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 * *
선물로 받은 새로운 신분증을 잘 챙겨 두고, 나는 이안 해더윅 씨를 그만 보내 주었다.
‘그러고 보니 새로운 변장용 장신구를 얼른 마련해야 하는데…….’
암흑가에 신상이 탈탈 털린 기존 반지를 더 이상 사용할 순 없었다.
‘돈이 얼마나 들려나……? 이번에도 꼈다 뺐다 하기 편한 반지가 좋겠지.’
그런저런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어디 보자, 지금 시간이…….’
2시 40분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면 딱 마주치겠군.’
한숨이 나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행인 점은 그가 이번에는 로잔헤이어 공작가를 정식으로 방문했다는 점이었다.
‘즉, 내 손님이 아니라 아버지의 손님이다 이거지.’
운이 좋으면 차 한 잔만 마시고 내 방으로 올라갈 수 있을지도.
‘좋아.’
단단히 마음을 먹고 마차에서 내렸는데, 다행히 아직 대공은 도착하기 전인 것 같았다.
‘음…… 시간도 얼마 안 남은 것 같은데. 방으로 올라가지 말고 응접실에 있을까?’
나는 메인 홀에서 가장 가까운 응접실로 향했다.
응접실에는 차를 마시기 좋게 놓아둔 소파와 안락의자 외에도 몇 권의 책을 갖춰 놓은 책장, 체스 테이블, 피아노와 편지를 쓸 수 있는 작은 책상까지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었다.
‘책……은 됐고.’
가만, 이 몸이 피아노를 칠 수 있으려나?
호기심에 나는 피아노로 다가가 덮개를 열어 보았다. 메인 응접실의 물건답게 반짝반짝하게 닦아 둔 피아노였다.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피아노의 건반을 띵, 하고 눌러 보았다.
‘아.’
칠 수 있을 것 같다.
의자를 빼어 피아노 앞에 앉았다. 열 손가락을 가지런한 건반 위에 올리고, 막 곡조를 자아내려던 순간이었다.
“공녀님! 여기 계셨군요!”
“!”
갑자기 나를 찾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보니, 시종이 다급한 표정으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대, 대공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벌써?”
“네, 그, 그런데 공녀님께 드릴 선물을 가져오셨는데, 그게 좀…….”
“선물? 아.”
첫 번째 선물에 대한 기억이 번뜩 스쳐 지나갔다.
“나가도록 하지.”
더 생각할 틈은 없었다. 나는 시종을 앞세우고 응접실에서 나와 메인 홀로 돌아갔다.
“누님!”
메인 홀에는 칼릭스가 이미 도착해 있었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아, 엘로즈 공녀. 왔군.”
“네, 그런데…….”
활짝 웃고 있는 대공의 뒤에는 언젠가 보았던 예의 커다란 상자가 거대한 존재감을 발하고 있었다.
“전하, 그건……?”
“여기까지 오는데 공녀의 선물을 빼먹을 수가 없어서 말이야.”
아니, 얼마든지 빼먹어도 되는데…….
게다가 저거.
‘저거 아무리 봐도 그거잖아…….’
“북쪽 변경에서만 볼 수 있는 키마이라야.”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소개와 함께, 대공이 상자의 리본을 당겨 풀었다.
그와 동시에…….
“!”
기다란 혀를 빼물고 죽은 마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만 남아 있던 지난번 마물과 달리, 온전한 형체로 죽은 마물의 존재감은 더욱 대단했다.
네발짐승 같은 형상에 강철 같은 둥근 뿔을 자랑하는 염소의 머리와 사자의 머리.
‘게다가 꼬리는 뱀이야…….’
“마음에 드나, 공녀?”
해사하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는 대공의 얼굴에서 놀리려는 기색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사람, 지금 진심이다…….’
그랬다. 대공이 가져온 마물은 못된 심보의 발로 따위가 아니었다.
진심으로 내가 이 마물을 마음에 들어 할 것 같아서 이렇게 선물로 준비해 온 거였다.
“마음에…… 든다고 해야 할지…….”
“공녀가 일전에 마물 머리를 선물로 받고 기뻐했잖나?”
“그건 그랬죠…….”
“그래서 이번에는 머리가 아닌 온전한 놈으로 한번 구해 봤지.”
대공이 텅, 하며 자기 덩치보다 몇 배나 큰 마물의 목덜미를 툭툭 쳤다.
“혈액이나 뱀의 독은 마법사들이 환장하는 연구 재료고, 뿔은 가공해서 무구를 만드는 데 사용할 수도 있다더군.”
“그것 참…… 유용하네요…….”
“유용하지.”
뿌듯하게 웃어 보이는 대공의 얼굴에서는 노골적으로 칭찬을 바라는 기색마저 느껴졌다.
바로 그때였다.
경고! ‘비틀린 마류’를 감지합니다.
정화력을 사용하시겠습니까? Yes or No.
갑자기 나타난 시스템창에 나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속으로 외쳤다.
‘No!’
정화력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휴우,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때.
“……지금 제 누이를 모욕하시는 겁니까?”
이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칼릭스가 끼어들었다.
공격적인 어조에 대공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할 뿐이었다.
“모욕이라니. 누가?”
“마물 사체 따위를 누가 레이디에게 선물이랍시고 들이밀……”
“그만, 그만!”
나는 서둘러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여기서 이 둘이 싸우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칼릭스, 나는 대공 전하의 선물이 마음에 들어.”
마음에 없는 소리였다.
“이전에도 비슷한 선물을 받은 적이 있고…… 전혀 모욕이 아니니까 나서지 않아도 돼.”
