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유리 공녀…….”
“유, 유리 엘로즈 공녀?”
“대화에 끼어들어서 죄송해요. 좌시할 수 없는 내용이 들리는 바람에.”
사람들이 모두 말을 잃은 듯, 나란히 서 있는 나와 세드릭 — 정확히 말하자면, 세드릭은 얼어붙어 있었다 — 을 바라보았다.
침묵을 깬 건 노름꾼 테오도어였다.
“아무리 공녀라고 해도! 여긴 당신 같은 여자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오! 무례하긴!”
“……그만.”
그제야 세드릭이 입을 열었다.
단순히 입만 연 게 아니라, 그는 오러 마스터로서의 위압감까지 발하고 있었다.
“내 손님이신 공녀께 막말을 하는 건 용납하지 않겠다, 테오.”
“으, 윽…….”
“오늘 들은 건방진 이야기도 듣지 않은 것으로 할 테니, 다들 물러가도록.”
여태까지는 세드릭이 봐주고 있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는지, 가신들은 눈치를 보며 쭈뼛거리다가 “그럼…….” “다음에…….” 같은 말을 웅얼거리며 물러나 버렸다.
마지막으로 남은 테오도어도 “제기랄!” 하고 외치며 그들의 뒤를 허둥지둥 따라가 버렸다.
“…….”
“…….”
실내에는 정적이 찾아왔다.
“……함부로 끼어들어서 미안해요, 세드릭 경.”
“…….”
퀘스트 완료: 다툼을 종결합니다!
보상으로 에스테반 후작의 호감도가 크게 오릅니다!
화술이 30, 기품이 30, 정신력이 20 오릅니다.
“……아닙니다.”
세드릭의 회색 눈동자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오히려 저야말로 이런 모습을 보여 드려…… 송구합니다.”
“경의 탓이 아닌걸요. 신경 쓰지 마세요.”
나는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가지고 온 편지를 내밀었다.
“아버지께서 경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하신 서신이에요.”
“……제게…….”
“?”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 경의 개인사인걸요. 말해 주신다면 모를까, 물을 생각은 없어요.”
“그렇다면…….”
앗. 거리가 묘하게 가깝다.
“……제가 말한다면, 들어 주시는 겁니까?”
“어…… 경께서 말할 상대가 필요하시다면…….”
“……아닙니다.”
세드릭이 옅게 한숨을 쉬었다.
“당신을 이 이상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
“무엇보다 공녀께서는…… 이런 식으로 제 일에 말려드실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 말을 듣자 묘하게 반발심이 치솟았다.
‘지금 누가 누구한테 하는 말이야, 이게?’
나는 “죄송합니다만,” 하고 팔짱을 꼈다.
“후작 각하께서도 말려드실 걸 각오하고 저를 도와주셨지요.”
“그건……”
“생생히 기억하고 있어요. 팔그란츠의 에스테반 후작 저택은 저에게 늘 열려 있을 거라고 하신 말씀이요.”
“그건 제가 공녀를……”
“저는 평범한 사람이라 은혜를 입으면 갚을 줄도 알아요.”
“…….”
“무엇보다 경께서는 저런 부당한 말을 듣고 계실 필요가 없어요.”
“……계에…….”
세드릭이 무어라고 중얼거렸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죄송하지만 경, 뭐라고 하셨나요?”
“……이러다 정말 사교계에 소문이라도 번지게 되면 어쩌려고 하십니까?”
“무슨 소문이요? 경하고 제가 교제하고 있다는 소문?”
“…….”
세드릭은 생각만으로도 면목 없다는 듯 얼굴을 감싸며 끙 소리를 냈다.
나는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적어도 저희 아버지께서는 좋아하실 것 같네요.”
“예?”
어리둥절하게 나를 바라보는 남자에게, 나는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경을 사윗감으로 생각하고 계시거든요.”
“……예?”
