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61/182)

55화

나는 집사의 안내를 따라 아버지의 집무실로 향했다.

“아버지.”

“왔느냐.”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

“…….”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아버지는 나를 잠시 빤히 바라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심란해 보이는 눈빛이었다.

‘워낙 표정이 없는 분이셔서 티는 잘 나지 않지만…….’

“……앉거라, 유리.”

“네, 아버지.”

얌전히 권해 주는 자리에 앉자, 아버지가 집사를 시켜 차를 가져오게 했다. 예의 캐모마일 차였다.

“먼저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씀하세요.”

“대공 전하께서 네게 이런 선물을 한 게 두 번째라고 들었다.”

“맞아요.”

“가능하다면 정황을 설명해 줄 수 있겠느냐?”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숨길 일도 아니었다. 나는 맨 처음 사냥제에서 마물과 마주쳤던 일부터 고하기 시작했다.

“황가의 사냥터에서 마물과 마주쳤다고?”

“정확히는 우연히 균열이 열린 곳에 제가 있었다고 해야 할 것 같아요.”

“…….”

아버지는 잠시 말이 없더니, 계속 얘기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셨다.

나는 그때 얻은 잘린 마물 머리를 엘리야에게 선물한 일을 털어놓았다.

“한데 대공 전하께서는 그 일 이후로 제가 그런 종류의 선물을 좋아하는 걸로 아신 모양이에요.”

“그래서 오늘도 네게 마물의 사체를 선물이랍시고 가져오신 거였구나.”

날카로운 말투였지만, 황태자를 두고 ‘놈’이라고까지 언급했던 아버지치고는 상당히 정중한 언급이었다.

“유리야.”

“네, 아버지.”

“전에도 말했다시피 황가의 사람들과 접촉할 때에는 특별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어라? 이 대화를 반복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네, 아버지. 기억하고 있어요.”

나는 차분히 반론을 펼쳤다.

“하지만 저도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황가의 신사분들을 결혼 상대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아요. 말씀드렸다시피 태자 전하와는 서로를 액세서리처럼 여기고 있고……”

“아니, 그런 맥락에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네 처신을 전적으로 믿는다.”

“…….”

“내가 하려는 말은…… 카시스 황가를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유리.”

“!”

황가를 조심해야 한다고?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설마 우리 아버지도 반역을……?

“로엔 대공은 어렸을 적 아버지를 잃고 얼마간 황실에서 생활한 적은 있지만, 황실은 그에게 딱히 뒷배 노릇을 해 주지는 않았다.”

“…….”

“어린 대공이 로엔 대공위를 무사히 지켜 낼 수 있을지에 대해 최소한의 관심마저 없는 것처럼 보였지. 그런 황실의 기조에 따라 귀족들도 대부분 로엔 대공을 돕지 않았어.”

“즉, 아버지의 말씀은…….”

꿀꺽, 하고 침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황실이 로엔 대공을 경계하고 있다는 뜻인가요?”

“로엔 대공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지금의 그 자리에 올라온 자다. 대공위를 거머쥐고 중앙 정계에 진입한 것도…… 죽은 자가 관짝을 박차고 살아 나온 거나 마찬가지인 일이야.”

“…….”

“그리고 황실은 이 상황을 결코 바라지 않았을 거다.”

아, 그렇구나.

이제야 아버지가 내게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해졌다.

“함부로 황태자 전하와 대공 전하 사이에 끼어들었다간, 황실 내부의 알력 다툼에 말려들 수도 있겠군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그래.”

아버지가 식어 가는 찻잔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나는 네가 그런 위험한 자리에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

“…….”

나라고 대공과 연이 닿고 싶어서 닿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런 변명을 할 때는 아닌 것 같았다. 아버지도 나를 책망하고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처해 있는 입장도 입장이거니와, 그 자신도 그다지 무해한 사람은 아니다. 무엇보다 그 사지에서 홀로 기어 나온 사람이니까.”

그건…… 그야말로 내가 잘 알고 있다. 대공은 앞으로 1년 안에 반역을 일으킬 사람이었으니까.

“유리, 그러니 가급적 그를 피하도록 했으면 좋겠구나.”

“유의하도록 할게요, 아버지. 하지만…….”

나는 회의적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제가 노력한다고 해서 그게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어요.”

무엇보다 대공 본인이 내게 흥미를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아버지도 그에 동의하는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 생각에는…… 때때로 칼릭스가 네게 도움이 되어 줄 수도 있을 것 같구나.”

“…….”

나는 무서운 줄도 모르고 대공을 향해 첨예하게 대립하던 남동생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칼릭스는 대공을 싫어할 뿐만 아니라 나도 별로 좋아하지 않을 텐데.’

그런 남동생이 어떤 식으로 도움이 될까? 막막한 기분이었다.

‘이 세상은…….’

복잡하구나.

순간적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걸…… 과연 내가 전에 알던 게임이라고 생각해도 되는 걸까?’

전부터 하고 있던 생각이었지만, 이유를 생각해 본 적도 없이 그저 천재지변이라고만 생각했던 대공의 반역에 어떤 이유가 도사리고 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듣자…….

보다 깊은 깨달음이 가슴을 치는 느낌이었다.

‘내가 게임 시스템창을 보고 있다고 해서, 이 세상이 게임이 되는 건 아니야.’

그보다는 내가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알량한 시스템 하나만 믿고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표현이 좀 더 알맞을 것이다.

“……리, 유리?”

“아, 네. 아버지.”

“그렇다고 해서 겁에 질릴 필요는 없다.”

