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 * *
다음 날.
“어머니께서?”
다회 사건 이후로 몸져누웠던 새어머니가 드디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는 소식이 내게도 전해졌다.
그리고 일어나자마자 지난 다회의 일을 무마하기 위해, 뱃놀이 야유회를 기획하기 시작하셨다고 한다.
‘누워 있으면서 그 생각만 한 건가?’
참으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내가 그렇게 감탄하고 있던 그때.
“공녀님.”
“응?”
“소공작 각하께서 공녀님을 찾아오셨어요.”
“으응……?”
칼릭스가 나를?
‘갑자기 왜?’
물론 여태까지 칼릭스의 구박을 견디며 호감도를 올려 온 결과, 예전보다는 사이가 많이 개선되긴 했지만…….
‘그래도 방에 막 찾아오고 그럴 정도는 아직 아닐 텐데.’
의아했지만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혼자 고민하느니 차라리 칼릭스에게 이유를 물어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들어오라고 하렴.”
“…….”
“…….”
순순히 들어오라고 하긴 했지만…….
‘대화가 쉽사리 시작되질 않네.’
제가 먼저 찾아왔으면서 칼릭스는 내준 차만 일없이 들이켜고 있을 뿐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칼릭스.”
“!”
내 부름에 칼릭스가 마치 식사 시간을 방해받은 고양이처럼 화들짝 놀랐다.
“……예.”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 무슨 일로 날 찾아온 거니?”
칼릭스의 눈빛이 약간 부루퉁해졌다.
그가 말했다.
“……꼭 용건이 있어야만 누님을 찾아올 수 있는 겁니까?”
“뭐?”
뜬금없는 말에 나는 눈만 깜빡였다.
‘우리 사이에 당연히 그렇지 않나?’
……라고 말했다가는, 왠지 칼릭스가 빽 하고 성질을 부릴 것만 같았다.
나는 냉정한 말을 삼키며 “그래…….” 하고 하하 웃었다.
“남매 사이에 아무 용건이 없어도 찾아올 수 있지. 내가 깜빡 잊었구나.”
“누님께서는 저와 남매라는 사실을 깜빡 잊을 정도로 신경 쓰지 않고 계시군요.”
“아니 그게 아니라…….”
땀이 날 것 같았다. 얘는 무슨 내 말을 곡해해서 듣는 기능이라도 있나?
“됐습니다. 오늘은 그런 논쟁을 하고 싶어서 찾아온 게 아니니까요.”
“그래…… 그러니……?”
나는 먼 산을 보고 싶은 심정을 애써 참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때, 칼릭스가 입을 열었다.
“몸은.”
“응?”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응? 그야 당연히 괜찮지.”
괜찮으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것 아니겠는가?
“그 말은 나보다는 어머니께 여쭤보는 게 좋지 않을까?”
다회 사건 이후 충격으로 몸져누웠으면서, 일어나자마자 또 다른 사교 행사를 정력적으로 기획하고 계시는 분께 말이다.
“어머니께는 당연히 여쭤보았습니다.”
하긴, 그렇겠지.
“어머니는 자기 한 몸 정도는 추스르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럼 나는 아니란 말이야?”
칼릭스가 가차 없는 시선을 보내며 쏘아붙였다.
“자기 한 몸 정도는 추스를 수 있는 분은 그렇게 자주 쓰러지지 않을 겁니다.”
“……음.”
그렇게 말하면 내가 할 말이 없긴 하네.
“뭐, 그래. 걱정을 끼쳐서 미안하지만 난 이제 정말 괜찮아.”
정화력이야 예전부터 그 존재를 알고 있었고.
갑자기 성녀니 뭐니 소문이 돌고 있긴 하지만, 그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사그라들 것이다.
‘더 자극적인 사건이 생긴다면 말이야.’
“묻고 싶은 말은 그게 다니?”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뭔데?”
