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화 (66/182)

59화

‘뭐지?’

내가 의아해하고 있는 동안, 새어머니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설사 장난질이라고 해도 얼마나 큰 장난을 쳐 놓았을까? 감히 로잔헤이어의 안뜰에서…….”

“마, 마님, 그것이…….”

시종들은 새어머니와 손님들의 눈치를 보며 무언가를 고할 듯 말 듯 망설였다.

새어머니가 결국 용단을 내렸다.

“여러분, 안심하세요. 작은 소란이 있는 모양이지만, 다회는 예정대로 진행될 거랍니다.”

“마, 마님!”

시종들이 뒤늦게 새어머니에게 다가와 귀엣말을 하려 했지만, 새어머니가 냉혹하게 물리쳤다.

“이럴 시간들이 있으면 얼른 가서 그 장난질이라는 걸 정리하도록 하렴.”

‘사소한 장난질이라기엔 다들 얼굴이 너무 창백한데…….’

아무래도 많은 손님들을 이끄는 중이라는 부담감 때문에, 새어머니는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대경한 기색을 다 읽지 못한 모양이었다.

‘……뭐, 일단 가 볼까?’

나는 새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후원을 향해 다시 걷기 시작했다.

뒤에서 누군가가 조용히 소곤대는 게 들렸다.

“근데 아까부터 조금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 같지 않나요?”

“설마, 꽃향기겠죠.”

“아니, 그렇다기에는…….”

그리고 마침내, 일행이 모두 정원의 코너를 돌았을 때.

“꺄, 꺄아아아악!”

“저, 저게 뭐예요!”

“세상에, 맙소사!”

귀부인들이 일제히 비명을 질러 댔다.

‘그럴 만도 하지.’

아름답게 치장한 후원과 다회장에 끔찍한 검붉은색 액체가 흩뿌려져 있었다.

타르같이 진하고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액체는 하얀 테이블보에도 번져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이 꽃밭에 뿌려져 있었다.

그게 단순한 액체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듯, 꽃잎과 잎사귀가 함께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 기현상을 본 신사들 중 한 분별력 없는 사람이 이렇게 외쳤다.

“이건 아무래도…… 마, 마물의 피인 것 같소!”

“뭐, 뭐라고요!”

“마물이라니, 세상에……!”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어느 심약한 귀부인이 풀썩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겁에 질린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이 주춤거리며 술렁였다.

“오늘 화원은 이날을 위해 엘레니 공녀님이 특별히 가꾼 곳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아니, 그보다…… 어떻게 이렇게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 있죠?”

“로잔헤이어 공작가에 마물의 피라니!”

“공작가에 지독한 원한을 가진 사람의 소행이 분명하오!”

“대체 어떤 자가……!”

술렁거림 속에서, 새어머니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녀가 잇새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래선 안 돼, 이럴 리가 없어…… 대체 누가?”

그 순간, 그녀의 얼굴에 어떤 깨달음이 번졌다.

“……설마!”

‘아.’

곧이어 새어머니의 눈길이 스르륵, 바로 옆에 선 나를 향했다.

눈동자만 굴러 섬뜩하게 나를 마주하는 눈빛.

그 눈빛을 본 순간, 나는 벼락같이 깨달았다.

‘이 저택에는 마물이 있다.’

비록 사체지만, 키마이라라는 고등급 마물이 보관되어 있다. 오늘 내가 엘리야를 이 자리로 불러낸 미끼였다.

즉, 마물은 내 관할하에 있는 물건이다.

‘이 상황에서 새어머니라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든, 말든…….

나를 범인으로 지목할 것이다.

그런 교활한 수단이 새어머니의 녹색 눈동자를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게 눈에 보이는 듯했다.

‘안 돼!’

새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유리, 네가 어떻게 이럴……”

바로 그때였다.

경고! ‘비틀린 마류’를 감지합니다.

정화력을 사용하시겠습니까? Yes or No.

생각할 틈은 없었다.

나는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름과 거의 동시에 ‘Yes’를 마음속으로 외쳤다.

정화력을 사용합니다.

현재 정화력 총량: 100

100만큼 정화를 시도합니다…….

후욱, 하고 몸에서 어떤 기운이 빠져나가는 느낌.

그와 함께 내 몸에서 금빛으로 반짝거리는 밝은 기운이 퍼져 나왔다!

“꺄악!”

“뭐, 뭐죠?”

“유, 유리 공녀가!”

빠져나온 ‘정화력’으로 추정되는 기운이 반짝이며 후원 전체를 감쌌다.

그와 동시에 악취가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했다.

“저, 저게 무슨……!”

사람들의 눈앞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다.

검붉은 액체가 마치 시간을 되감기라도 한 것처럼 식탁보에서, 화원에서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저, 저길 좀 봐요! 꽃이……!”

시들고, 부패하고, 녹아내렸던 꽃의 잔해에서 새순이 돋아났다.

빠르게 돋아난 새순은 곧이어 줄기가 되었고, 줄기 끝에 봉오리가 맺히더니 사르륵 하고 꽃으로 화했다.

“세상에……!”

이윽고 금빛 기운은 얼마간의 반짝임만 남긴 채, 스르륵 사라져 버렸다.