딴생각에 빠져 있던 내 모습을 겁에 질린 것으로 오해했는지, 아버지가 말했다.

“나와 로잔헤이어는 최선을 다해 널 보호할 거다. 두 번 잃지는 않아.”

‘……두 번?’

뜬금없는 말에 살짝 의문이 스쳤지만, 지금은 그걸 물고 늘어지기에 좋은 때는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아버지. 주의하도록 노력할게요.”

“혹여나 네게 곤란한 일이 생긴다면…….”

아버지가 복잡한 시선으로 식어 버린 차와 나를 번갈아 보며 느리게 입을 열었다.

“부탁하마, 유리. 네가 나를 찾아와 준다면 좋겠구나.”

“…….”

자식을 둔 부모의 직감이라는 걸까? 아버지는 이미 내가 혼자서 많은 일을 처리하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처럼 말했다.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이렇게 답했다.

“……그것도 노력해 보도록 할게요, 아버지.”

“……그래.”

그제야 마음을 놓았는지 고개를 끄덕인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쪽으로 다가가셨다.

“……?”

“받거라.”

아버지가 서랍에서 꺼내 내게 내민 것은 정갈하게 봉투에 담아 로잔헤이어의 봉랍을 찍은 서신 한 통이었다.

“이게…… 뭔가요?”

“에스테반 후작에게 긴밀히 보내는 서신이다.”

“……그런데 그걸 왜 제게?”

아버지가 나를 묘한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흘긋 시선을 피하며 큼큼 헛기침을 했다.

“워낙 긴밀하게 보내는 서신이라 말이다. 남의 손에 맡길 수가 없어. 예전에 우리 집 초대에 응해 준 예로 답방도 해야 하니, 네가 다녀와 주면 좋겠구나.”

“아버지…….”

아버지의 의도를 짐작해 버린 나는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을 숨기지 못했다.

“에스테반 후작이 그렇게 마음에 드신 거예요?”

“큼, 쓸데없는 소리.”

“솔직하게 인정하지 않으시면 안 갈 거예요.”

“…….”

아버지가 곤란한 듯 말을 잃은 사이, 나는 생각했다.

‘이건 좀 위험할 수도 있겠는걸…….’

예전에 그를 초대했을 때부터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아버지는 에스테반 후작을 사윗감으로 점찍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바로 그 결혼 엔딩을 피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만약 아버지가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에스테반과의 결혼을 종용한다면, 나로서는 방어할 수단이 거의 없다.

‘……이참에 확실히 말을 해 두어야겠어.’

“아버지.”

“큼, 왜 그러느냐?”

“아버지께서는 에스테반 후작이 마음에 드신 모양이지만, 저는 솔직히 그분에 대해서 잘 몰라요.”

물론, 에스테반 후작은 게임 속에서는 이미 엔딩까지 본 상대다.

하지만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세계에서는 모든 인물들이 다소 평면적이었던 게임 속에서보다 훨씬 더 다층적인 면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잘 몰라, 그 사람을.’

“물론 딸로서는 아버지의 의사에 순종하는 게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라고는 알고 있지만……”

“유리, 내 말뜻은……”

“저 개인적으로도 그분에 대해 알아 갈 시간이 필요해요. 그러니 아버지께서 너무 성급하게 제 결혼을 서두르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그러니까 앞으로 대략 11개월가량은 말이다.

“……유리, 먼저 말해 두자면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나로서도 강제할 생각은 없다.”

“…….”

“네게 그 편지를 준 것도, 그를 강요하는 게 아니라 서로를 자연스럽게 알아볼 계기를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으로 이해해 줬으면 좋겠구나.”

이해할 수 있다.

딸 가진 아버지의 눈으로 보지 않아도, 세드릭은 꽤 괜찮은 상대다. 아니, 꽤 정도가 아니라 이 정도 신랑감은 제국 내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힌다.

‘성실하지, 인물 좋지. 게다가 능력도 되고 작위도 받쳐 주는 사람이 어디 흔한가?’

……만약 최종 보스의 몰살 엔딩만 아니었다면, 나도 결혼 상대로는 남주인공 세 사람 중에서 세드릭을 골랐을 거다.

게다가 나는 결혼 적령기의 영애로서 혼담 하나쯤 오가는 상대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

오히려 아버지가 말없이 진행하지 않고 먼저 내 의사를 타진해 주어서 다행이었다.

‘으음, 그렇다면.’

“……좋아요, 아버지. 그런 거라면 받아들일 수 있어요.”

“괜찮겠느냐!”

“아버지께서 저를 생각해서 하시는 말씀인걸요.”

물론, 이렇게 순순한 생각에서 허락한 건 아니었다.

‘이왕 세드릭의 이야기가 나온 거.’

오히려 차라리 이 건을 질질 끌면, 페르가나의 왕립 아카데미로 떠날 때까지 결혼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걸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계산속을 숨기며, 나는 방긋 웃어 보였다.

“편지 주세요, 아버지. 오늘은 좀 늦었고, 내일 정식으로 방문을 알리고 다녀올게요.”

“으음…….”

그런데 이번에는 아버지가 미묘한 표정으로 편지를 쥐고 한숨을 쉬셨다.

“아버지?”

“……아니, 아니다. 내가 먼저 말을 꺼낸 일이니.”

나는 아버지가 느린 손길로 내미는 편지를 받아 들었다.

“심부름, 잘하고 올게요.”

“……그래, 잘 다녀오너라.”

이상하게 내가 흔쾌하게 허락할수록 아버지는 심란해 보이는 것 같았지만, 기분 탓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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