“그때 그 말 말입니다.”
“응?”
나는 의아해서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말?”
“당신이 제게 그러지 않았습니까? ‘넌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고.”
“음?”
내가 언제 그런 소리를 했더라?
당황한 내게 칼릭스가 쓴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기억 못 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가 언제 그런 소리를 했는지 기억이 났다.
‘아, 그때. 무도회에서 음독하고 쓰러졌을 때…….’
독의 여파가 크긴 컸나 보다. 얘한테 그런 안 해도 될 소리를 한 걸 보면 말이다.
나는 어쩐지 시무룩해 보이는 칼릭스에게 재빨리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기억났어, 기억났어.”
“……바로 지금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때 무도회 때 한 말이잖아.”
내 말에 칼릭스는 겨우 의심의 눈초리를 지웠다.
“저기, 일단 그 말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말이 헛나온 거야. 정말이야.”
나는 조심스럽게 칼릭스를 달래려 했다.
“잊어버려. 별말 아니었으니까, 정말로.”
“……그렇게 잊어버리라고 해서 잊을 수 있었으면, 이렇게 찾아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칼릭스가 한숨을 쉬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날 당시 누님의 잔에서만 유별나게 좋은 향기가 났죠.”
“그, 그랬지.”
“당시에는 우연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와서는 누군가 누님 때문에 일부러 도수 높은 술을 준비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귀신이네, 진짜.’
잔에 든 게 단순히 도수 높은 술이 아니라 독이라는 것만 못 맞혔을 뿐, 정황을 정확하게 짚어 낸 말이었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니.”
“화원에 마물의 독이 뿌려져 있었습니다.”
“…….”
“그건 분명히 당신을 겨냥한 행동이었습니다. 모르시겠습니까?”
“……모르지는 않지만.”
“아버지께서도, 저도 눈에 불을 켜고 집 안을 뒤집었습니다만 아직 범인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건 나도 충분히 생각하고 있던 바였다.
‘왜냐면 그날.’
새어머니의 눈빛에 스친 건 정말로 당황한 기색이었다.
‘계획적으로 나를 함정에 빠뜨린 게 아니었어.’
그렇다면 대체 누가 그런 짓을 했을까?
의심할 수 있는 인물은 한 사람뿐이었다.
‘엘레니…….’
하지만 그 이름을 지금 칼릭스에게 말한다면, 미쳤냐는 소리만 돌아올 터였다.
내가 말을 아끼자, 칼릭스가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누군가 이 집 안에서 당신을 노리고 있는 겁니다. 이 로잔헤이어의 성에서.”
“…….”
“그런데도 두렵지 않으신 겁니까?”
“글쎄.”
나는 난감한 미소를 숨기지 않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두려움에 떠는 거야말로 그쪽에서 원하는 행동이 아닐까?”
“……의연한 건 나쁜 게 아닙니다만, 제가 보기에 당신은 이 일에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아요.”
“…….”
“마치…… 범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것처럼.”
뜨끔했다.
나는 일단 잡아떼기를 시도했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니.”
당신의 화술 능력치가 300이 넘어, 간발의 차로 칼릭스의 의심을 피해 갑니다.
화술이 15 오릅니다.
정신력이 10 오릅니다.
“……그래요, 아무리 당신이라도 그럴 리는 없겠죠.”
칼릭스는 겨우 납득한 듯 마뜩잖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조심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 고마워.”
“……고맙다는 말은…….”
칼릭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무언가를 말할 듯 입술을 달싹였으나,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앞으로도 아버지와 저는 범인을 색출하기 위해 노력할……”
“그러지 마.”
“뭐라고요?”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그러지 말라고 말했어.”
“대체…… 그게 무슨 말입니까?”
“누군가 정말 나를 공격하려고 숨어들어 있는 거라면, 네가 집 안을 들쑤시고 다닐 때 모습을 드러내려고 할까?”
“…….”
