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뭐?”
집사가 서둘러 문을 열고, 시종의 손에서 은쟁반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세드릭에게 초대장을 전달했다.
……로잔헤이어 공작 부인의 이름으로 보낸 초대장이었다.
세드릭은 단숨에 봉인을 뜯고 내용물을 꺼냈다. 내용은 길지 않았다.
저번 다회에서 있었던 일을 만회하고 싶다는 정중한 사과와 함께, 지금으로부터 사흘 후 그를 뱃놀이에 초대한다는 말이 약간의 미사여구와 함께 적혀 있을 뿐이었다.
유리 공녀의 소식이나 흔적 같은 건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그저 공작 부인의 초대장이었지만…….
세드릭은 생각했다.
‘뱃놀이를 하겠다는 건 공녀도 참석할 만큼 상태가 괜찮다는 뜻인가?’
만약 세드릭이 로잔헤이어 공작가의 내부 사정에 밝지 않았다면, 당연히 그러하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공작 부인은 공녀에게 독을 먹일 정도로 그녀를 마뜩잖게 생각하고 있잖은가?’
유리의 상태와 관계없이, 자신의 명예 회복을 위해 뱃놀이를 계획했을 가능성도 없진 않았다.
‘…….’
여러 가지 가능성이 뇌리를 스쳤지만, 결국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수단은 하나뿐이었다.
“……참석한다는 답신을 쓸 테니, 오늘 내로 로잔헤이어 공작가로 보내도록 해라.”
“예. 알겠습니다, 각하.”
* * *
요 며칠 집안 돌아가는 꼴을 보면서, 나는 인정했다.
뱃놀이 야유회를 성공적으로 치러 내기 위해 새어머니가 쏟는 노력은 정말 갸륵할 정도였다.
지금 이 시기에 굳이 뱃놀이를 해야겠냐며 심기가 불편한 기색을 보인 아버지에게도, ‘유리와 로잔헤이어가 건재하다는 걸 하루빨리 보여 줄 방법은 이것뿐’이라며 강경한 어조로 설득을 마지않았다.
결국 아버지께서도 불편한 기색으로나마 수락하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어렵게 아버지의 수락을 받자마자 새어머니가 한 일은, 직접 쓴 야유회 초대장을 들고 황궁을 찾아가 황제 폐하를 알현하고 초대장을 전달하는 거였다.
물론, 초대를 했다고 해서 황제 폐하께서 뱃놀이 현장에 나타나실 가능성은 현저히 적지만…….
‘그래도 아마 초대해 준 정성을 봐서 대신 아들이라도 보내시지 않을까?’
아마 새어머니가 노린 것도 바로 그 점일 것이다.
황태자에게 직접 초대장을 보내는 것보다 훨씬 더 성공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겠지.
‘어쨌든 내게도 나쁜 일은 아냐.’
정화력 발휘 사건 이후 슬슬 공식 활동을 재개해야 할 시점이기도 하고…….
‘우정 이벤트가 발생하는 다음 에피소드가 머지않았거든.’
그리고 저번 다회에서 그렇게 큰 사건이 있었던 만큼, 만회성인 이번 행사에서는 새어머니가 다른 수작을 부리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물론 조심은 해야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흘긋 옆자리 엘리야의 눈치를 살폈다.
“……집중 안 합니까?”
귀신이 따로 없네, 진짜.
“하고 있었어요.”
“이제 겨우 2서클 큐어 마법을 익힌 참에, ‘하고 있어요’도 아니고 ‘하고 있었다’라?”
그렇게 말하면서 엘리야가 픽 웃었다.
“어디, 점검 한번 해 볼까?”
“여기요.”
나는 당당히 끝마친 과제를 내밀었다. 엘리야는 코끝에 걸치고 있던 안경을 끌어 올리고, 내가 작성한 마법 수식과 진을 진지하게 검사하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트집 잡을 구석이 없군요.”
엘리야의 과제 검사를 통과합니다.
지력이 15 오릅니다.
‘아자!’
쾌재를 부르며, 나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말했잖아요, 집중하고 있었다고요.”
“……고작 이걸로 기고만장하지 마십시오.”
“아.”
