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3화 (73/182)

65화

* * *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마침내 새어머니 주최 뱃놀이 야유회의 막이 올랐다.

야유회 장소는 수도 교외의 솔레아 호수 근처였다.

깎아지른 절벽 위에 자리 잡은 푸른 호수는 이맘때가 되면 사람들이 보트를 타러 많이들 방문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오늘은 새어머니가 특별히 허가를 얻어 로잔헤이어의 야유회에 참석하는 사람만 출입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나는 이번 뱃놀이를 위해 로제타 부인과 함께 해군 복식을 참고하여 디자인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

맞은편의 칼릭스는 왜인지 나를 사냥감을 낚아채기 직전의 매 같은 눈으로 노려보다시피 하고 있었는데, 이유는 짐작할 수 없었다.

‘지난번에 그 걱정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어색하긴 했는데…….’

그 이후로는 별일 없었는데 갑자기 왜 저러는지. 이유는 신만이 아시리라.

그에 반해 오늘 엘레니는 약간 가라앉은 분위기로, 우리와 별달리 말도 섞지 않고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어색한 침묵만이 감도는 사이에, 마차는 곧 솔레아 호숫가에 도착했다.

거기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도착해 있었다.

‘세상에, 저게 다 몇 명이야?’

새어머니가 완전히 독을 품으셨는지, 지난번 다회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초청되어 있었다.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 한쪽에 천막을 설치하고 간단히 먹을 것과 음료수를 차려 놓은 테이블이 길게 늘어서 있고, 동물을 데리고 오거나 분장을 한 재주꾼들이 재주를 부려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해 주기도 했다.

다른 한쪽에는 점성술사들의 천막이 있을 뿐 아니라…….

‘회전목마까지 설치했네.’

이 정도면 야유회가 아니라 작은 축제라고 불러도 될 정도의 규모인 것 같았다.

마차 문이 열리자마자 칼릭스가 먼저 내렸다. 그리고 엘레니와 나를 차례대로 에스코트해서 내려 주었다.

“저길 봐요!”

“어머, 유리 엘로즈 공녀가…….”

사람들의 이목이 단숨에 이쪽을 향해 집중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들끼리만 수군거릴 뿐, 감히 내게 와서 질문을 던지거나 하지는 못했다.

‘황제 폐하께서 내려 주신 함구령 덕분이지.’

폐하 만만세다. 아니었으면 지독한 질문 공세에 시달려야만 했을 거다.

“……누님.”

칼릭스가 무슨 일인지 엘레니를 곧바로 에스코트하지 않고 내 쪽으로 다가와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유리 공녀!”

비앙카 다우렌 영애를 비롯해 친하게 지내는 영애들이 이쪽을 향해 몰려들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들 사이에 합류했다. 칼릭스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오는 내내 인상을 잔뜩 찌푸렸던 걸로 봐서는, 지독한 잔소리였을 게 분명했다.

“건강해 보이시니 다행이에요, 공녀.”

함구령 때문에 그들은 호기심 어린 시선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이렇게 안부만 확인할 뿐이었다.

“염려해 주셔서 감사해요. 덕분에 잘 지냈답니다.”

“공작 부인께서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얼굴을 보니 마음이 놓이네요.”

“그나저나 정말 깜짝 놀랐어요. 일반적인 뱃놀이만 생각하고 온 건데…… 이렇게 많이 준비해 놓으셨을 줄은 상상도 못 했지 뭐예요.”

“손님도 아주 많이 초청되어 있고요.”

“이번 시즌의 메인 사교계를 통째로 이곳에 옮겨 놓은 것 같네요.”

과언이 아닌 게, 언뜻 둘러보기만 해도 한가락 하는 사람들이 줄줄이 도착해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어머, 저길 봐요!”

바로 그때.

“황실의 마차네요! 누가 오시는 걸까?”

“로잔헤이어 공작 부인께서 황제 폐하께 초대장을 직접 전달하셨다면서요?”

“글쎄요, 폐하께서는 공사가 다망하신 분인데…… 아!”

