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59/182)

9. 점입가경

“……~!”

화들짝.

소름이 끼치는 느낌에 단숨에 잠에서 깨어 벌떡 일어났다.

허억, 허억.

‘뭐, 뭐지?’

맹수의 혓바닥이 등허리를 주욱 핥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분명 들었는데!

“아…… 악몽이었나?”

평소대로의 잠자리를 살펴보며, 나는 아직도 소름 끼친 느낌이 남아 있는 몸을 양팔로 슥슥 쓸었다.

시계를 살펴보니 평소 기상하는 시간보다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음…… 하지만 다시 잠은 안 올 것 같고.”

침대만 봐도 아까 소름 끼쳤던 느낌이 절로 떠올라 눕고 싶지 않았다.

나는 끙 소리를 내며 침대에서 몸을 아예 일으켰다.

‘뭐 어쩔 수 없지…… 오늘은 일찍 일어나서 열심히 사는 수밖에…….’

아, 그나저나.

나는 얼른 상태창부터 켜 보았다.

정화력: 100/????(회복 완료)

음.

‘아마도 어제 기절하듯이 잠들었던 게 이 정화력이라는 게 바닥나서 그랬던 것 같은데…….’

그나저나 40에서 100이라니. 이 능력, 혹시 사용할수록 오르는 걸까……?

‘어쨌든 특별한 조건이 있는 게 아니라 자는 도중에 알아서 충전이 돼서 다행이다.’

내가 가슴을 쓸어내린 바로 그때였다.

“공녀님! 공녀님!”

어지간해서는 먼저 흥분하는 법이 없는 시녀가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무슨 일이지?”

“저, 그게.”

시녀는 몹시 긴장한 모습이었다.

“오늘 로엔 대공 전하께서 저택을 방문하신다고 합니다.”

“……뭐?”

잘못 들은 거겠지?

나는 헛된 기대를 품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다시 한번 말해 봐.”

“오늘 로엔 대공 전하께서 저택을 방문하신다고…….”

“…….”

하지만 현실은 내가 원하는 대로 왜곡되어 주지 않았다.

“어, 언제 오신다고 하던?”

“3시쯤에 오셔서 차를 대접받으실 예정이라고 하셨어요.”

3시, 3시라.

지금 당장 급하게 만들어 낼 수 있는 용건이라면 의상실의 공사 계획을 의논하러 로제타 부인에게 다녀오거나, 아니면…….

“……제 집은 팔그란츠 1가에 있습니다. 이후로 에스테반 후작가의 문은 상시 공녀를 위해 열려 있을 겁니다. 무슨 일이든, 찾아 주십시오.”

……세드릭의 집을 방문할 수도 있겠다.

‘좋아, 당장 외출 준비를…….’

준비를 서두르려는 바로 그때, 내 머릿속에 어제저녁의 기억이 잔상처럼 스쳐 지나갔다.

“공녀가 그렇게 피할수록 나는 더 다가가고 싶어져.”

맞다……. 그렇다……. 그렇다고 했다…….

“공녀님?”

완전히 좌절해서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나를 시녀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불렀다.

나는 나풀나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일단 오늘은 로제타 의상실에 먼저 다녀와야 할 것 같은데, 준비를 좀 도와주렴.”

“네, 알겠습니다.”

* * *

준비를 마치고 로제타 의상실에 간 나는, ‘최신 사교계 유행’이라는 명목을 들어 의상실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시공안을 최종적으로 확정했다.

“탁월한 결정을 하셨습니다.”

이시스 상단에서 나온 사람이 서류를 갈무리하며 웃었다. 그러더니 나를 향해서 손을 내미는 게 아닌가?

‘뭐지?’

제국에서는 여자에게 악수를 거의 청하지 않는다.

그것도 신분 차이가 나는 고위 귀족 여성에게 먼저 악수를 청하는 경우는 아예 없다고 봐도 좋았다.

황당하게 상단 직원이 내민 손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때 그가 검지손가락에 끼고 있는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잠깐, 반지?’

설마……?

나는 믿을 수 없는 심정으로, 돌다리나 두들겨 보자는 마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웃는 방식이 묘하게 익숙하다.

“……전하?”

“정답입니다.”

시원스럽게 인정한 그가 밝게 웃었다.

나는 주변을 휘 돌아보았다. 다행히 로제타 부인은 먼저 자리를 비웠고, 이 층에는 나와 그 둘뿐이었다.

“어째서 이런 짓을……!”

“공녀께서 아이디어를 주셨잖습니까?”

“제, 제가요?”

“네.”

생각해 보니 그렇긴 하지만…….

“마침 저도 언제까지 제 일을 대리인들에게만 맡겨 둘 수는 없겠다고 생각하던 차였습니다.”

