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62/182)

56화

* * *

그리고 다음 날.

나는 아침 일찍 심부름꾼을 보내 에스테반 후작저에 방문 일정을 타진했고, 오후 2시쯤에 방문해도 좋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러니까…….”

거울 속의 나는 약간 곤란해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렇게까지는 꾸미지 않아도 괜찮은데…….”

“무슨 말씀이세요, 공녀님!”

“그래요, 에스테반 후작 각하를 뵈러 가시는 길이잖아요!”

나보다도 더 흥분한 시녀들을 말릴 방법이 없어서, 나는 일단 그들이 하는 대로 몸을 맡겼다.

시녀들은 내 몸을 구석구석 씻기고, 향유며 온갖 것으로 문지른 다음 자기들끼리 토론을 해서 결정한 옷을 입히고 화장까지 완벽하게 솜씨를 발휘해 주었다.

덕분에 거울 속의 나는 깐 달걀처럼 뽀얗고 윤이 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극진히 모시는 공녀님이라기보다, 인형 놀이의 인형이 된 것 같지만…….’

어쨌든 긴긴 치장도 끝이 났고 — 다행히 늦지 않게 시간 안에 마무리가 되었다 — 나는 아버지가 주신 편지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대기시켜 놓은 마차를 향해 총총 내려가는데.

“부지런히 어딜 가시는 겁니까?”

……칼릭스를 만났다.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러 가는 길이야.”

“심부름?”

칼릭스가 미간을 설핏 찌푸렸다.

“하인들이 하지 않고요?”

“음, 뭐. 글쎄…… 어쩌다 보니……?”

“당신이 그렇게 말을 얼버무릴 때면 불안한 느낌이 듭니다만…….”

“설마. 아버지께서 시키신 일인데 내게 위험한 일이거나 수상한 일이겠니?”

“그야…… 그건 그렇지만.”

“너야말로 칼릭스, 그 모습은 훈련을 하러 갈 작정이었던 거 아니야?”

“윽, 이건.”

“어서 가 보는 게 좋지 않을까? 훈련 시간에 늦으면 안 되잖아.”

“……아직 늦진 않았습니다.”

“그래?”

칼릭스가 큼, 하고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자랑은 아닙니다만 이제까지 한 번도 지각한 적은 없습니다. 훈련 시간에 지각할 정도로 시간 개념이 없지는 않으니까요.”

“그래…… 대단하네…….”

멍하니 기계적으로 대답하던 나는 아!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그래, 널 본받아서 나도 지각하지 않도록 해야겠다.”

“네?”

“이만 가 볼게! 훈련 열심히 하렴.”

“잠깐, 누님!”

뒤에서 칼릭스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못 들은 척하고 잽싸게 마차에 올라탔다.

“출발하자!”

“예, 아가씨!”

나는 차창 너머로 어이없어하고 있는 칼릭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잠시 후, 마차는 에스테반 후작저에 도착했다.

호위 기사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서 내리는데, 나를 맞이한 후작저의 집사가 어쩐지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지?’

“에스테반 후작저를 방문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유리 엘로즈 공녀님. 일단,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나는 집사의 안내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집사는 나를 1층에 있는 메인 응접실이 아니라 2층으로 안내했다.

“미리 약속을 하고 와 주셨는데 송구하지만, 지금 후작 각하께서는 예기치 못하게 오신 손님을 맞이하고 계십니다.”

“아, 그런가요?”

놀랄 일은 아니었다. 에스테반 후작은 황실의 기사단장 역할도 겸하고 있기 때문에 저택에 있는 날이 드물다고 들었다.

그런 희귀한 날에 미어터질 정도로 손님이 드나든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공녀님을 기다리시게 해서 대단히 면목이 없습니다.”

“아니, 괜찮아요. 그렇게 급한 용건도 아니고, 급하게 가 봐야 할 곳도 없으니까.”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책임지고 후작 각하께 공녀님의 방문 소식을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럴 필요까지야…….”

“아닙니다. 공녀님을 오래 기다리시게 할 수는 없지요.”

이상했다. 그럴 이유가 없는데 집사의 태도가 묘하게 저자세라고 해야 할까, 굉장히 정중했다.

‘마치 안주인이라도 대접하는 것 같은…….’

……에이 설마, 아니겠지.

나는 고개를 흔들어 머릿속에 쓸데없이 떠오른 생각을 지워 냈다.

“일단 차와 다과를 내오도록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깍듯하게 인사한 집사가 물러간 후, 나는 조용한 응접실에 혼자 남겨졌다.

‘……아니, 별로 조용하지 않은 것 같은데?’

대화하던 사람이 사라지고, 적막 가운데 귀를 기울여 보니 어디선가 거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싸우는 소리……인가?’

저택이 조용해서 그런지, 귀를 기울이자 소리는 조금 더 명확하게 들렸다.

“……잖아! ……초에…… 님이…….”

……어미 정도는 들렸지만, 자세한 내용을 파악할 수는 없었다.

바로 그때.

퀘스트 발생!

에스테반 후작저에서 원인 모를 다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에스테반 후작을 도와 다툼을 종결할 시, 보상이 주어집니다.

보상: 에스테반 후작의 호감도(大), 화술 +30, 기품+30, 정신력 +20.