사람들이 탄성을 내뱉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황제보다 더 환영받는 인물, 황태자 이안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그는 병약하다는 여동생인 세실리아 황녀를 에스코트하며 마차에서 내릴 수 있게 도왔다.

“오늘은 황녀님과 함께 오신 모양이로군요.”

사람들 사이에 아쉬운 탄성이 번졌다.

‘병약한 황녀가 딸려 있으니 황태자의 옆자리를 차지하기는 이번에도 글렀다는 생각을 하는 거겠지.’

새어머니가 얼른 그들에게 다가가 황녀와 황태자에게 인사를 올렸다. 나는 잠시 그들이 인사말을 나누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보세요. 저기 또 마차가 와요!”

비앙카의 속삭임에 겨우 눈을 돌려 바라보니, 이번에는…….

‘검은색 마차!’

대공의 마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주춤하고 말았다. 다행히 흥분한 영애들은 그런 내 기색을 눈치채지 못했다.

‘설마 새어머니께서 대공까지 초대하셨을 줄이야…….’

저쪽에서 초대를 받아들인 것도 신기했다.

‘아니, 아니지.’

얼마 전에 대공은 분명히 말했다. 내게 흥미가 있다고.

그건 거짓말일지라도, 내가 신성력을 발휘했다는 소문이 진짜인지는 한번 확인해 보려고 할 게 분명했다.

황제 폐하의 함구령? 그 앞에서는 무용지물일 게 뻔했다.

‘……피해 다닐 수……있을까?’

전망이 그리 밝지는 않았다.

이윽고 올 만한 사람들은 다 왔다 싶었는지, 본격적으로 뱃놀이의 시작을 알리는 휘슬이 울렸다.

“저는 이번에 약혼자와 함께 배를 탈 거예요.”

“저는 친척 오라버니와 자매들과 함께 타기로 정했어요.”

“앗, 저도 남동생과…….”

다들 함께 배를 탈 상대가 미리 정해져 있었다.

“그럼 다들 흩어지겠네요. 아 참, 유리 공녀는 누구와 배를 타실 건가요?”

“아, 저는…….”

배를 함께 타고 싶은 사람은 없지만 피하고 싶은 사람은 있었다.

‘이안한테 가서 그 여동생과 함께 배를 타자고 해 볼까?’

좋은 생각인 것 같아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이안을 찾아보니…….

‘앗.’

이미 새어머니가 엘레니와 칼릭스를 그들에게 붙여 주고 있는 광경이 눈에 띄었다.

‘!’

그때, 칼릭스와 잠깐 눈이 마주쳤다. 칼릭스가 나를 부르려는 듯 입술을 열려는 눈치라, 나는 전력을 다해 고개를 저었다.

‘큰 소리로 이름을 부르면 위치를 들킬 거야!’

다행히 칼릭스가 알아들었는지 입을 다물려고 했다. 바로 그때였다.

“……공녀!”

“!”

누군가 내 손목을 덥석 붙잡는 게 느껴졌다.

나는 파드득 놀라 나도 모르게 손을 뿌리쳤다.

뒤를 돌아보니 세드릭이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며 서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마음이 급해서 그만…….”

그답지 않게 말을 더듬으며 사과했다.

“아, 아니에요. 조금 놀랐지만 괜찮아요.”

“아닙니다. 제가 무례했습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경. 저 정말 괜찮아요.”

“…….”

세드릭이 어딘지 모르게 착잡한 시선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건강은…… 괜찮으신 겁니까?”

아.

그러고 보니 이 사람과는 다회에서 쓰러진 이후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

다시 보니 세드릭은 급하게 달려온 듯 약간 흐트러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회색 눈동자가 진지한 걱정을 담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전 괜찮아요, 경. 걱정해 주신 덕분에 무사히 회복했어요.”

“……그렇습니까.”

“네,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해요.”

이런 상황에 흔히 하는 관용구나 다름없는 말이었는데, 세드릭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하실 필요는 없습니다만…….”

“…….”

“많이 걱정한 건 사실입니다.”

음…… 아무래도 그렇겠지.

