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오는 길에 명령이라도 하달했는지, 대공저의 저녁 식사는 매우 빠르게 준비되었다.
“쇨브른의 얼음 포도주야. 깊이 있는 단맛이 특징이지.”
“아, 네…….”
황송하게도 대공 전하께서 직접 따라 준 와인을 시작으로, 요리들이 서빙되기 시작했다.
단맛이 나는 와인에 어울리는 쌉싸름한 전채로 시작하는 코스였다.
요리는 대체로 맛있었지만, 앞에서 식사하는 대공과 눈이 자꾸 마주쳐서 맛을 즐길 만한 형편은 못 됐다.
깨작거리던 나를 보더니, 대공이 물었다.
“내 집의 요리가 맛이 없나?”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아니지만?”
“생각을 좀 하게 돼서요.”
“무슨 생각?”
“글쎄요.”
나는 포크를 내려놓고, 와인을 한 모금 머금었다.
희미한 두려움에 몸이 떨리려는 걸 술기운으로 극복하며, 나는 직설적으로 말했다.
“이를테면…… 전하께서 왜 제게 이렇게까지 잘해 주시는 걸까, 같은 생각?”
“그거야 당연히.”
대공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그대에게 사심이 있으니까.”
사심 운운하는 것치고는 퍽 담백한 어조였다.
“사심…… 그러시군요.”
“별로 놀라지는 않는군.”
“별로 믿기지 않아서요.”
“이런, 난 진심이었는데.”
애석하다는 듯 말해도 진담같이 들리지는 않았다.
‘사심은 무슨.’
1년 안에 반란을 저지를 생각인 사람이 무슨 정신이 있어서 사심 같은 거나 채우고 있을까?
‘다 거짓말이겠지.’
내게 뭔가 노리는 게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게 뭔지는 아직 모르지만 말이다.
‘그보다 지금 중요한 건.’
나는 흘깃, 옆쪽에 작게 띄워 둔 상태창을 눈으로 살폈다. 정확히는 맨 마지막 줄을 차지하고 있는 능력치를.
정화력: 40/????
히든 퀘스트를 깼을 당시, 시스템 메시지는 분명히 말했다.
‘카미엘의 영향으로 숨겨진 봉인이 풀렸다.’
그리고 각성 능력치인 정화력이 개방되었다.
하지만 정화력이 뭘 하는 능력인지는 아직까지 베일에 싸여 있었다.
애초에 이렇게 일찍 최종 보스가 등장한 것도, 히든 퀘스트도 다 원작에서는 없던 일이었다.
‘이 상황에서 유일한 단서는 카미엘, 바로 그 본인뿐이야.’
대체 내게 무슨 영향을 끼쳤길래 이런 정체를 알 수 없는 능력치가 개방된 걸까?
“전하, 혹시.”
오늘 나는 그걸 한번 캐 볼 생각이었다.
“음?”
“혹시 주변에…… 뭔가 오염된 거라도 있으신가요?”
“오염?”
대공이 고개를 갸웃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을 들었다는 투다.
“글쎄, 질문의 요지를 잘 모르겠는데.”
……음, 과연. 이런 식으로는 알아낼 수 없다는 건가?
“왜, 내게서 무슨 냄새라도 나나?”
“아뇨,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여쭤 본 거였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
“흐음…… 신경 쓰지 말라니까 더 신경을 쓰고 싶어지는걸.”
“하하…….”
성격 진짜 끝내준다.
대공이 의미 없이 상황을 무마하려고 웃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그다음은?”
“……네?”
“또 무언가 내게 궁금한 건 없나?”
“글쎄요.”
내가 궁금했던 건 그 두 가지가 다였고, 두 가지 다 딱히 이렇다 할 대답을 얻지 못했다.
“없는 것 같아요…… 지금은.”
“그래?”
“네.”
“아쉽군. 난 공녀가 나에 대해서 많이 궁금해해 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네?”
그런…… 하고 내가 말을 더듬자, 대공이 씩 웃으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말했잖나? 나는 공녀에게 사심이 있다고 말이야.”
“아…….”
아무래도 이 남자, 그 사심 콘셉트를 끝까지 밀고 갈 요량인 것 같았다.
“네, 네. 그렇다고 하셨죠.”
“진담인데 믿지 않는다니 억울한걸.”
흐음, 하고 남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일부러 그러는 게 분명한 행동이었다.
“아무래도 공녀에게 신뢰를 줄 때까지 내가 좀 더 노력해야 하려나?”
“네? 아니, 그건 별로 안 그러셔도…….”
“하지만 난 공녀에게 내 사심의 존재를 입증하고 싶은걸.”
“그…….”
어처구니가 없었다. 사심의 존재를 입증하고 싶다는 말 자체도 그랬지만, 대체 무슨 짓을 해서 그 말을 믿게 하겠다는 걸까?
‘차, 차라리 처음부터 믿는다고 할 걸 그랬다.’
“저기, 제가 잘 생각해 보니까 전하께서 하시는 말씀이 믿어지는 것도 같은……”
“거짓말.”
경고! 화술 능력치가 부족합니다.
……젠장, 이놈의 화술 능력치는 언제까지 부족할 셈이야?
“하나 충고해 주겠는데, 공녀.”
대공이 나이프로 스테이크를 썰면서 대답했다.
피처럼 보이는 붉은 육즙이 묻은 은제 나이프가 섬뜩하게 빛났다.
“공녀가 그렇게 피할수록 나는 더 다가가고 싶어져.”
“…….”
“남자들은 어리석게도 여자들보다 좀 더 승부욕에 취약한 경향이 있거든. 참고해 두는 게 좋을 거야.”
“……충고 감사합니다…….”