“그래서 이런…….”

“네. 상단주 사무엘 발드의 대리인인 이안 해더윅입니다.”

똑같이 이안이라니, 너무 티 나게 구는 거 아냐? 싶었지만…….

나는 평범한 갈색 머리에, 단정하지만 묘하게 흐릿한 인상인 남자를 바라보며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래, 누가 고귀하신 제국 황태자께서 저런 껍질을 뒤집어쓰고 일개 상단주의 대리인 노릇을 하고 있다고 상상이나 할까?

“저와 달리 신분까지 새로 만드시고, 철저하시네요…….”

“아하하, 이왕 하는 김에 조금 손을 써 봤습니다.”

조금 손을 쓰면 없던 사람도 만들어 낼 수 있는 제국의 황태자 전하께서 상큼하게 웃어 보이셨다.

“자, 그럼.”

“?”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황태자가 기대에 가득 찬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이제 저를 이안이라고 불러 주시는 데 아무 문제가 없지요?”

“……네에?”

무슨 소리를 하려나 했더니, 그 말이었어?

“지금 저는 황태자가 아닌 상단주의 대리인 이안일 뿐이잖습니까.”

“아니 그럼……?”

이 사람 지금 나한테 이안이라고 불리고 싶어서 없던 신분까지 위조한 건가?

……에이 설마, 그 정도까지는 아니겠지.

‘착각하지 말자, 착각하지 말자.’

제 입으로 ‘언제까지 대리인들에게만 일을 맡겨 둘 수 없어서’라고 분명히 이유를 밝히지 않았는가?

‘하지만…….’

‘이안’이라고 부르기를 기대하고 있는 황태자의 웃음 섞인 눈빛을 보니…….

‘왠지 장난을 좀 치고 싶어지는걸.’

“알겠습니다, 해더윅 씨.”

“……네?”

황태자의 웃는 얼굴이 잠시 멈칫했다. 나는 킥킥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저는 오늘 해더윅 씨와는 처음 보는 사이인걸요. 벌써부터 이름을 막 부를 수는 없죠.”

“철저하시군요, 로잔헤이어의 공녀님께서는…….”

“허술해서야 쓰나요.”

하하 웃으며 대답하자, 황태자의 입가에도 어쩔 수 없다는 식의 미소가 번졌다.

“어쩔 수 없군요. 천천히 친분을 쌓는 수밖에.”

“해더윅 씨하고 제가요?”

“저희는 이제 같은 직장 동료지 않습니까?”

“아, 그러고 보니…….”

“네, 그래서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말인데…….”

“?”

황태자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내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신분 증명용 패였다.

“이건…….”

“제 것을 만드는 김에 공녀의 것도 한번 만들어 보았습니다.”

로잘린 시드니.

공교롭게도 내가 변장을 하고 다닐 때 대던 이름과 똑같은 이름이었다.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네요.”

“마음에 들지 모르겠다고요?”

나는 약간 말문이 막혀 신분 패를 이리저리 뒤집어 보며,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이건 제가 받아 본 선물 중에 최고의 선물이에요, 전…… 아니, 해더윅 씨.”

이것만 있으면 변장을 하고 다닐 때 조금 더 편하게 다닐 수 있는 건 물론, 온갖 필요한 계약도 이 이름으로 체결하여 유리 엘로즈와 철저하게 분리할 수도 있었다.

‘차명 계좌 최고.’

불순한 생각을 하며 행복하게 미소 짓는데, 황태자가 아쉽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끼어들었다.

“이런. 최고의 선물을 드렸는데도 저는 아직 해더윅 씨인 겁니까?”

능청스럽게 말하는 그 태도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좋아요, 알았어요.”

막상 부르려니 조금 쑥스러웠지만, 기쁜 마음이 쑥스러움을 이기고 미소를 짓게 했다.

“……고마워요, 이안. 정말 최고의 선물이에요.”

“…….”

그런데 반응이 좀 이상했다.

장난스럽게 웃으며 “성공했다”고 좋아할 줄 알았는데, 이안은 좋아하기는커녕 약간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았다.

‘막상 부르니까 좀 무엄하게 들렸나?’

“이안? 저 이 이름으로 계속 불러도 되는 거 맞아요?”

“아, 네, 네. 물론입니다. 다만…….”

“다만?”

고개를 갸웃하며 되묻자, 이안은 대답 대신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으며 중얼거렸다.

“좀…… 심장에 좋지 않은데, 이거…….”

“?”

무슨 맥락으로 하는 소린지 모르겠지만, 막상 들어 보니 무엄하다고 나를 벌할 분위기는 아니라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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