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 * *
“경.”
엘리야는 곧바로 키마이라와 나를 챙겨 마탑으로 향했다.
“왜요?”
“묻고 싶은 게 있어서요.”
“왜 당신을 돕느냐는 질문입니까?”
“네.”
제자 운운하긴 했지만 엘리야가 그렇게까지 나를 좋아하고 있을 거란 생각은 아무래도 들지 않았다.
‘뭣보다 관계창 한마디도…….’
엘리야: “……제자를 두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은 듯해.”
이렇게 아직 생활 기록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단 말이다.
“나를 못 믿겠다는 말이로군요.”
“……이유를 분명히 해 두고 싶을 뿐이라고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흠. 뭐라고 할까?”
흥미롭게 관찰하던 마물을 내버려 두고, 엘리야가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제가 200년 전 실전된 정화력이라는 신성력에 연구자로서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라면?”
“아, 그거라면 당연히……”
“믿을 수 있겠습니까?”
“네, 그야…….”
“그렇군요. 내가 내 제자를 보호하고 싶어서라는 말보다, 그게 안심이 된단 말이지.”
“……네?”
“아니, 아닙니다.”
엘리야가 나른하게 한숨을 쉬며 손을 내저었다.
“어느 쪽이든지 당신이 믿고 싶은 대로 믿도록 하세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좀 찜찜한데요.”
“거기까진 내가 책임져 줄 부분이 아니군요. 그나저나.”
“네?”
“이 마물도 선물받은 거라고 했죠?”
“아,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의 거랑 마찬가지로 대공 전하께서 선물해 주셨어요.”
“흐음.”
“제가 마물 마니아라는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하신 것 같더라고요.”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잖게 말하자, 엘리야가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선물을 주는 이유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안 하고 있는 건가……?”
“네? 잘 안 들렸어요.”
“별거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
“제자의 멍청함을 덮어 주는 것도 스승으로서의 사려 깊은 마음씨니까요.”
그러면서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조금 다정하게 보이는 웃음이었다.
* * *
이처럼 정화력을 발현하고 쓰러진 유리 엘로즈도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레티샤, 유리의 새어머니인 로잔헤이어 공작 부인은 정작 그날의 충격을 추스르지 못하고 칩거 중이었다.
“가엾은 마님.”
시녀들이 조용히 소곤거렸다.
“그런 피투성이가 된 장면을 보신 것 자체가 놀랄 일이셨을 거야.”
“맞아. 아직까지 범인도 찾지 못했고…….”
“열심히 준비하신 다회도 피로하지 못하고 사람들을 그대로 돌려보내셔야 했으니.”
“곧 털고 일어나시면 좋으련만.”
바로 그때였다.
“어머니께선 아직 쉬고 계시니?”
“아, 엘레니 공녀님!”
오종종한 이목구비라 오늘도 사랑스러운 햇살 같은 엘레니가, 품 안에 꽃을 가득히 안고 나타났다.
“어머니를 뵈러 왔는데, 문을 열어 줄 수 있을까?”
“마님께서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쉬고 싶다고 하셨……”
“얘는! 엘레니 공녀님인데, 설마 마님께서 보지 않겠다고 하시겠니?”
선임 시녀가 얼른 면박을 주며 엘레니를 이끌었다.
“조용히 문을 열겠습니다, 공녀님. 들어가 보셔요.”
“그래, 고마워.”
꽃처럼 소담하게 웃는 얼굴로 엘레니가 감사 인사를 했다. 그리고 조용히 열린 문 사이로 스며들듯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니.”
“…….”
대답이 없었다.
엘레니는 안고 온 꽃을 화병 근처의 테이블 위에 대강 얹어 놓고, 침대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어머니, 많이 안 좋으세요?”
“……엘레니니?”
“네, 어머니. 엘레니가 왔어요.”
“그래, 엘레니, 네가…….”
“아직도 기운이 안 나세요, 어머니?”
레티샤가 가느스름하게 눈을 뜨고, 흐릿한 눈빛으로 제 딸아이를 올려다보았다.
“엘레니…… 미안하구나.”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엘레니가 다정히 말하며 자리에 앉았다.
“네가 주목을 받아야 하는 자리였는데…… 또 그년의 딸이 교활한 수로 이목을 다 끌어가 버렸잖니?”
“그건 어머니의 탓이 아니에요.”
“대체 누가 그 자리에 마물의 피를, 아니다. 아마 교활한 그 계집애가 제 능력을 돋보이려고 그런 수를 썼을 거야. 그러니……”
“아니에요, 어머니.”
레티샤는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아니에요, 어머니. 언니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았어요.”
“엘레니, 네가 착한 건 이해하지만, 이번 일은……”
“확신할 수 있어요. 왜냐면 마물의 피를 뿌려 둔 건 바로 저거든요.”