엘리야가 손가락을 튕겨 내 이마를 아프지 않게 톡 쳤다.
하지만 입가에는 희미하게나마 뿌듯한 미소가 걸려 있어, 그가 나의 성과를 기특해하고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그에 힘입어, 나는 말했다.
“이 정도 했으면 임시 제자가 아니라 그냥 제자로 삼아 주셔도 되지 않을까요?”
“잊어버린 것 같아 해 주는 말인데, 처음에 굳이 꼭 ‘임시’ 제자여야 한다고 못을 박은 건 내 쪽이 아니라 당신입니다.”
그러게. 내가 왜 그랬을까? 페르가나 아카데미에 입성하기에 엘리야의 제자만큼 좋은 타이틀이 없는데.
나는 일부러 능청을 떨어 보았다.
“그랬던가요? 생각이 잘 안 나는데.”
“……건방지긴 하지만, 뭐. 좋습니다. 그렇게까지 내 제자가 되고 싶다면야 못 받아 줄 것도 없지요.”
마법 수업에서 훌륭한 성과를 올려 ‘마탑주의 임시 제자’ 칭호가 ‘마탑주의 제자’로 승급합니다.
칭호의 효과: 명성 +1000, 마나 +100, 지력 +70. 마탑 소속 마법사들의 동정을 받을 수 있음.
……전부터 생각했지만 저 동정을 받을 수 있다는 건 뭘까?
‘그만큼 엘리야의 성질머리가 더럽다는 뜻이겠지?’
“제자로 인정해 주자마자 눈초리가 불손해진 것 같습니다만.”
“설마요, 그럴 리가요.”
나는 재빨리 부정했다. 엘리야는 나를 가느스름한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더 이상 뭐라고 하진 않았다.
“그런데 엘리야 경.”
“왜요?”
“저희 꼬인 회로는 언제 풀 수 있나요?”
“이제야 그게 생각이 났습니까?”
엘리야가 피식 웃으며 내 볼을 살짝 꼬집었다.
“아아여.(아파요.)”
“안 아픈 거 다 압니다.”
냉정하게 내 엄살을 쳐 내면서, 엘리야가 자기 턱을 매만졌다.
“흠…… 안정적으로 2서클을 이룬 지도 시간이 꽤 지났으니, 이제 슬슬 시도를 해 봐도 괜찮을 것 같군요.”
“정말인가요!”
“한 번에 해결되지는 않을 겁니다.”
엘리야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뭐냐고 묻는 대신 척 하니 손목을 그 손에 쥐여 주었다.
부대끼며 지낸 지 꽤 시간이 흘러 그 정도 제스처쯤은 뭘 말하는지 금방 알아들을 수 있었다.
“…….”
“……엘리야 경? 왜 그러세요?”
하지만 엘리야는 손안에 들어온 내 손목을 잠시 바라보며 말이 없었다.
“가늘…….”
“네?”
뭐라고 말하는지 잘 안 들렸다. 내가 반문하자, 엘리야가 갑자기 안색을 굳혔다.
“?”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나저나 당신.”
“네?”
“손목을 달라 한다고 이렇게 아무렇게나 척척 쥐여 주면 됩니까?”
“……예에?”
달라고 한 건 자기면서 왜 시비람?
“누누이 말했다시피 손목은 마법사의 중요한 급소 중 하나입니다. 이렇게 달란다고 해서 아무나에게 척척 내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경은 아무나가 아니잖아요?”
“…….”
내 말에 엘리야가 드물게 할 말을 잊은 표정으로 멍하니 입을 다물었다.
“……경?”
“……일단…….”
엘리야가 목 졸린 듯한 소리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가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얼굴을 숨기듯 하며 말했다.
“……회로 문제부터 해결하도록 합시다.”
“네.”
어휴, 간신히 넘어가네. 엘리야는 다 좋은데 잔소리가 좀 많은 게 탈이었다.
언제 얼굴을 피했냐는 듯, 엘리야가 내 손목을 쥔 채 자기의 마나를 불어넣었다. 그 생경한 감촉에 나는 조금 놀라 어깨를 파들 떨었다.
‘뭐, 뭐지?’
