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화 (70/182)

62화

“이시스 상단 쪽에서? 나를 어떻게 알고?”

여태까지 나는 이시스 상단의 다른 이들을 상대할 때면 로제타 부인만을 앞세웠고, 내 존재를 철저히 숨겨 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안 해더윅이라는 사람이 공녀님을 뵙고 싶다고…….”

로제타 부인이 난감한 얼굴로 고했다.

“아, 그 사람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은 로제타 의상실의 지분 관계를 파악하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나와 로제타 부인을 제외하면 말이다.

‘공적인 채널로 내게 계속 연락을 넣기가 어려워서 이쪽으로 연락을 취한 거구나.’

하지만 한번 찾아가 보고 싶어도 지금은 불가능했다.

아직 폴리모프 반지를 새로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만나면 알아봐야 할 것도 있긴 한데.’

나는 관계창을 오픈하며 생각에 잠겼다.

에이드리언: “나쁘지 않군. 공녀가 내 이름을 불러 주는 거 말이야.”

관계창 코멘트가 처음보다 많이 발전해 있었지만, 기분은 썩 개운치 않았다.

‘그날 다회에서 무슨 이유로 엘레니를 에스코트했을까?’

나와도 두 번 파트너 노릇을 한 적이 있지만, 그건 다 뒤에서 오간 거래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엘레니와도 모종의 거래가 있었던 걸까?’

아니면…… 마음에서 우러난 자발적인 행동?

“…….”

그렇게 되면 곤란한데.

선악의 여부를 떠나 엘레니는 내 라이벌 캐릭터였다.

원작 게임에서도 엘레니와의 경합에서 연달아 패배할 시 공략 캐릭터를 빼앗기는 엔딩도 존재했다.

‘즉, 그 말은.’

……플레이어가 아닌 엘레니도 남주인공들을 공략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여긴 평면적인 게임 속 세상이 아니니까,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야…….’

비록 지금 연애 엔딩이 아닌 우정 엔딩을 목표로 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엘레니의 존재가 어떤 변수가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경계는 필요했다.

‘골치가 아프네.’

내가 그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녀님? 공녀님?”

“아, 미안, 로제타 부인.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어.”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저, 그보다 지금 급한 게…….”

“?”

“이안 해더윅 씨께서 마침 찾아오셨어요.”

로제타 부인 뒤에 서 있는, 낯익은 생김새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이 사람도 양반 되기는 영 그른 모양이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공녀님, 차를 올려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내가 아닌 이안의 대답이었다.

“차는 됐으니 공녀님을 독대할 수 있도록 사람을 물려 주시겠습니까?”

“저…….”

로제타 부인이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손을 내저으며 “그렇게 해 줘.”라고 말했다.

“네,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로제타 부인이 물러간 뒤.

이안은 거침없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불쑥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걱정했습니다.”

* * *

처음부터 그 말로 시작하려던 건 아니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공녀의 안부를 묻고, 그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천천히 알아볼 생각이었는데.

하지만 오늘도 얼굴 보긴 글렀을 거란 예측과 달리, 너무도 말끔하고 아무 일도 없는 듯한 얼굴로 저를 올려다보는 공녀의 푸른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걱정했습니다.”

통 안에 가득 들어 있던 물이 왈칵 쏟아지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전하…….”

“전하가 아니라 이안입니다.”

공녀는 그를 부르는 호칭을 사용하는 데 고집스러운 면이 있었다.

그렇게까지 황가를 향한 충성심이 강한 사람도 아닌 것 같은데, 왜인지 모르게 ‘전하’라는 말을 떼어 놓지 못했다.

“음…… 일단 자리에 앉으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호칭을 고치는 대신 말을 돌리는 공녀를 보며, 이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 안 생긴 건 다행이지만…….’

이안은 일단 공녀가 권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잡아 뺐다.

“전……하가 아니라, 이안! 왜……?”

“공녀도 원래 모습으로 계시지 않습니까?”

이안은 능숙하게 거짓말로 둘러댔다.

“저 혼자 변장을 뒤집어쓰고 있는 건 예의가 아닐 것 같아서.”

“그런 이유로…….”

공녀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당연했다. 방금 이안의 말은 급조한 변명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말이다.

‘가짜 모습으로 있고 싶지 않아.’

왜인지 모르겠지만, 지금 공녀에게는 최선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평범한 변장을 뒤집어쓴 모습이 아니라, 평소의 에이드리언 황태자로 있고 싶었다.

그 모습으로 이안이라고 불리고 싶었다.

떼쓰는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었지만.

‘그렇게 하고 싶어.’

이안은 제 심술궂은 치기를 숨기기 위해, 빙그레 특유의 웃음을 지어 보였다.

“걱정했다는 건 진심입니다.”

“네…… 알고 있어요.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그런 말을 듣고 싶은 게 아닌데.”

“네?”

“아니, 아닙니다.”

이안은 제 말을 알아듣지 못한 공녀에게 두 번 설명하는 대신 손을 내저었다.

“아무튼 그대가 괜찮아 보여 다행입니다, 유리 공녀.”

“음…… 염려해 주신 덕분입니다?”

슬쩍 그의 눈치를 살피며 대답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이안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유리 공녀의 어깨에서도 약간 힘이 빠졌다.

“그럼 이안, 오늘은 제가 걱정되어서 이렇게 직접 찾아오신 건가요?”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얼굴을 보고 싶은 마음이 크긴 했지만, 그것만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공녀에게 설명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무엇을요?”

“그날.”