“…….”
가련하게 이마를 짚고 누워 있던 레티샤가 눈을 홉떴다.
“지금, 뭐라고……?”
엘레니는 얼굴 가득 걱정스러운 빛과 다정한 눈빛을 한 채 다시 한번 더 말해 주었다.
“마물의 피를 뿌린 건 바로 저라고 했어요, 어머니.”
“네가 어떻게…… 아니, 네가 왜?”
눈을 부릅뜬 레티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엘레니가 차분하게 그러시면 어지러울 거라고 충고했지만, 레티샤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대체, 어떻게…… 어떻게 그런 일을……!”
“그야 당연히 언니를 골탕 먹이려고 한 일이죠.”
“…….”
“뜻대로 되지는 않았지만요.”
레티샤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그녀는 지금 들은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사랑스러운 그녀의 딸, 엘레니. 이 아이가 무슨 짓을 했다고?
유리 엘로즈, 그 증오스러운 아이를 골탕 먹이려고 했다는 말은 충분히 이해가 갔지만, 그러기 위해서 한 일은…….
‘마물의 피를 받아 화원에 뿌렸…… 어떻게 내 딸이 그런 일을……!’
곱게만 키워 온 딸이었건만.
웃고 있는 딸아이의 얼굴을 보며, 레티샤는 이유 모를 한기가 어깨며 등허리를 훑어 내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왜 그렇게 놀라시는 거예요, 어머니?”
“나는, 난, 네가…….”
“어머니께서 원하시는 일이잖아요.”
엘레니는 새파랗게 질린 제 어미를 앞에 두고, 즐거워서 견딜 수가 없다는 듯 천진한 얼굴로 방글방글 웃고 있었다.
“에, 엘레니. 얘야. 네가 그렇게 위험한 짓을 할 필요는 없어. 이 어미가 너를 위해서 움직이고 있는데, 네가 그렇게 끔찍하고 위험한 일을 직접……”
“하지만 어머니.”
엘레니가 갸웃, 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진심으로 안타깝고 걱정스럽다는 눈빛이 선연했다.
“어머니는 실패하셨잖아요?”
“……뭐?”
“여러 번 기회가 있었는데도 번번이 언니가 눈앞에서 빠져나가는 걸 보고 있기만 하셨잖아요.”
“그건, 그건 말이다…….”
“변명하실 필요는 없어요. 어머니가 부족한 것도, 저는 다 이해할 수 있어요.”
“…….”
“저 역시 이번에 겪어 보니 알겠던걸요.”
엘레니가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보스스 웃었다.
“언니의 빠져나가는 능력은 거의 천운과 같다는 것을요.”
“…….”
“어머니께서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신 것도 이해가 가요.”
“나…… 나는 엘레니, 너를 위해서…….”
“네, 항상 감사하고 있어요, 어머니.”
엘레니가 제 어미의 손을 붙들었다. 맞잡은 손의 온기가 따뜻하게 전해졌다.
“다만 어머니의 지혜에 온전히 기대고 있을 수만은 없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
“왜냐면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거든요. 언니가 저를 자꾸만 이기는 걸 말이에요.”
레티샤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제 딸을 바라보았다.
엘레니의 녹색 눈빛에는 어느새 기묘한 독기와 광기 비슷한 게 스며 있었다.
엘레니가 노래를 하듯 흥얼거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래요,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을 뿐이에요…….”
“엘레니, 맙소사.”
레티샤는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런 딸을 덥석, 끌어안았다.
“아니야, 엘레니. 네가 그렇게 손에 더러운 걸 묻힐 필요는 없었어. 다 이 어미가, 다 이 어미가 알아서 했어야 하는 일인데…… 네 고운 손으로 그런 짓을 나서서 하다니. 세상에. 얼마나 무서웠을까.”
“…….”
엘레니는 태연한 표정으로 말없이 제 어미의 필사적인 다독거림을 받았다. 레티샤는 그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그래, 네 말을 들으니 내가 이렇게 누워 있을 때가 아니로구나. 우리 엘레니가 그렇게까지 견딜 수 없다는 데야, 당연히 이 어미가 나서야지. 응?”
“그런가요?”
“그래, 걱정하지 말렴. 이 어미가 다 알아서 할 거야. 부디 나를 믿어 주렴. 다시는 실패하지 않을 거란다.”
절박하게 매달리듯 딸에게 애원하며, 레티샤가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절대로 실패하지 않을 거야, 절대로.
“그럼 어머니, 기운을 차리시겠네요.”
“그럼, 그럼. 얼른 털고 일어나야지. 걱정하게 해서 미안하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내 딸…….”
엘레니가 빙긋 웃었다. 그리고 천진하게 제 어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어머니가 다시 일어서신다니 기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