처음에 내게 마나를 불어넣어 줄 때는 이런 느낌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손목으로 흡수되어 심장으로 향하는 기운이 마치 내 핏줄을 간질이는 것 같았다. 몸속이 그의 마력을 받아들이며 지잉지잉 떨리는 걸 참지 못하고 내가 입을 열었다.
“이, 이거 뭐예요?”
“마나 저항력 때문입니다.”
“저항력이요?”
엘리야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수롭지 않게 설명했다.
“기본적으로 타인의 마나가 몸속에 침입하는 걸 반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면역력 같은 거라고 이해하면 되는 건가?
“마나가 거의 없다시피 했던 예전과 달리 2서클을 이루었으니, 저항력이 커진 것도 당연합니다.”
“으응…… 느낌이 이상해요.”
간지러운 느낌을 참지 못하고 나는 몸을 바르르 떨고 말았다.
“당신…….”
그런데 그런 나를 바라보는 엘리야의 갑자기 낯이 확 붉어지는 게 아닌가?
나는 의아해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왜 그러세요?”
“……아니, 아닙니다.”
엘리야가 이를 악물더니, 남은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일단 좀 참도록 해요. 회로를 안정시키려면 시간이 필요하니까.”
“네.”
“대답은…….”
투덜거리면서도 엘리야는 내 손목을 감싸 쥔 채 회로를 푸는 작업에 집중했다.
‘아.’
그의 마나가 몸속을 유영하며 어딘가를 스칠 때마다, 여태까지 의식하지도 못했던 이물감이 스르륵 풀어지는 느낌이 났다.
“시, 신기하네요, 이거.”
“마법사로서 흔히 겪는 일은 아니긴 하죠.”
그렇게 말하면서 엘리야가 내 손목을 놓았다. 따끈한 체온 덕일까, 나는 어쩐지 열이 오른 것 같은 손목을 매만졌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너무 무리해서 분리를 하려 하면 손상이 갈 수도 있으니까.”
“아, 알았어요.”
“그럼 오늘은……”
엘리야의 입에서 ‘이만’이란 말이 떨어지기 전에, 나는 다급하게 “잠깐만요!” 하고 외쳤다.
“무슨 일입니까?”
“다름이 아니라요.”
“아니라?”
“내일 저희 집에서 뱃놀이 야유회가 있을 예정인데…….”
“야유회?”
찌푸리는 엘리야의 눈빛을 보니, 내가 이 말을 왜 꺼냈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혹시 오실……”
“거절합니다.”
“아, 역시.”
내가 매달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자, 엘리야가 어깨를 으쓱하며 물었다.
“대체 왜 그런 권유를 한 겁니까? 설마 제가 갈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건 아니에요. 거절하실 거라고 예상하긴 했어요.”
“그럼 왜?”
“뭐, 그냥…….”
얼버무리려 했지만, 엘리야는 답을 꼭 듣겠다는 듯 집요한 시선을 보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실토했다.
“……별건 아니고, 그냥 경이 계시면 좀 안심이 될 것 같아서요.”
“안심? 아.”
그제야 엘리야의 생각이 지난번 다회 때 있었던 일에 미친 모양이었다.
나는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아니, 꼭 와 주시진 않으셔도 돼요. 그냥 정말 혹시나 해서 여쭤본 거니까요.”
“……내일은.”
“네?”
엘리야가 부루퉁한 표정으로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내일은 중요한 학회가 있습니다.”
“아.”
그게 아니라도 거절했을 거면서……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그냥 “중요하죠, 학회…….”라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엘리야가 흥 하고 고개를 돌리며 지나가는 투로 덧붙였다.
“……뭐,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나 시간이 된다면 잠깐 들러 볼 수도 있고요.”
“……네? 정말요?”
얘가 웬일이래?
내가 눈을 끔뻑거리자, 엘리야가 마치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시간이 확실히 된다고 장담은 할 수 없으니까, 기대는 하지 마세요.”
“아, 네…….”
내가 엉거주춤 고개를 끄덕이자, 엘리야가 손을 홰홰 내저으며 말했다.
“용건은 끝인 거죠? 그럼 이만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세요.”
참으로 별일은 별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