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6/182)

51화

“카시스 제국의 신민으로서 제가 전하께 어찌.”

“그렇게 예의를 따지지 않으셔도 됩니다. 공녀도 그런 격식에 구애받지 않는 분이시잖습니까?”

……이거 지금 내가 기품 능력치 모자란다고 돌려 까는 거 맞지?

“여기서 저는 상단주 이안으로서만 존재하고 싶습니다.”

“아니 그래도…….”

“명령이라고 말한다면 들어주실 건가요?”

“……그렇게까지 하신다면야 그래야겠죠?”

그런데 꼭 그렇게까지 해서 나한테 반말지거리를 들어야 할까……?

“자, 그럼 명령할게요.”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좀 무섭다.

“이안이라고 불러 주세요.”

“……이안…….”

진짜배기 제국민도 아닌데, 어쩐지 정말 못 할 짓을 저지르는 느낌이었다.

“……상단주님.”

황급히 다른 직함이라도 가져다 붙이자, 황태자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흐음.” 소리를 냈다.

“뭐, 오늘은 이쯤에서 만족하도록 할까요.”

“그러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큼, 큼. 나는 헛기침을 하며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왠지 더 있다가는 더 곤란한 짓도 시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벌써요?”

“다른 볼일도 있어서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의상실에 가 볼 생각이었으니까.

“여기까지 오는데 호위는?”

“그야 당연히 안 데려왔죠.”

내가 여기 호위를 달고 온 건 첫날뿐이다. 그다음부터는 혹시나 이시스 상단과 나, 황태자의 연결 고리를 들킬까 봐 혼자서 다녔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당당하게 어깨를 펴자 황태자가 곤란한 듯 웃었다.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조심해서 돌아갈 수 있겠어요?”

나는 손을 들어 반지를 보여 주었다.

“반지도 끼고 있고, 몬테나 지구는 기사단이 순찰을 하는 만큼 치안이 좋아서 상관없어요.”

“그래도.”

황태자는 조금 고민하는 듯하더니, 서랍을 열어 무언가를 꺼냈다.

“뭔가요?”

“이 방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는 텔레포트 스크롤이에요.”

혹시나 위험할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말하며 황태자가 스크롤을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주는 걸 거절하는 건 또 아니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조심해서 돌아가도록 해요.”

꼭 불길한 예언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 * *

상단을 나와 거리를 걸었다.

수도 중심지가 대부분 그렇듯이, 돌을 깔아 길을 다듬어 만들고 가로등에 가로수까지 심은 길은 걷기 편한 데다 아름다웠다.

오후 3시쯤의 나른한 황금빛 햇살을 즐기며, 느긋하게 걷고 있는데…….

“……?”

이상하게 뒷골이 서늘했다.

‘뭐지, 무슨 일이라도 생길 것 같은 이 느낌은……?’

주변을 둘러보니 거리에 묘하게 사람이 없었다.

인적이 드물어진 길에는 날 빼면 뒤쪽에서 느린 속도로 다각거리며 다가오는 마차 소리뿐이었다.

‘……가만, 마차?’

고개를 돌려 보니 마차가 천천히 내 옆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흑마 여섯 마리가 끌고 있는 거대한 흑색 마차였다.

외장을 전부 새카만 순흑색으로 치장한 덕분에 그 위에 새긴 가문의 문장조차 잘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주변에 까마귀 몇 마리만 날아다니면 저승사자의 마차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그런데…….

‘원래 마차라는 게 이렇게 느리게 달리는 거였나……?’

멍하니 생각한 바로 그 순간.

“!”

갑자기 마차 문이 내 쪽을 향해 덜컥 열렸다.

깜짝 놀라 인도 안쪽으로 피하려 했지만, 그보다 마차에서 뻗어 나온 팔이 내 손목을 붙드는 게 더 빨랐다.

“잠깐……!”

주머니에 든 스크롤을 찢을 새도 없었다. 나는 몸을 당기는 인간 같지 않은 힘에 속수무책으로 끌려 마차 안으로 빨려 들어가다시피 안착하고 말았다.

콱.

“윽……!”

어딘가 알 수 없는 곳에 전력으로 얼굴을 들이받는 바람에, 코가 그대로 짜부라지는 느낌이었다.

황급히 고개를 쳐들었다. 내가 얼굴을 들이받은 곳은 웬 남자의 가슴팍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에 새삼 충격을 받고 있을 틈은 없었다.

나는 잽싸게 아직 반쯤 열려 있는 마차 문으로 탈출을 시도하려 했으나, 남자가 홱 하고 내 허리를 낚아채는 게 더 빨랐다.

눈앞에서 문이 닫혔다. 나는 몸부림을 치며 손을 뻗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거, 놔……!”

“쉿.”

몸부림을 쳐도 꿈쩍하지 않는 강철 같은 팔에 허리를 붙잡힌 채로, 나는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익숙한 목소리다.’

대공의 목소리였다.

“말을 잘 듣네, 공녀.”

어르는 듯한 목소리가 뒷목을 문지르는 느낌이었다.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어떻게 저인 걸……?”

“대강 아는 방법이 있지.”

대공이 어깨를 으쓱했다. 자세한 설명을 해 줄 태세는 아니었다.

‘그래, 뭐…….’

이 반지를 낀 상태에서 나인 걸 들킨 게 처음은 아니지.

세드릭도 그러지 않았던가? 걷는 모습만 봐도 대강 알 수 있다고.

지금 중요한 건 남주들의 그런 이상한 초능력 따위가 아니었다.

“그럼 대체 왜 저를 여기에……?”

이유를 묻는 내게 그가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톡톡, 하고 마차 창문의 유리를 쳤다.