세드릭은 마음을 열고 선 안에 들인 사람에게 굉장히 물러지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여태까지 있었던 여러 가지 일로 그의 선 안에 반쯤 발을 걸치고 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우리 집안 사정도, 내가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도 알고 있지…….’

쓰러진 것 자체를 걱정했다기보다, 이 집에서 또 내가 무슨 일을 당한 건 아닐까 그 점을 더 염려했을 것이다.

그 점에 전혀 신경을 못 썼다.

‘좀 미안하네.’

“……미리 소식을 전하지 못해 죄송해요, 경.”

그 말에 세드릭의 얼굴이 약간 풀렸다. 참 이상하게 미소를 지은 것도 아닌데, 마치 꽝꽝 얼어붙은 얼음 한구석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신기한 표정이었다.

“……아닙니다. 경황이 없으셨을 터이니 이해합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아차.”

그러고 보니 마침 잘된 것 같았다. 세드릭도 딱히 배를 같이 탈 사람이 없어 보였고, 나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저기, 경……”

내가 막, 같이 배를 타지 않겠느냐고 권유하려던 순간.

“여기 있었군.”

익숙한 목소리가 귓전을 부드럽게 울렸다.

“공녀.”

망했다.

“대공 전하…….”

붉은 눈동자가 마치 내 부름에 화답하듯 요사스럽게 가늘어졌다.

“어디 숨어 있었나 했더니 여기 숨어 있었군그래.”

“딱히 숨어 있던 건 아닌…….”

“…….”

아 참, 이 사람 앞에선 거짓말 안 되지.

“하하…….”

어색한 웃음으로 어물쩍 넘어가려고 하자, 대공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바로 그때.

“유리 공녀.”

세드릭이 무언가를 막아서듯 내 이름을 불렀다.

“아, 네?”

“저에게 뭔가 하실 말씀이 있지 않으셨습니까?”

“그게…….”

할 말이 있긴 있었는데, 그 말을 최종 보스 앞에서 해도 되는지 잘…….

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세드릭도 대공도 둘 다 얌전히 물러날 태세가 아니었다.

“……괜찮으시면 저와 함께 보트를 타지 않으시겠냐고 물으려 했어요.”

“아…….”

“그래? 잘됐군.”

세드릭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대공이 불쑥 끼어들었다.

“나도 공녀에게 함께 배를 타지 않겠느냐고 물으려 했는데.”

그러더니 그가 세드릭을 바라보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에스테반 후작, 공녀의 제안을 거절할 텐가? 그렇다면 내가 공녀와 배를 타러 가면 될 듯한데.”

“거절하지 않을 겁니다.”

세드릭이 무표정으로 딱 잘라 대답했다. 다소 무례하게 느낄 수도 있는 태도였음에도, 대공은 그 무례를 지적하는 대신 씩 웃음을 머금을 뿐이었다.

“그래? 그럼 잘됐군.”

“?”

뭐가 잘 돼?

의아해하고 있는 우리 두 사람에게, 대공이 상큼하게 제안했다.

“셋이서 배를 타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아. 그렇지, 공녀?”

“……네?”

아니, 이게 웬 강아지 개풀 뜯어 먹고 배탈 나는 소리야?

“저기, 대공 전하.”

“공녀를 주목하는 사람이 많아.”

대공이 부드럽게 어르듯 말했다.

“지금 여기서 에스테반 후작과 배를 타면, 많은 사람들이 향후 두 사람의 행보를 기대하게 될 것 같은데.”

“…….”

“그렇지 않나?”

……얄밉게도 맞는 말이었다.

나는 지금 수도에서 가장 화제에 오른 인물 중 하나였다. 그리고 상대는 제국 최고의 신랑감으로 꼽히는 에스테반 후작이었다.

그냥 미혼 남녀 둘이서 배를 타는 것과는 파급력 자체가 다를 것이다.

절로 한숨이 나왔지만, 별수 없었다.

“……저, 세드릭 경.”

내가 난처한 시선을 보내자, 세드릭이 조금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상관없습니다.”

“좋아, 그럼 결정됐군.”

대공이 상쾌하게 웃으며 즐겁게 제안했다.

“그럼, 이만 선착장으로 가 보도록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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