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아…….”
창가에 그 옷이 있었다.
연한 크림 아이보리색 원단에, 튀지 않는 연둣빛 실로 소맷자락과 드레스 밑단에 레이스 모양으로 자수를 넣었다.
그 위로 가벼운 시폰과 자수로 만든 꽃 모양 코르사주가 줄기를 따라 피어난 것처럼 자잘하고 화사하게 나부끼고 있었다.
발그레한 분홍빛부터 병아리 같은 연노랑까지.
알이 굵은 진주나 반짝이는 보석 장식은 없었지만, 그 사랑스러운 형태만으로도 충분히 존재감을 발하는 드레스였다.
드레스에 제법 익숙해진 내 마음도 조금쯤 설레게 만드는, 그런 옷.
로제타 부인이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제안했다.
“입어 보시겠어요?”
나는 상기한 얼굴로 잽싸게 고개를 끄덕였다.
로제타 부인이 박수를 딱 치자, 대기하고 있던 아가씨들이 내게 다가와 익숙하게 옷시중을 들기 시작했다.
로제타 부인의 회심의 역작, ‘화원의 아가씨’를 착용합니다!
역작 드레스의 착용 효과로 매력이 100 오릅니다.
매혹 지속 시간이 5초 증가합니다.
‘와.’
옷에 효과가 붙은 건 처음 본다.
아무래도 로제타 부인의 실력이 나날이 일취월장하는 모양이었다.
“마음에 드세요, 공녀님?”
“마음에 들다마다.”
나는 거울 속의 내 얼굴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이번 다회에 참석하는 사람들 중에 내 드레스가 가장 멋질 것 같아.”
* * *
다회.
주로 오후 3시 즈음에 손님들을 초대해서 차와 티 푸드를 즐기며 대화를 나누는 행사.
주최자는 주로 여성이며, 주된 참석자도 마찬가지로 여성이지만.
그 주최자가 로잔헤이어 공작 부인이고, 공작도 얼굴을 비치는 자리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물론, 나 역시 그 자리에 초대받았다.
‘이게 바로 여섯 번째 에피소드거든.’
물론, 초대장은 동반 남성 한 명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누구를 초대할까, 고민을 좀 했지만…….’
나는 결국 엘리야에게 초대장을 건넸다.
세드릭의 경우엔 이미 아버지가 초대장을 보냈고.
황태자, 이안은 최근 나와 연달아 무도회에 파트너로 참석하는 등 행동을 같이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제외했다.
‘너무 붙어 다니다가 둘이 약혼을 한다더라, 뭐 그런 소문이 퍼지면 곤란하거든.’
물론, 초대장을 받은 엘리야의 반응은 썩 좋지만은 않았다.
“대체 왜 내게 이 귀찮은 물건을 떠넘기는 겁니까? 혹시 시비를 거는 겁니까?”
엘리야는 진심으로 그렇게 물었다. 나는 이 사람 참 어지간하다고 생각하며 대답했다.
“시비 아니고 초대예요, 경. 제발 보통 인간들이 생활하는 방식에 관심을 좀 가지세요. 안 그래도 사람들은 경이 무슨 은거 기인쯤 되는 줄 안다고요.”
“그게 대체 왜 문제가 됩니까?”
“경에게 사사하는 저까지 괴짜 취급을 받는다면 당연히 문제가 되겠지요?”
“…….”
채찍을 적당히 휘둘렀다 싶자, 나는 재빨리 당근으로 모드를 전환했다.
“그리고 경, 한 번쯤은 저희 집에 오셔야 해요.”
“내가 어째서……?”
“저희 집에 키마이라가 있거든요.”
“……예?”
엘리야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홉뜨며 되물었다.
“황금의 마물, 저주받은 마도 생명 공학의 산물이라고 부르는 그 키마이라를 말하는 겁니까?”
“뭐라고 부르는진 모르겠지만 사자 머리와 염소 머리가 달려 있고 뱀 꼬리를 휘두르는 그 키마이라가 맞아요.”