“아닐 거야. 오히려 몸을 낮추고 정체를 숨긴 채 때를 기다리려 하겠지.”
“그건……”
“하지만 너나 아버지가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평소처럼 생활한다면?”
“…….”
“적은 방심할 거고, 한 번 더 모습을 드러낼 거야.”
달그락,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선명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해.”
“그 말은 즉…… 당신을 위험에 노출해야 한다는 뜻 아닙니까!”
칼릭스가 버럭 화를 냈다.
“절대로 그럴 수는……”
“이미 아버지와도 이야기를 끝냈어.”
“예?”
칼릭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그게 사실입니까? 정말로……?”
“응, 그게 범인을 잡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
“…….”
“물론 내 신상이 위협을 받을수록 로잔헤이어의 명성이 실추될 가능성도 높아지겠지.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이번만은 참아 줘.”
“제가 지금 명예를 걱정해서 이러는 줄 아십니까?”
“?”
그게 아니면 뭔데?
“당신을 걱정하고 있는 겁니다. 정말 몰라서 이러시는 겁니까?”
“…….”
몰랐다.
‘얘가 나를?’
그런 내 심경이 얼굴 위에 고스란히 드러났는지, 칼릭스가 입술을 깨물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버렸다.
“……됐습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잠깐, 칼릭스……”
말릴 틈도 없이, 칼릭스는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다.
‘으와. 어떡하지?’
나 지금 되게 실수한 것 같은데.
민망하면서도 약간 미안한 마음이 없지 않은 가운데, 기분이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나를 걱정했단 말이지…….’
칼릭스 로잔헤이어의 성격상 거짓말은 아닐 터였다.
‘벌써 그 정도까지 호감도가 올랐단 말인가?’
그 공략하기 어렵다던 칼릭스의 입에서 ‘널 걱정한다’는 소리를 다 듣다니, 장족의 발전이 아닐 수 없다.
나는 혹시나 해서 관계창을 열어 보았다.
거기에는…….
칼릭스: “……믿어 주지 않는 게 당연할지도 몰라.”
방금 뛰쳐나간 칼릭스의 속마음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구나.’
뭐지?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알아주지 못했네.’
약간의 죄책감 비슷한 것도 한 꼬집 정도 되는 것 같았다.
* * *
며칠 후, 팔그란츠가의 에스테반 후작저.
그곳의 주인은 오늘따라 심란한 심사를 숨기지 못하고 얼굴에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결국 보다 못한 집사가 넌지시 이렇게 물었다.
“각하, 피곤하시다면 이만 쉬시는 게……”
“그런 것이 아니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서류를 기계적으로 살펴보면서, 세드릭은 딴생각에 잠겨 있었다.
‘벌써 일주일이 지났어.’
유리 공녀가 다회 자리에서 그렇게 쓰러지고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그에게는 단 한 줄의 소식조차 전해지지 않았다.
물론, 그 자체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세드릭은 유리의 그 무엇도 아닌 타인일 뿐이었으니까.
게다가 함구령까지 내려온 상황이라, 쾌유를 비는 서신조차 보낼 수 없지 않았는가?
‘하지만…….’
유리 공녀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는 소식을 풍문으로도 접할 수 없다는 건 조금 생각을 해 봐야 할 문제였다.
일주일 동안 로잔헤이어 공작가는 마치 깊은 바닷속에 침몰한 배처럼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혹시 공녀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거나.’
아니다.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났다. 설마 아직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 것이다.
그저 공녀가 보여 준 놀라운 힘에 대해 황제의 함구령까지 내려왔으니, 조심하고 있는 것뿐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초조한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미치겠군.’
도저히 집중이 되질 않아, 차라도 한잔 마시려 세드릭이 펜을 내려놓은 순간.
“각하, 계십니까?”
시종이 정중하게 문을 두드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지?”
“로잔헤이어 공작가에서 초대장이 도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