“하지만!”
“그리고 대공 전하.”
나는 얼른 대공한테 시선을 돌렸다.
“일단 선물은 감사합니다. 이번에도 제 스승님께서 기뻐하실 것 같네요.”
“……스승님?”
내내 너그러운 기색으로 있던 대공이 미간을 설핏 찌푸렸다.
“?”
‘왜 그러지?’
고개를 갸우뚱하자, 대공의 얼굴에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표정이 떠올랐다.
“공녀, 지금 설마 내 선물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했다고 말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
그으게…… 그런 식으로 문제가 되나?
‘아니, 애초에 처음 건 선물도 아니었잖아.’
버려질 뻔한 마수 머리를 양도해 달라고 했을 뿐이고, 자긴 그 과정에서 포장지로 장난을 친 것뿐이면서 이제 와 선물이라니…….
‘뻔뻔함이 지나친 거 아닌가?’
……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는 법…….
“그…… 일전에 보내 주신 마물의 머리는 처분을 저에게 전적으로 일임하신 줄로 알고.”
“그야 나는 당연히 공녀가 사용하려는 줄로 알고 그랬지.”
“저는 아직 그럴 만한 수준이 안 돼서…….”
“아하.”
대공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그래서 내 선물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했고 이번에도 양도할 작정이라는 건가?”
말투만 놓고 보자면 서운하다는 투였지만, 정작 말하는 당사자의 얼굴은 즐거워 보였다.
‘놀리고 있는 거지, 지금 이거……?’
억지로 하하 웃고 있는 입가가 떨릴 지경이었다.
“제 실력이 모자란 관계로 어쩔 수 없이…….”
“서운한걸.”
“죄송합니다만, 대공 전하.”
갑자기 칼릭스가 날카롭게 끼어들었다.
“누님을 곤란하게 만드는 언행은 그쯤에서 삼가 주십시오.”
“호오…….”
보석처럼 반짝이는 붉은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나를 볼 때처럼 흥미 있어 한다기보다, 웬 귀찮은 돌부리가 잘 걸렸다는 투였다.
‘아, 이건 좋지 않은데.’
“저기……”
내가 조심스럽게 끼어들려던 바로 그 순간.
“칼릭스.”
“!”
고개를 들어 보니, 아버지가 계단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님을 문 앞에 세워 두다니, 보기 좋지 못하구나.”
“아버지, 이건……”
칼릭스는 뭐라고 변명하려 시도했지만, 아버지의 시선은 엄중하기만 했다.
결국, 칼릭스는 입술을 깨물며 다시금 말했다.
“……죄송합니다.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로엔 대공 전하.”
“사과를 받아들이도록 하지, 소공작.”
“…….”
조용히 이를 악무는 듯, 칼릭스의 뺨에 근육의 움직임이 도드라졌다.
“저, 공녀님, 이것은…….”
“그, 일단 상자를 닫아서 전처럼 어딘가에 가져다 놓도록 해.”
“아, 알겠습니다.”
“…….”
아버지는 마치 우리 뒤에 놓인 거대한 마물 사체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태연하게 이쪽으로 내려와 대공에게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대공 전하.”
“로잔헤이어 공.”
“방문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아버지는 지금까지 건방지게 군 칼릭스가 무색할 정도로 정중하게 대공을 맞이했다.
‘그나저나 나를 놀릴 생각으로 온 줄만 알았는데, 아버지하고도 할 얘기가 있었던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대공 쪽을 바라보자, 그가 슬쩍 미소를 흘려보냈다. 마치 지금 네가 하는 생각이 맞는다고 말하는 것처럼…….
“유리, 칼릭스.”
그때, 아버지가 우리 두 사람을 호명했다.
“아, 네. 아버지.”
“너희는 방으로 돌아가 있거라.”
“네…….”
대답하며 흘긋 칼릭스의 눈치를 보니, 무표정이지만 평소보다도 더 서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금 걸리면 잔소리가 두 배다.’
그렇게 판단한 나는 잽싸게 “그럼, 저는 이만.” 하고 인사를 올린 후 잽싸게 내 방으로 향했다.
계단을 올라가면서 살짝 뒤를 내려다보니, 아버지가 대공을 응접실로 안내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상하단 말이야.”
황태자를 언급할 때도 그랬고, 아버지는 딱히 황족이라고 해서 더 존경을 표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대공을 대하는 태도는 묘하게 깍듯한 데가 있었다.
‘뭐가 있나……?’
모른 척 고개를 돌리고 방으로 올라가면서, 나는 아버지의 유별난 태도를 유념해 두기로 했다.
* * *
방으로 돌아간 나는 생각에 잠겼다.
‘비틀린 마류라고 했지.’
두 번의 경험을 종합해 봤을 때, 아무래도 대공에게 일정 이상 접근하게 되면 정화 선택지가 발생하는 모양이었다.
‘비틀린 마류라는 건 대체 뭘까?’
아무리 혼자 생각해 봐도 답을 알 수 없었다.
혹시 엘리야에게 물어본다면 답을 알 수 있지 않을까?
혼자서 그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문을 가지런히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공녀님.”
집사였다.
“무슨 일이지, 집사?”
“공작 각하께서 공녀님을 찾으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혹시……?
“대공 전하께서는?”
“조금 전에 귀가하셨습니다.”
아, 돌아갔구나.
‘혹시 둘이서 마주쳤더라면 비틀린 마류에 대해 무슨 단서라도 캘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약간 아쉽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쫓아가서 대화를 나누고 싶을 정도까지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