

이윽고 소용돌이의 한가운데에서 정체 모를 무언가가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꺄아아악!”

“세상에, 무슨……!”

말다툼에 정신이 팔렸던 우리와 달리 진작에 구역을 벗어난 사람들이 멀리서 내지르는 비명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균열의 괴수’가 출몰합니다!

이윽고 호수 위로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그것은…….

“……수룡…….”

거대한 물뱀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샤아아아악!

수룡이 입을 벌리며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냈다.

“뱃전을 붙잡고 몸을 낮춰.”

대공이 나지막하게 명령했다. 나는 얼른 그 명령에 따랐다.

“공녀, 아까 그 마법으로 배가 가라앉지 않게 해 볼 수 있겠어?”

“해, 해 볼게요.”

“좋아.”

고개를 끄덕인 대공이 연이어 외쳤다.

“에스테반 후작!”

세드릭은 이미 검을 뽑고 있었다.

“완전히 균열에서 넘어오기 전에 죽여 버려야 해.”

“알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그때.

동시에 뱃머리에서 세드릭이 도약했다!

“!”

나는 도약의 반동으로 흔들리는 배를 바람으로 간신히 건져 냈다.

앞을 보니 세드릭의 검이 푸른 오러를 세차게 발산하고 있었다.

아지랑이 형태가 아닌, 보다 형체를 갖춘 기운은 바로 그가 오러 마스터 단계에 이르렀다는 증거였다.

세드릭의 검이 수룡의 몸을 반으로 가르려는 듯 횡으로 움직였다!

키아아아악!

마물이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피가 비산하여 비처럼 후두둑 떨어졌다. 내 양산도 완전히 피에 젖었다.

그 상태에서 세드릭이 다시 뱃머리로 착지했다.

작은 배가 순간 심하게 출렁였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마나를 돌려 배가 물에 빠지지 않도록 바람을 조정했다.

천만다행으로 물속에 가라앉지는 않았지만…….

“베지 못했군.”

마물은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지만, 죽을 만큼 타격을 받지는 않은 듯했다.

“…….”

푸른 오러의 기운이 넘실거리는 검을 앞으로 내세우고, 세드릭이 다시 한번 도약하려는지 몸을 낮춘 순간.

끼이이이악!

뱀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그 순간 무언가 수면에서 솟구치더니, 철썩! 하고 수면을 때렸다.

배가 몹시 심하게 출렁거렸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꼬리…….”

“완전히 빠져나왔군.”

쳇, 하고 대공이 혀를 찼다. 바로 그 순간.

경고! ‘비틀린 마류’를 감지합니다.

정화력을 사용하시겠습니까? Yes or No.

익숙한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남과 동시에 거대한 뱀을 둘러싼 새카만 기운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저, 정화하라고? 저걸?’

거대하고 세찬 기운이 무지막지하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뱀의 형상은 거의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그에 비해 내 몸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금빛 기운은 아주 미약하기 짝이 없었다.

‘No! No!’

정화력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시야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런데…….

너로구나!

“!”

뱀의 노란 눈동자가 세로로 동공을 길게 수축하며 정확히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

“역시나…….”

뒤에서 대공이 무어라고 중얼거렸지만, 뱀이 내뿜는 압도적인 기운에 짓눌리다시피 한 내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철썩!

파랑이 이는 호수에 다시 한번 커다란 파도를 만들어 내며, 수룡의 꼬리가 이쪽을 향해 쇄도했다!

세드릭이 오러 블레이드를 휘둘러 꼬리를 베어 내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반쯤만 베어진 꼬리는 힘을 잃지 않고 그를 후려쳐 버렸다.

“세드릭!”

꼬리에 맞은 세드릭이 첨벙, 물에 빠졌다. 나는 하얗게 질려 세드릭을 삼킨 물살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세드릭이 수면 위로 떠올라 머리를 터는 게 보였다.

한시름 놓은 것도 잠시뿐이었다.

인간!

뱀은 지치지 않고 우리를 노리려 했다. 대공이 마치 평지를 밟듯 휘청거리는 배의 뒷머리에서 앞머리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죽이겠다!

“그래?”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검을 빼 든 그의 붉은 눈동자가 즐겁게 반짝이고 있을 것을.

“어디 한번 해 봐.”

키야아아악!

뱀이 다시 찢어지는 비명을 내지르며 공기를 진동시켰다.

다음 순간, 뱀이 작은 배를 한입에 삼키려는 듯 입을 쩍 벌리고 우리 쪽으로 쇄도하기 시작했다!

“대공 전하!”

그 순간.

배 앞머리에 선 대공이 잡은 검에서, 오러 블레이드가 세차게 솟구쳤다.

“!”

순식간에 사람 키보다 더 높이 솟구친 오러 블레이드가 이쪽으로 달려드는 뱀의 머리를 반으로 갈라 버렸다……!

경악할 새도 없었다. 배의 양쪽으로 쪼개진 뱀 마물의 사체가 철퍽! 하며 수면을 때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안간힘을 써서 배를 물에 띄우려고 했지만, 뒤에서부터 밀려드는 새로운 물살에 저항할 수는 없었다.

‘뭐, 뭐지?’

“이런.”

배 앞머리에서 대공이 혀를 찼다.

“뭐, 뭔가요, 전하?”

“뱀이 난동을 부리면서 절벽 쪽이 조금 무너졌어. 그래서 지금 호수가 폭포가 되어 버린 모양이야.”

“뭐라고요!”

그럼 세드릭은?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니, 세드릭이 용케 물살에 휩쓸리지 않고 바위 비슷한 걸 붙잡고 있는 게 보였다.

“엘로즈 공녀!”

그가 소리치며 이쪽으로 손을 내밀었지만, 내가 그 손을 잡기도 전에 물살이 배를 휩쓸어 버렸다.

이대로라면 절벽으로 떨어진다……!

“젠장, 공녀……!”

세드릭이 외치는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렸지만, 그도 나도 방법이 없었다.

그 순간, 새하얗게 얼굴이 질린 나를 누군가 굵은 팔로 단단히 감싸 안았다.

“숨 참아.”

“……!”

그와 동시에 배가 벌러덩 뒤집히고, 우리 두 사람은 사이좋게 쏟아지는 물살에 휩쓸리고 말았다.

그게 내 마지막 기억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