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화 (67/182)

60화

* * *

<진명: 유스티엔 리시르 엘라하 로잔헤이어>

<칭호: 어린 마법사, 마탑주의 임시 제자, 베테랑 협상가, 다재다능, 보주의 해방자, 평화의 수호자, 사교계의 신성, 황태자의 동업자, 신성력의 발현자>

명성: 6405

마나: 368/1000

지력: 303/1000

화술: 330/1000

매력: 255/1000

기품: 220/1000

정신력: 190/1000

정화력: 327/????

……정화력이 또 늘었다.

‘이로써 정화력은 사용할수록 늘어난다는 가설이 입증된 셈이긴 한데…….’

내가 화원을 정화하고 쓰러진 뒤 저택은 아주 발칵 뒤집어졌다고 했다.

뒤늦게 도착한 아버지와 칼릭스가 사태를 진정시키고, 황제의 함구령까지 연이어 하달되었지만 흥분한 사람들의 입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벌써부터 나를 두고 대륙이 위기에 빠질 때마다 모습을 드러냈다던 전설적 존재, ‘성녀’가 아니냐는 말까지 돌고 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도저히 웃어넘길 수가 없었다.

‘스포일러 너무 빠른 거 아니냐?’

머리를 싸쥐고 한숨을 내쉬었지만, 별수 없었다.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그동안 내내 고민하던 정화력의 정체가 뭔지에 대한 답은 얻었지만, 갑자기 ‘성녀의 길’이라니.

내 한 몸 잘 건사해서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나머지는 아무래도 좋은 소시민으로서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유리야, 듣고 있느냐?”

“……아, 네. 듣고 있어요, 아버지.”

딴생각에서 퍼뜩 빠져나오니, 아버지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옆에는 엘리야가 시침을 뚝 뗀 표정으로 차를 한 모금 들이켜고 인상을 썼다. 우리 집 차 맛이 취향에 안 맞는 모양이었다.

내가 다시 대화에 집중하려는 태세를 보이자, 아버지가 엘리야를 향해 엄중한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엘리야 마라케시 경, 경을 오늘 이 자리에 모신 것은 한 가지 묻고 싶은 일이 있기 때문이오.”

“물어보시죠.”

“왜 그날 내 딸이 정화력을 사용했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것인지 듣고 싶소.”

“그거야 당연히.”

엘리야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유리 공녀를 위해서였습니다.”

“이 아이를 위해서?”

“공작 각하.”

엘리야가 한숨을 쉬듯 말했다.

“현장에 뿌려져 있던 건 마물의 피였고, 저택 내에는 공녀 소유의 마물 사체가 있었습니다.”

“내 딸은……”

“공녀가 이유 없이 자기 집 화단에 마물의 피를 뿌릴 사람이라곤 저도 생각지 않습니다.”

그 말은 즉, 특별히 이유가 있다면 뿌릴 수도 있는 사람이란 말인가?

‘역시 엘리야. 날 상당히 정확히 보고 있군.’

역시 똑똑한 사람이다. 나는 그렇게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야의 말이 이어졌다.

“누군가 말 한마디만 그릇된 방향으로 얹으면 공녀가 범인으로 몰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아이를 돕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인가?”

“자칫 정화력을 발현한 것 자체가 사술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쓸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각하께서도 충분히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음.”

아버지가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듯 신음을 흘렸다.

나 역시도 엘리야의 말에 공감했다.

‘당시에는 그가 왜 이렇게까지 목소리를 높이나 당황스러웠지만.’

엘리야가 그렇게 소리 높여 내 능력을 정화 계열의 신성력이라고 곧바로 인정해 주지 않았더라면, 여러 가지 잡음이 뒤따를 수 있는 상황이었다.

‘무엇보다도 새어머니가 입을 열기 직전이었으니까.’

엘리야는 그 모든 경우의 수를 마탑주의 공신력이라는 힘으로 틀어막은 거였다.

‘원래 이런 일에 나서는 걸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인데 말이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아버지를 흘긋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대의 말이 일리가 있소. 마탑주의 현명한 판단력에 이 아이의 아비로서 감사드리는 바요.”

“별말씀을.”

엘리야가 고개만 간단히 까닥여 감사 인사를 받아 냈다. 무례하다 싶을 정도였지만, 다행히 아버지는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다.

“한데 이 아이가 발현한 정화력이라는 힘은 어떤 종류의 힘인지……?”

“신성력과 신성 마법은 오래전에 실전된 힘입니다. 제 전문 분야도 아니기 때문에, 아직은 이 부분에 대해서 딱 떨어지게 입을 열 수는 없습니다만…….”

엘리야가 나를 흘긋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미약한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잘하면 따님이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일단은 그런 일이 가능한 힘이라는 것만 염두에 두시면 될 것 같습니다.”

“…….”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도 있는 힘.

그런 말을 듣고도 아버지는 그다지 기뻐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별로 기뻐하지 않으시는군요.”

엘리야도 그 점을 지적했다.

“……솔직히 말해 그렇소.”

“왜입니까?”

“경의 말은 내 딸의 위치가 지금까지와는 달라질 것이고, 앞으로 이 아이에게 새로운 종류의 기대감이 얹힐 거라는 뜻이 아닌가?”