“그걸 대체 어디서……?”
“입수 경로는 기업 비밀이에요. 자, 이만하면 저희 집, 오실 만하지요?”
엘리야는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경쾌하게 “계약 성립이네요.”라고 도장을 쾅쾅 찍었다.
“공녀님, 다 되었습니다.”
그런저런 기억을 회상하는 동안, 어느새 치장이 끝나 있었다.
‘오.’
오늘 나는 머리카락을 반만 느슨하게 묶어 늘어뜨리고, 군데군데 엉성하게 꽃을 엮은 머리 모양을 하고 있었다.
‘손이 안 간 듯 손이 많이 간 스타일이네.’
덕분에 나는 마치 꽃이 잔뜩 핀 들판에서 잠들었다가 막 일어난 듯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시녀들이 그들의 작품이나 다름없는 나를 뿌듯하게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로잔헤이어의 꽃’이라는 다회 주제에 맞춰 보았어요. 어떠세요, 공녀님?”
“내 의견을 묻는다면, 그대들은 정말이지 전문가야.”
나는 감탄을 감추지 않으며 선언했다.
“명령이야. 오늘 나갈 때 모두 로뎀 금화를 한 개씩 받아 가도록!”
로뎀 금화는 순금 함량이 50%를 넘어가는 카시스 제국의 최고 고액권이었다.
시녀들 사이에서 꺄악, 하는 즐거운 탄성이 일제히 터졌다.
“어쩜 좋아! 정말인가요?”
“역시 공녀님이 최고예요!”
나는 너그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사람의 마음을 사는 덴 역시 금일봉이 최고라고 말이다.
그렇게 떠들썩한 분위기에서 준비를 마친 나는 다회 참석 시간에 맞추어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일단 손님들이 모이는 응접실을 향해 총총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번 다회에 참석하는 손님들은 먼저 응접실에 모였다가, 새어머니의 안내를 따라 다 같이 다회장을 마련한 후원으로 이동하게 되어 있었다.
나는 입구부터 떠들썩한 메인 응접실로 발을 디뎠다.
‘에피소드 6: 공작가의 다회’로 진입합니다!
“안녕하세요. 제가 좀 늦었나요?”
“어머, 유리 공녀…….”
“유리 공녀가 오셨나? 어…….”
사람들의 표정이 나를 발견하고 한순간 묘하게 변했다.
누군가가 연주하고 있던 피아노 소리도 느리게 멈추었다.
‘왜 그러지?’
나 뭐 잘못했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언니, 오셨네요?”
사람들 사이에서 엘레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경합! 엘레니와 당신의 옷차림을 비교합니다.
앗. 오랜만에 경합 이벤트가.
나는 반사적으로 엘레니의 드레스를 훑어보았다. 화사한 분홍빛 드레스에 카민스키 특유의 반짝이는 스팽글 장식과 금사를 아낌없이 사용한 드레스였지만…….
당신의 드레스가 다회의 테마에 좀 더 어울립니다.
경합에서 승리합니다! 매력이 30 오릅니다.
‘오.’
처음으로 경합에서 승리했다!
‘놀랐다. 이게 바로 TPO의 힘이라는 건가!’
확실히 엘레니의 드레스는 허리를 잔뜩 조여서 3시의 다회에 입기에는 다소 화려한 감이 없지 않았다.
“엘로즈 공녀, 드레스가 참 아름답네요.”
“그러게요. 로잔헤이어의 꽃이라는 다회 주제와 딱인 것 같아요.”
“그 머리 모양도 참 자연스럽고 예뻐요.”
“역시 다회라면 저렇게 편안한 드레스가 어울리죠.”
그러면서 마지막 말을 한 사람은 흘긋, 엘레니에게 시선을 주었다.
악의까지는 없는 시선이었지만, 엘레니는 충분히 타격을 받은 것 같았다.
엘레니가 가느다란 미소로 평정을 가장하며 내게 말했다.
“……그러게요. 드레스가 무척 예뻐요, 언니.”