이안은 깍지 낀 손을 꼰 다리 위에 올려놓으며 말을 골랐다.

겉으로는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티가 나지 않게,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제가 그날 말도 없이 엘레니 공녀를 에스코트하게 된 건,”

“아.”

“그렇게 하라는 황제 폐하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유리 공녀의 동그래진 눈을 보며, 이안은 어쩐지 마음이 초조해지는 걸 느꼈다.

지금 그의 말을 뜬금없다고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버지의 명령이 없었으면 엘레니를 에스코트하지 않았을 거란 말에 안도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심 초조하게 답을 기다리는 이안의 속내를 전혀 모르는지, 유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폐하께서 왜 엘레니를 에스코트하라고 직접 명하셨을까요?”

황제가 명하기에는 너무 사소한 내용이긴 했다.

“폐하께서는…… 제가 한 사람과 특별한 관계로 비치는 걸 경계하셨습니다.”

“아.”

이해했다는 듯, 유리가 사랑스러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뭔지 알 것 같아요. 저도 아버지께 그 비슷한 말을 들었거든요.”

쿵, 하고 심장이 지끈 내려앉았다.

“……설마 로잔헤이어 공작이 당신에게 나를 멀리하라고 당부한 겁니까?”

“네?”

유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아니라고 손을 내저었다.

“그게,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어요. 행동하기 전에 파급력을 생각하라는 충고 정도…….”

“……그랬군요.”

알겠다는 듯 대답하면서도 이안은 속이 복잡했다.

예상치 못한 바는 아니었다. 로잔헤이어 공작쯤 되면 굳이 사윗감으로 황태자를 원하진 않을 터였다.

공작은 딸을 더 높은 위치에 올려 일신의 영달을 추구하는 유형이 아니었다.

오히려 황실과 필요 이상으로 관계가 얽혔을 때를 경계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안도 이미 주지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적령기가 된 딸을 내게 직접 데려와 소개하지 않은 사람은 그뿐이었으니까.’

“아무튼.”

생각에 잠긴 그를 유리가 일깨웠다.

“그…… 음, 설명해 주셔서 감사해요, 이안. 조금 궁금하긴 했거든요.”

“…….”

이안은 그 상태로 살짝 굳어 버렸다.

조금 쑥스러운 듯 감사 인사를 하며, 그가 여동생을 에스코트한 이유가 궁금했다고 인정하는 모습이…….

‘……귀여워.’

무심결에 한 생각에 경악할 틈도 없었다. 한순간 온몸의 핏줄이 그를 꽉 죄는 것 같았다. 즉시로 얼굴을 타고 홍조가 오르는 것 같아 이안은 재빨리 제 입술을 매만지는 척 얼굴을 가렸다.

“이안?”

유리가 의아하게 그를 불렀지만, 이안에게는 평소의 태도를 가장할 여유가 없었다.

“그…… 아무튼…… 할 이야기를 마쳤으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벌써요?”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금 반지를 손가락에 꼈다.

“바쁜 일이 있으신가 봐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네, 그럼…….”

“다음에 또 봐요.”

유리가 웃으며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안은 그때 자각하고 말았다. 아니, 자각이라기보다 인정에 가까웠다.

‘나는 저 사람을…….’

* * *

이안이 황급히 돌아가 버린 후.

‘좀 정신이 없어 보였는데, 괜찮나?’

그나저나 묻기도 전에 엘레니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해 줄 줄은 몰랐다.

‘마치 내가 그걸 궁금해하고 있다는 걸 안다는 듯이…….’

여유로웠던 이안의 미소를 떠올리며, 나는 약간 한숨을 내쉬었다.

‘속내를 읽힌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진 않지만…….’

그래도 이안이 아무 이유 없이 엘레니의 손을 잡은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어서 적잖이 안심이 됐다.

‘아, 혹시 모르니까 관계창 코멘트라도 확인해 둘까?’

나는 관계창을 열고, 에이드리언의 이름을 찾았다.

그곳엔…….

에이드리언: “……귀여워.”

‘엥?’

이게 대체 뭔 소리야?

‘귀여워? 대체 뭐가?’

나는 꺼림칙하게 방금 나눴던 대화를 복기해 보았다. 하지만 내가 뭐 별달리 이상한 소리를 한 건 없는 것 같았다.

‘좀…… 많이 뜬금없긴 한데…….’

징그럽다는 것도 아니고 귀엽다고 하니까, 나쁜 건 아니겠지?

나는 석연찮은 느낌을 지우며 관계창을 종료했다.

‘그러고 보니 이안도 히든 에피소드가 오픈된 사람이지…….’

엘리야의 경우에는 마탑주의 제자. 그리고 이안의 경우에는 황태자의 동업자.

‘……잠깐, 히든 에피소드가 오픈된 게 두 명째라면.’

혹시 남은 두 사람, 세드릭과 칼릭스도 히든 에피소드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

엘리야와는 ‘제자’라는 키워드로, 이안과는 ‘동업자’로서 가까워졌다는 걸 상기해 보면…….

‘두 사람의 히든 에피소드도 마저 오픈하는 게 좋지 않을까?’

배드 엔딩을 보는 기본 조건이 한 사람에게 호감도를 몰빵하지 않고 네 사람의 호감도를 고루 올려야만 한다는 거였으니까.

‘문제는.’

히든 에피소드가 대체 어떻게 오픈되는 건지 전혀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인력으로는 어쩔 수 없나……?’

파하. 한숨이 나왔다.

일단은 이 게임 시스템을 따라가 보는 방법밖엔 없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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