“…….”

“나는 이 아이가 안온하게 살길 바라지, 짊어지기 어려운 의무감을 뒤집어쓰고 살기를 바라지 않소.”

그렇게 대답하면서, 아버지는 엘리야가 아닌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형언할 수 없는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갑자기 듣게 된 아버지의 진심이 고맙기도 하면서, 왠지 그 진심에 보답해 주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동시에 들어서였다.

‘……아니, 예감이라니.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자.’

200년 전 용제를 봉인한 후, 인류는 현재 전례 없는 평화를 누리고 있다.

이런 시점에 내가 정화력을 가지고 활약할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경은 내 심경을 이해할 수 없겠지만……”

“아닙니다. 딸 가진 아버지로서 그런 생각을 하실 수도 있죠.”

“…….”

“덧붙이자면 저도, 제자를 둔 스승의 입장에서 그런 골치 아픈 일이 생기길 바라지 않습니다.”

“!”

뜻밖의 말에 나도 아버지도 약간 놀라고 말았다.

엘리야가 코웃음을 쳤다.

“이 반응은 뭐죠? 내가 제자의 일에 관심을 갖는 게 말도 안 된다는 듯한 분위기인데.”

“아니, 그…… 솔직히 경께서 그렇게 생각하고 계실 줄 몰랐어요.”

“그야 당연히 몰랐겠죠. 내가 말하지 않았으니까.”

“그런 뜻이 아니라…….”

피도 눈물도 없는 중증 마법 오타쿠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런 기특한 생각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시선이 함의하는 바가 상당히 불쾌하게 느껴집니다만.”

“어머, 그럴 리가요. 별생각 안 했는데요.”

나는 호호 웃으면서 딱 잡아뗐다.

“…….”

가느스름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던 엘리야가 코웃음을 쳤다.

“……뭐, 좋아요. 이번에는 넘어가도록 하죠.”

당신의 화술 능력치가 300이 넘어, 아슬아슬하게 엘리야의 직감을 피해 갑니다!

‘오.’

살다 보니 화술 능력치가 300이 넘고, 이런 순간도 다 오는구나.

스스로 약간 감개무량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엘리야에게 물었다.

“하면 마탑주께서는 앞으로 나나 내 딸이 어떻게 대처하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하시오?”

“정치적인 입장이야 저보다도 공작 각하께서 더 잘 아시고 알아서 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엘리야가 팔짱을 낀 채로 조금 한숨을 쉬었다.

“그것만으로는 공녀를 완벽하게 지켜 줄 수는 없을 겁니다.”

“내 생각도 그와 같소.”

“그렇다면요?”

“별수 있겠습니까?”

내 말에 엘리야가 거만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 외의 부분에서는 제 보호를 받는 수밖에요.”

“……경께서요?”

“내 능력을 불신하는 겁니까, 아니면 의도를 불신하는 겁니까? 덧붙이자면 어느 쪽이라도 상당히 불쾌합니다만.”

“……노코멘트하겠습니다.”

“흥.”

아버지는 제법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는 우리 두 사람을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엘리야가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가능하다면 사람들에게 공녀가 제게 사사하고 있는 것을 널리 알리십시오.”

“!”

“아시겠지만 마탑은 어느 국가에도 적을 두지 않은 초법적인 기관입니다. 마탑주의 제자가 되었다는 건 반 정도는 마탑에 적을 두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거였어?

“마탑에 적을 둔 마법사는 마탑주의 권한에 속해 있으며, 그 명령에 따르고 보호를 받습니다.”

“그 말씀은……?”

“국가, 좀 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황제가 그대를 휘두르려면, 반드시 나를 거쳐야 할 거란 말입니다.”

“…….”

이 대륙에 존재하는 마법사의 9할 정도가 속해 있는 마탑, 그 정점에 서 있는 자의 선언이었다.

전혀 광오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라면 황제를 상대로 그 정도 월권을 휘두를 수 있는 능력이 얼마든지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의아한 점은…….

“그렇게 했을 때 경께서 이득을 보실 만한 점이 없는데요.”

오히려 엘리야는 귀찮은 일만 잔뜩 뒤집어쓰게 된다.

“왜 그렇게까지……?”

“……뭐, 내가 내 제자를 보호하겠다는데 불만이라도 있는 겁니까?”

“아니, 불만이 있는 건 아니지만…….”

조금 당혹스럽긴 하지만, 엘리야가 나를 보호해 준다면 그건 당연히 감사할 일이다. 불만은 없다.

‘단지 그가 이렇게까지 귀찮은 일을 무릅쓰려 하는 이유가 조금 불명확하다는 것뿐이지.’

“좋소.”

아버지가 무겁게 입을 뗐다.

“경을 믿도록 하겠소.”

“예에. 그러시는 게 좋을 겁니다.”

엘리야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러더니 날 보면서 픽 웃는 게 아닌가?

“제자보다도 아버지와 말이 통하는군요.”

“…….”

의미심장한 말에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엘리야가 짝 하고 박수를 쳐서 주의를 환기했다.

“자, 그럼 이만 제 제자를 데리고 수업을 하러 가 봐도 될까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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