그와 동시에 정신을 차려 보니, 새어머니가 어느새 내게서 두어 발짝 떨어진 채, 나를 부릅뜬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너, 유리! 대체 무슨 마법을…….”

“마법이라고?”

“유리 공녀가 마법을 썼단 말이오?”

대답할 수가 없었다.

‘윽. 현기증이…….’

정화력을 모두 소진했을 때 나타나는 증상, 현기증 때문이었다.

“……마법이 아닙니다.”

누군가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함과 동시에, 내 팔을 단단하게 붙들었다.

“!”

고개를 들어 보니 뒤늦게 도착한 세드릭이 나를 부축하고 있었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내가 무어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내 반대쪽에서 나타난 남자가 선언했다.

“이건 ‘정화력’이라고 부르는 힘입니다.”

물빛처럼 푸른 머리카락에 로제 와인 같은 눈동자.

……엘리야 마라케시였다.

“경…….”

“쉬이.”

엘리야가 나를 달래듯 하며, 무언가 마법을 사용했다.

그의 손에서 따뜻한 흰 빛이 뿜어져 나옴과 동시에, 나는 약간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정화력이라면, 엘리야 마라케시 경.”

그때, 엘레니에게 팔 한쪽을 붙들린 황태자 이안이 입을 열었다.

“이미 실전된 신성 마법의 일종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엘리야가 힘주어 고개를 끄덕이자, 사람들 사이로 탄성이 번졌다.

“신성력이라면…….”

“용제의 봉인 이후 자취를 감춘 힘이 아니오?”

“그런 신성력을 어떻게 유리 공녀가……?”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나는 약간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기진맥진한 상태로 생각했다.

‘나도 몰라.’

그때,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히든 에피소드: 성녀의 길’에 진입합니다!

……뭐?

‘뭔 녀?’

눈을 비비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어 여러 차례 눈을 깜빡거리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

‘성녀의 길……?’

성녀? 내가?

‘난 공녀인데.’

우습지도 않은 말장난으로 현실 도피를 해 봐도 소용없었다.

“실전된 신성력을 사용했다는 건…….”

“엘로즈 공녀님이 신성력의 계승자?”

“설마 그럴 리가요!”

“하지만 우리 모두 봤잖소, 마물의 피를 정화하는 걸!”

“그래요, 게다가 마탑주이신 마라케시 경께서 공언하셨잖아요!”

맙소사. 이대로라면 꼼짝 못 하고 성녀가 되게 생겼다.

나는 새파랗게 질려 입을 열었다.

“뭔가 착오가……”

“지금 내가 착오를 일으켰다고 말하고 싶은 겁니까?”

“윽.”

엘리야의 칼 같은 차단력에 내 미약한 시도는 그대로 헛발질이 되고 말았다.

“당신이 사용한 건 분명히 신성 계열의 정화력입니다. 이 목숨을 걸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봐요! 마탑주께서 목숨까지 거신다잖아요!”

엘리야, 이 망할 능력자 같으니…….

“사라진 신성력은 용제를 봉인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엔 아마도…….”

“…….”

“유리 엘로즈 공녀가, 200년 역사 이래로 용봉공의 피를 가장 진하게 이어받은 혈손이 아닌가…… 싶군요.”

신성력의 검증에 성공했습니다!

칭호, ‘신성력의 발현자’가 부여됩니다.

칭호의 효과: 정화력 +100, 제국민의 칭송을 약간 얻을 수 있음.

……잠시 물러갔던 현기증이 머리를 아찔하게 덮쳤다.

“유리 공녀!”

세드릭이 내 등허리를 받쳐 드는 손길을 느끼는 걸 마지막으로, 나는 정신을 아주 놓아 버리고 말았다.

* * *

유리 엘로즈 공녀가 신성력을 발현했다.

“직후 황제가 함구령을 내렸으나, 워낙 목격자가 많아 제대로 지켜지지는 않고 있습니다.”

“…….”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니 유리 엘로즈 공녀가 발현한 건 정화 계열의 신성력이라고 하더군요.”

남자의 커다란 손에서 절그럭대고 있던 체스 말들이 뚝 하고 움직임을 멈췄다.

“……정화력이라.”

남자, 카미엘은 평이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 마물의 피로 오염되어 죽어 버린 화원을 일시에 되살렸다고 합니다.”

오염.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생각나는 말이 있었다.

“혹시 주변에…… 뭔가 오염된 거라도 있으신가요?”

혹시.

‘이미 그때부터 정화력을 자각하고 사용할 줄 알고 있었던 건가……?’

하지만 그 확신 없는 말투로 미루어 봤을 때, 아마 그녀의 정화력은 아주 기초적인 자각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카미엘의 눈빛이 가느스름해졌다.

‘그날.’

일순간 그녀에게서 풍겼던, 사람을 단단히 홀리던 체향도 그 정화력이라는 것과 연관이 있을까?

그렇다면 과연 그녀는 훼방꾼이 될까, 아니면 협력자가 될까?

‘아직은 모를 일이다만.’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구미가 당겨.’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아랫배가 빠듯하게 조여 올 정도로 말이다.

붉은 눈동자가 사냥을 앞둔 맹수처럼 잔혹하게 반짝였다. 카미엘이 명령했다.

“……앞으로도 그녀를 주시하도록 해라, 콘스탄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대공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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