“정말? 고마워. 로제타 부인도 네 칭찬에 고마워할 거야.”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일부러 로제타 부인의 이름을 언급했다.
그러자 귀부인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로제타 의상실이라면…….”
“왜, 황실 무도회에서부터 유리 공녀의 전속 재단사가 됐다던 사람 있잖아요…….”
“저도 최근에 거기서 드레스를 맞추었는데…….”
“자, 자!”
그쯤 하면 됐다는 듯, 새어머니가 손뼉을 치며 끼어들었다.
“시간이 된 것 같아요. 모두들, 이제 다회 장소로 출발하실까요?”
“어머, 네. 그러는 게 좋겠네요!”
응접실을 나온 사람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일어서는 순간.
“그나저나 유리, 네가 초대한 신사분은 아직 안 오신 모양이구나?”
새어머니가 내게 질문을 던졌다.
“네, 좀 늦으시는 모양이에요. 아시다시피 공사가 다망하신 분이잖아요.”
“저런, 그래도 시간에 맞춰 와서 네 에스코트를 해 주면 좀 좋니!”
새어머니가 안타깝다는 듯 고운 눈썹을 팔자로 만들며 혀를 찼다.
“다행히 황태자 전하께서는 엘레니를 에스코트하기 위해 시간에 맞춰 와 주셨는데 말이다.”
“네?”
처음 듣는 말에 나도 모르게 조금 놀라고 말았다.
‘이안이 엘레니의 초대를 받아 우리 다회에 참석했다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보니, 저쪽에서 이안이 나를 향해 조금 난감한 듯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엘레니의 손을 잡고 있었다.
‘엘레니라니.’
새어머니는 황제의 육촌 누이였기 때문에 이안과 엘레니도 아주 미약하게나마 피가 연결되어 있었지만, 육촌부터는 결혼이 가능한 제국에서는 혈연으로 부르지도 않는 수준의 연결이다.
이안은 그런 제국 사교계에서 사촌 이내에 드는 — 바꿔 말해 결혼 가능성이 없는 — 아가씨들의 손만 잡기로 유명한 남자였다.
최근까지 그의 유일한 예외는 바로 나, 유리 엘로즈뿐이었는데.
‘무슨 연유로 엘레니의 초대를 받아들인 걸까?’
사정 모르는 걸로는 마찬가지인 사람들이 이렇게 소곤거렸다.
“태자 전하께서 로잔헤이어의 자매들을 아끼시네요.”
“어머, 그렇다기보다 로잔헤이어 공작 각하의 면을 세워 주시려는 거 아닐까요?”
“그러게요, 전에 유리 공녀님과 파트너로 참석하셔서 깜짝 놀랐는데, 지금 보니 그런 뜻이 있으셨네요.”
그런 수군거림 속에서, 새어머니는 승리의 기쁨을 담은 농밀한 웃음을 머금으며 내 등허리를 두어 번 토닥였다.
“네 파트너가 되실 신사분께서도 빨리 도착하셔야 할 텐데, 유리. 화원까지는 이 어머니와 함께 가도록 할까?”
“……좋아요, 어머니.”
나도 질세라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한 방 먹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나와 새어머니가 일행의 선두에 서서 다회장이 준비된 화원으로 거의 다 이동했을 무렵.
“마님! 마님!”
갑자기 안색이 새하얗게 질린 정원사와 시종들이 달려와 우리 앞길을 막았다.
새어머니가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지?”
“후, 후원에 누가 자, 장난질을 쳐 놓았습니다!”
“뭐?”
사람들 사이로 가볍게 술렁거림이 번졌다.
새어머니의 얼굴에 당혹감이 번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다회는 그녀의 이름을 걸고 진행하는 행사였다.
문제가 생기면, 새어머니의 이름값에도 문제가 생기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대체 무슨 장난질이길래 이리 소란을 떠는 것이냐?”
“그, 그게, 그것이…….”
아무도 제대로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응?’
나는 그때, 기묘하게 익숙한 냄새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