시선을 유도하는 동작을 따라 반쯤 커튼을 친 틈새로 내다보니, 거리에서 척 봐도 수상한 두 남자가 황망하게 멀어지는 마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눈치 못 챘나? 한참 전부터 공녀 뒤에 따라붙어 있었는데.”

“전혀요.”

대체 왜 나를?

‘평범한 인신 매매범인가?’

“평범한 인신 매매범은 아닐 거야.”

대공이 내 속을 읽은 것처럼 대꾸했다.

“그럼 대체……?”

“공녀가 경매장에서 직접 용의 피를 낙찰받았잖아.”

“그땐……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는데요.”

“그랬겠지. 다만 아마 내 생각엔…….”

대공이 비스듬히 웃으며 내 왼손을 들어 올렸다.

“그때도 지금과 똑같은 반지를 끼고 있었을 것 같은데.”

“…….”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정곡을 찔렸다.

“정답이었나? 뭐, 고맙다는 말은 안 해도 돼. 내가 공녀를 구한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말이야.”

대공이 생색을 내며 키득키득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가 등허리를 통해 전해졌다.

나는 그제야 내가 그에게 거의 안겨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저, 일단 좀 놔주세요.”

“아, 그러게.”

입으로는 너스레를 떨면서, 그가 깔끔하게 내 허리를 놔 주었다.

나는 잽싸게 몸을 움직여 맞은편 의자로 자리를 이동했다. 그리고 손가락에서 얼른 반지를 뺐다.

대공은 그런 내 모습을 빙글빙글 웃으며 지켜보고 있었다.

‘시선이 부담스러워…….’

나는 일단 화제도 돌릴 겸 이렇게 말했다.

“그…… 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대공 전하.”

“그래? 고마워?”

“네? 그야 당연히…….”

“흐음.”

대공이 턱을 괴고 이쪽을 빤히 바라보았다. 붉은 눈동자가 어두운 마차 안에서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였다.

“말로만 하는 감사 인사라 그런가, 정말로 고마워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는데.”

“네?”

아니, 이건 또 무슨 시비야?

바로 그때였다.

‘미니 이벤트: 진심 어린 감사’에 진입합니다!

10분 이내에 카미엘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전달하는 데 성공하면, 시간 내에 집으로 귀가할 수 있습니다.

‘뭐라고?’

하지만 시스템 메시지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실패할 시, 이대로 대공저를 방문하게 됩니다.

‘뭐어어어어!’

이 말도 안 되는 페널티는 대체 뭐람!

“응? 공녀, 어떻게 할 건가?”

대공저는 안 돼. 대공저는 안 돼.

“저, 정말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는데요.”

“그러니까 난 그걸 잘 모르겠다니까.”

‘이런 미친놈.’

욕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지만 참아야만 했다.

“제가 대체 어떻게 해야 이 감사하는 마음이 제대로 전해질지…….”

“글쎄, 방법은 내가 아니라 공녀가 고민해 봐야 하는 거 아닐까?”

대공은 완전히 나를 놀리는 데 맛을 들인 모양이었다.

요사스러울 정도로 잘생긴 낯짝이 까 놓은 달걀처럼 빤들빤들 빛이 났다.

‘얄미운 인간 같으니…….’

나는 억지웃음을 가득 머금으며 말했다.

“어떻게, 여기서 무릎이라도 꿇을까요?”

“무릎은 진심 없이도 접을 수 있어, 공녀.”

“그럼 제가 감사의 키스라도 해 드려야 하나요?”

“나야 괜찮지만, 본인이 정말 할 수 있는 걸 입에 올리는 게 좋지 않을까?”

“…….”

따박따박 돌아오는 대답이 반박할 수 없으리만치 정확했다.

결국, 그런 식으로 의미 없는 문답만 주고받다가…….

제한 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제한 시간이 끝나 버렸다.

좌절하는 내게 대공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뭐, 됐어, 공녀. 공녀가 내게 진심으로 감사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는 거지.”

카미엘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전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별로 감사하지 않아도 말이야, 자기를 구해 준 사람과 밥 한 끼 정도는 같이 먹을 수 있겠지?”

대공저를 방문하게 됩니다.

시스템 메시지의 판결에도 불구, 나는 최후의 발악을 시도했다.

“저를 이대로 저택으로 데려가시면, 보셨다시피 절 미행하던 사람들 때문에 골치 아파지실지도 모르는데요.”

“아, 그건 걱정하지 마. 그치들은 아까 내 선에서 잘 처리했으니까.”

“네?”

뭘 어떻게……라고는 묻지 않는 게 현명한 행동이겠지.

‘……울고 싶은 기분이다.’

* * *

내 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마차는 금세 대공저에 도착했다.

“내 집에 온 걸 환영해, 공녀.”

먼저 마차에서 내린 대공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내리고 싶은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었지만 별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뭘.”

도움을 받아 마차에서 내리면서, 나는 생각했다.

‘이 사람은 1년 안에 반란을 일으킬 사람이지만…….’

그런 만큼 기한 전에는 얌전히 지내려고 하겠지.

‘그러니까 오늘 죽을 일은 없음.’

최소한의 안전은 보장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어차피 여기까지 온 김에, 그동안 궁금했던 걸 좀 캐내 볼까……?’

흘긋, 나는 나를 제 집 안으로 인도하는 남자를 곁눈으로 훔쳐보았다.

“…….”

내 시선이 닿자마자, 붉은 눈동자가 귀신같이 이쪽을 흘긋 내려다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제3의 눈이라도 달렸나……?’

소름 끼칠 정도로 감이 좋은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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