“뭘, 이 정도 가지고.”
그다음부터 음식 맛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어영부영 식사를 마치자, 대공이 제안했다.
“집까지 데려다줄게.”
“네? 굳이 그러실 필요는…….”
반사적으로 거절하려는데, 대공이 씩 웃으면서 내 쪽으로 허리를 숙였다.
……대책 없이 얼굴이 가까워졌다.
꿀꺽, 침을 삼키는 내게 그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공녀가 피할수록 나는 어떻게 된다고 했더라?”
“……데려다주신다니, 만세에 다시없을 영광이옵니다…….”
“하하, 그렇게까진 말 안 해도 되는데.”
그가 다시 산뜻하게 내게서 물러났다.
‘어라? 이 느낌…….’
그가 내게서 물러가는 순간, 숨 막히게 닥쳐왔던 뭔가가 다시 멀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뭔가…… 거대한 마류가 불안정하게 뒤엉켜 있는 것 같은…….’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게 아니라 제대로 인지하는 게 늦었다.
하지만 한번 인식하고 나니, 거대하게 꾸물거리는 듯한 불길한 기운이 좀 더 확실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찌나 불길하던지, 여태까지 이 남자를 피하고 싶었던 게 무의식의 발로였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틀림없어. 무의식적으로 이 불쾌한 기운을 느끼고 피하고 싶었던 게 분명해…….’
“공녀?”
“아, 아. 네.”
“그렇게 멍하니 있으면 계속 여기 있고 싶다는 뜻으로 착각할 거야.”
“그건 아니에요.”
“그렇게까지 즉답할 건 없는데.”
나 상처받았어, 하며 장난스럽게 가슴을 부여잡는 대공의 겉모습만큼은 평범한 사람처럼 보였지만…….
‘도저히 웃을 수가 없다.’
내가 느끼기에는 의중을 읽을 수 없는 거대한 육식 동물이 눈앞에서 재롱 비슷한 걸 피우는 모습을 목도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이걸 여태까지 몰랐지?’
스스로의 둔함에 찬탄을 보내고 싶을 지경이었다.
“자, 그럼.”
대공이 내 쪽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어깨를 흠칫 떨고 말았다.
“공녀?”
“아, 그게…….”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여기서 어색하게 행동할 수는 없었다.
귀신도 그렇고 살인마도 그렇고 정체를 눈치챘다는 걸 들키는 순간 본색을 드러내는 법.
나는 안 통할 게 뻔한 거짓말을 하는 대신 내 손을 그의 손에 올려놓았다.
바로 그때였다.
경고! ‘비틀린 마류’를 감지합니다.
정화력을 사용하시겠습니까? Yes or No.
……뭐?
나는 나도 모르게 얼결에 사용한다는 쪽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시스템 메시지가 동시다발적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정화력을 사용합니다.
현재 정화력 총량: 40
40만큼 정화를 시도합니다…….
‘!’
내 몸에서 무언가 밝은 아지랑이 같은 게 미약하게 피어올랐다.
그와 동시에 정체불명의 시커먼 기운이 대공을 뒤덮다시피 하고 있는 게 보였다.
그게 얼마나 무시무시하던지, 내가 피워 올린 미약한 기운은 기조차 펴지 못하고 다시 사그러들었다.
정화에 실패합니다.
“공녀?”
정화에 실패했다는 메시지와 함께, 다시 대공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대, 대공 전하.”
봤을까?
“아까부터 자꾸 멍하니 날 쳐다보는데,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그에게는 내 눈에 보였던 게 안 보인 모양이었다.
‘다, 다행…….’
뭔지도 모르면서 그가 보지 못했다는 사실에 나는 안도했다.
바로 그때. 대공의 눈썹이 설핏 일그러졌다.
“……잠깐.”
“!”
대공이 내 쪽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나는 어깨를 움츠렸지만, 대공은 필요 이상으로 내게 다가오는 대신 킁킁, 하고 냄새를 맡는 시늉을 했다.
그가 석연찮은 투로 중얼거렸다.
“방금…… 뭔가.”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공녀.”
“…….”
내게 대공의 화술 능력치를 볼 수 있는 능력은 없었지만, 알 수 있었다.
‘방금 그 말.’
거짓말이다.
* * *
이후로 대공은 나를 무사히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당연히 상태창부터 열어 보았다.
‘다른 능력치랑 칭호는 상관없어.’
나는 맨 아래 있는 정화력부터 살펴보았다.
‘!’
정화력: 0/???? (회복 중…….)
……바뀌었다!
40이었던 정화력이 0으로 바뀌어 있었다.
‘게다가 회복 중? 저건 또 뭐야?’
나는 아까 대공 앞에서 보았던 시스템 메시지를 복기해 보았다.
‘정화력을 사용한다고 했지.’
아무래도 정화력이라는 건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 같은 거고, 사용하고 난 다음엔 일정 시간을 두고 회복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대체 뭘?’
나는 대공을 둘러싸고 있던 어두컴컴하고, 근원을 알 수 없으리만치 깊게 뒤틀려 있던 기운을 떠올렸다.
시스템 메시지는 그걸 두고 ‘비틀린 마류’라고 표현했다.
‘즉, 정리하자면.’
대공 주변의 비틀린 마류를 내 정화력을 사용해서 정화를 시도할 수 있다는 뜻인…… 거지?
‘……대체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 거야?’
가능한 한 대공과 엮이고 싶지 않은 입장에서는 난감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감이 온다.’
이 능력은 들키면 안 된다. 그런 예감이 강력하게 들었다.
“아, 잠깐. 머리가…….”
그때, 갑작스럽게 참을 수 없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뭐지? 갑자기 엄청…….’
……졸려.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나는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