‘……에엥?’

싸움을 말리라고, 나더러?

‘무슨 일로 싸우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여태까지 시스템은 다소 돌발적이더라도 내가 해낼 수 있는 범위 내의 일을 제시했지, 아주 불가능한 난이도의 미션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런고로, 이번 싸움엔 끼어들 여지가 있으니까 퀘스트가 발생했다……라고 봐도 된다는 거지.’

……으음,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생각에 잠겨 있는데, 하녀가 응접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차, 차를 올리겠습니다, 공녀님.”

아무래도 이 방 안에 있는 게 공녀라는 말을 들어서 무척 긴장한 모양이었다.

나는 최대한 친절한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별로 효과는 없는 것 같았다.

“그, 그럼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그녀는 황실에서나 사용할 법한 극존대를 사용하며 왜건을 밀고 물러갔다.

‘어?’

그런데 너무 긴장을 한 탓일까, 응접실 문을 열어 두고 떠나 버렸다.

‘…….’

……당연한 수순으로, 다투는 소리가 좀 더 명확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형님은 항상 그런 식이시지요! 과연 아버님께서 살아 계셨어도 형님이 저를 이렇게 박대할 수 있었을까요!”

“어험, 고정하시지요, 테오도어 님. 후작 각하께서도 그런 뜻으로 말씀하신 건 아닐 겁니다.”

‘!’

이야기를 듣던 나는 깜짝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테오도어라면…….

‘세드릭의 노름꾼 동생이잖아?’

세드릭을 공략할 당시, 세드릭에게 돈을 빌리러 왔다가 여주인공을 인질로 잡는 등 질 나쁜 행동을 했던 인물이었다.

“그렇습니다. 저희가 여기에 온 건 대화를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큼. 테오도어 님께서 다소 흥분하셨지만, 후작 각하께서도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충분히 귀를 기울이고 있다, 바렐 경.”

“예에, 감사합니다.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지요.”

‘본론이라.’

나는 찻잔을 든 채로 호흡조차 낮추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테오도어 님의 아들을 양아들로 삼아 주십사 하는 것은, 지극히 에스테반가를 위하는 충정에서 드리는 말씀임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뭐?’

내가 놀라거나 말거나, 바렐 경과 사람들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세드릭 님께서는 결혼 적령기를 훨씬 넘기셨음에도 불구하고 약혼을 하시거나, 하다못해 정기적으로 만남을 갖는 영애조차 없으시지요.”

“이런 상황에서 저희는 에스테반 가의 후계가 불안정한 상황을 좌시할 수 없겠다고 생각해서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말씀입니다만 후작 각하, 부디 재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는 아마 선대 후작께서도 바라시는 바일 겁니다.”

나는 머리를 핑핑 굴렸다.

‘가신들이 노름꾼 동생의 아들을 후작으로 추대하려는 건 에스테반 후작가를 휘두르기 쉽게 하려는 의도일 거야.’

게다가 ‘선대 후작께서도 바라시는 일’이라고 하는 걸 보면…….

전에 세드릭이 우리 집 정원에서 했던 말이 문득 스쳐 지나갔다.

“제 아버지도 한 아이만을 집요하게 사랑하는 분이셨습니다. 수혜자는 제가 아니었습니다만.”

아마 수혜자라는 건 저 노름꾼 동생 테오도어였겠지.

그뿐만이 아니라…….

‘후계자일 때부터 선대 후작에게 제대로 대우를 못 받은 세드릭을 가신들이 얕잡아 본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후계 같은 민감한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저토록 쉽게 할 리가 없다.

게다가 쌩쌩하게 젊고 건강한 당대 후작을 상대로 말이다.

‘어처구니가 없어도 정도가 있지…….’

저 말다툼을 말리는 게 퀘스트라고?

오히려 잘됐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말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뚜벅뚜벅 향했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장소는 응접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는데, 아무래도 세드릭의 집무실인 것 같았다.

“오늘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건 가당치 않다. 게다가 내겐 약속을 하고 온 손님이 있으니 일단 물러가 줬으면 좋겠군.”

“핑계 대지 마십시오, 형님! 형님은 이 이야기를 피하고 싶을 뿐이지 않습니까!”

“가문의 후계에 대한 문제는 그 어떤 문제보다 우선시해야 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후작 각하께서 결혼을 염두에 두신 상대라도 있다면야, 저희가 마음을 놓겠습니다만…….”

네 성격에 그런 게 있겠어? 하는 뒷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좋아.’

나는 바로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반쯤 열린 문을 마저 열어젖혔다.

“에스테반 후작님께서 진지하게 만나는 상대가 없다는 말은 어디서 들으신 건가요?”

“!”

갑작스럽게 들려온 내 목소리에 방 안의 사람들이 일제히 놀라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시녀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꾸며 준 빛이 나는 모습으로, 활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매력 수치가 200이 넘어, ‘매혹’이 발동됩니다. 지속시간: 3초.

매혹이 발동되자, 방 안의 남자들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거렸다.

“아, 아니, 당신은……?”

“최신 사교계 소식에 둔감하신 모양이로군요.”

나는 느긋하게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들어가, 무표정하게 당황하고 있는 세드릭의 옆에 섰다.

“그렇지 않나요, 세드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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