세드릭의 눈이 뜻밖이라는 듯 커졌다가, 이내…….
“……경, 설마 부끄러워하시는 거예요?”
“아니, 아닙…….”
주제할 수 없는 붉은 기운이 얼굴 전체로 번져 있는 상황에서, 통하는 거짓말은 아니었다.
“경, 너무 부담을 가지실 건 없어요. 사윗감으로 적합하다는 건 경께서 늘 들으시는 평가잖아요.”
“그런, 그렇습, 아니, 그게 아니라…….”
세드릭은 할 말을 찾지 못하는 듯 말을 더듬거리다가, 마침내 이를 악물었다.
“저와 이런 소문이 나면 후일 공녀의 혼사 문제에 폐를 끼치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럼 책임져 주시면 되겠네요.”
“!”
세드릭의 얼굴이 완전히 당혹으로 딱 굳어 버렸다.
나는 하하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농담이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경.”
“…….”
“그리고 혼사 문제는 정말 괜찮아요.”
어차피 결혼하지 않을 거니까.
“하지만 그래도 그런 농담은…….”
“너무 짓궂었나요? 앞으로는 삼갈게요.”
“아니…….”
세드릭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 앞에서라면 괜찮습니다만. 다른 분들께는 오해의 소지가 있으니 삼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경 앞에서도 조심할 거예요. 걱정 마세요.”
“…….”
세드릭이 의중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뭔가…… 비에 젖은 강아지 같은…….’
“……제가…….”
“네?”
“여태까지 공녀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
세드릭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회색 눈동자가 유달리 이쪽을 향해 반짝이고 있었다.
“공녀께서는 제 생각보다 훨씬 강하고…… 대단한 분이십니다.”
“아, 뭐 그런 과찬을…….”
음, 보자. 이 말은 내가 그의 이상형인 ‘비를 맞아 떨고 있는 소동물’에서 벗어났다는 뜻인가?
‘오, 그렇다면 이대로 우정 루트로 진입?’
그렇게 해석해도 좋을 것 같았다.
‘좋았어!’
우정 루트 개척의 싹을 본 나는 너무 기쁜 나머지 활짝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뭘요, 경께서 그렇게 봐 주시니 감사할 따름이네요.”
“…….”
“아, 혹시 다시 이런 건으로 귀찮은 일이 발생하거든, 언제든 저를 불러 주세요.”
“언제든…… 공녀를 말입니까?”
“네. 거창한 일을 해 드릴 순 없지만, 경의 파트너가 되어 함께 무도회에 참석하는 정도는 해 드릴 수 있어요.”
“…….”
세드릭이 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공녀의 제안, 사양하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그럼요, 제가 먼저 한 말인데요.”
나는 든든해 보이도록 내 가슴을 두어 번 두드리며 말했다.
“얼마든지 도와드릴게요. 경과 저는 친구잖아요.”
그치?
내가 동의를 구하듯 웃자, 세드릭의 얼굴에도 천천히, 작은 미소가 번졌다.
‘웃을 줄도 아네?’
“그렇습니까, 친구라…….”
“……아, 죄송해요 경. 못 들었어요.”
웃는 얼굴에 정신이 팔려 세드릭이 뭐라고 중얼거렸는지 못 들었다.
“아니, 아닙니다. 중요한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그런가요?”
“예.”
대답하는 세드릭의 얼굴은 어느새 다시 무표정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전과 같이 딱딱한 무표정은 아니고, 어딘가 말할 수 없는 한구석이 부드럽게 풀려 있는 그런 표정이었다.
“공녀와 친구가 될 수 있어 기쁩니다. 아직은.”
“네? 네…….”
‘‘아직은’이라는 건 뭐야?’
작은 의문이 남았지만, 세드릭이 또 한 번 나를 향해 웃어 주는 바람에 그 작은 의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역시 미남의 웃음이라는 건 좋구나.’
이런 쓰잘 데 없는 감상만 남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