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5/182)

50화

* * *

새벽같이 엘리야와 마탑에 다녀온 일은, 원래 내 기상 시간이 11시인 덕분에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게으르게 살아서 다행이야.’

하지만 잠은 좀 많이 잘지라도, 깨어난 이상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낼 순 없었다.

‘오늘은 이시스 상단에도 들러야 하고, 의상실에도 가 봐야 해…….’

운동을 하면 몸이 근육통을 겪듯이, 과다 수련 덕에 정신이 근육통을 겪는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다행히 잠깐 쉬고 나니 움직일 만은 했다.

‘자, 그럼.’

움직여 볼까?

“이것이 오늘 오전 중에 들어온 주문서입니다.”

쿵, 하고 황태자가 묵직한 종이 뭉치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세상에!”

대강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주문이 많이 들어올 줄이야!

나는 눈을 반짝이며 종이 뭉치에 달려들었다.

“이게 대체 다 몇 장이야……?”

“총 32건입니다. 홀 내부에 유리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주문서로만요.”

“전하, 제가 일러 드린 대로 하셨죠?”

“네.”

황태자가 싱긋, 웃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상쾌하다기보다 어딘지 모르게 포식 동물 같은 인상을 남겼다.

“공녀께서 조언해 주신 대로, 기존 고객이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고 싶은 신규 고객을 소개해 줄 경우, 설치비를 할인해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오늘 자 사교계 소식지에 엘리베이터 기사가 실렸으니까, 무도회에 오지 않은 고객이 찾아오는 것도 시간문제예요.”

나는 유리 엘리베이터와 거기서 등장하는 나와 황태자의 삽화가 실린 사교계 소식지를 읽어 내려갔다.

‘더없이 참신하고, 흥미로운 등장 방식…… 사교계의 새로운 유행이 될 조짐…….’

미리 지시한 대로 쓰여 있는 기사를 보며, 나는 흐뭇하게 웃었다.

황태자도 만족스럽게 중얼거렸다.

“사무엘도 그러더군요. 공녀의 수완이 보통이 아니라고요.”

“다 전하께서 개발하신 물건이 좋았던 덕이죠. 제가 뭘요.”

“…….”

황태자가 가만히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말했다.

“공녀의 의상실만 해도 요즘 제법 호황을 누리고 있는 것 같던데요.”

“……절반 정도만 제 것이지만요.”

“아무튼.”

황태자가 즐거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보다 보니 문득 궁금해지더군요. 공작저에서 두문불출하시던 공녀께서 어떻게 그런 인재를 발굴하셨는지.”

……차마 당신 덕분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나는 그냥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탐을 내셔도 안 돼요. 로제타 부인은 이미 저랑 계약을 했거든요.”

“하하하.”

황태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제가 탐욕스러운 사람이기는 합니다만.”

“…….”

“하지만 제가 탐내는 건 공녀의 디자이너가 아닙니다.”

잘못 짚었다는 말이었다.

“그 말씀은……?”

“나는, 유리 엘로즈 공녀.”

부드러운 목소리, 내 눈동자를 추격하듯 따라붙는 금빛 시선.

“당신이 탐이 납니다.”

“네?”

황태자가 빙긋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참고로 매우 진심입니다.”

“그…….”

순간적으로 침이 꿀꺽 넘어갔다. 어깨가 굳었다.

‘지, 진정해.’

황태자는 지금 다른 의미로 얘기하고 있는 게 아니다.

‘인재 수집벽이 있는 사람이니까.’

나는 살짝 헛기침을 하고, 되도록 태연하게 맞받아쳤다.

“제가 좀 고급 인력이기는 하죠.”

“……뭐, 그런 의미에서도 탐이 나긴 합니다만.”

“네?”

“동의한다는 말이었어요.”

나는 잠시 생글생글 웃는 황태자의 낯짝을 의심스럽게 바라보았지만, 별다른 수확을 얻지는 못했다.

황태자가 부드럽게 나를 불렀다.

“공녀.”

“네?”

“말이 나온 김에 정식으로 제안하는데…….”

“?”

“저와 동업을 해 보실 생각은 없습니까?”

네?

‘히든 에피소드: 황태자의 동업자’로 진입합니다!

여기서 갑자기 히든 에피소드가?

“동업……이요?”

“네, 동업.”

황태자가 느긋하게 등을 소파에 묻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녀는 내게 상업적 재능이 뛰어나다고 말했지만, 내가 생각하기엔 공녀야말로 그 말이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봅니다.”

“그건…….”

“일국의 황태자를 판촉 홍보물로 사용한다는 생각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지금이라도 무례를 사과드려야 할까요?”

황태자가 하하,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와서 설마 그렇게 재미없는 짓을 할까요?”

“베풀어 주신 아량이 하해와 같아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겉으로는 태연하게 대답하면서도 나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동업? 동업이라고?’

그런 내 당혹스러움을 눈치챘는지, 황태자가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동업이라고 해서 너무 부담스럽게 받아들이지 않으셔도 됩니다. 공녀께 무리가 갈 정도로 과한 부탁을 드리려는 건 아니니까요.”

“…….”

“저는 다만 골칫덩어리 이동기를 팔아 치운 공녀의 혜안을 빌리고 싶을 뿐입니다.”

‘즉.’

동업자라고 해서 상단의 공동 경영자까지는 아니고, 고문 정도의 역할을 바란다는 뜻인 것 같았다.

‘……나쁘지 않은 제안인 것 같은데?’

어차피 나도 계속 돈을 모을 방법을 고민하고 있던 차다.

하지만 내가 황태자처럼 몰래 상단을 꾸리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거다.

‘믿을 만하고 능력 있는 대리인을 구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니까.’

하지만 황태자의 상단인 이시스 상단과 손을 잡고, 사업 아이템을 공유한다면?

‘번거로운 일을 덜고 내가 생각하는 아이디어를 빠르게 구현할 수 있겠지.’

나는 이시스 상단의 인프라를, 황태자는 내 아이템을 공유하는 사이가 되는 셈이다.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기회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좋아.’

나는 결정했다. 황태자의 동업자가 되기로.

“……저를 동업자로 맞아들이고 싶다는 태자 전하의 제안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했어요.”

결정했다면, 남은 것은 이제 하나뿐이다.

“하지만 제 몸값은 결코 싸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괜찮으실까요?”

……가격 흥정만 하면 된다.

“과연, 공녀에게 황태자는 판촉 홍보물에, 자기 자신은 매대에 올린 상품인 거로군요.”

“아무하고나 거래하는 상품은 아니랍니다.”

나는 손을 깍지 껴 보이며 자신 있게 눈을 빛냈다.

황태자 쪽에서 내가 탐난다고 먼저 실토한 이상, 이 거래의 키는 내게 주어져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한 달에 500골드……”

“분기에 3000골드. 어떻습니까?”

“……네?”

500골드면 평민 4인 가정이 두 달을 넉넉히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하지만 분기에 3000골드라면.’

내가 부른 값의 두 배를 쳐준 셈이었다.

순간적으로 이런 생각이 스쳤다.

‘……더 부를 걸 그랬나?’

아니, 아니다. 그럴 수는 없었다.

황태자와 나는 단순히 거래 관계로만 묶인 사이가 아니었다.

거의 잊을 뻔했지만 황태자는 내 공략 대상이고, 나는 그의 호감도를 지속적으로 올려야 했다.

‘그런 와중에 터무니없이 높은 금액을 불렀다가 돈값을 못 하게 되면.’

호감도가 깎여 나가는 상황도 각오해야 할 것이다.

“제가 부른 값의 두 배를 쳐주셨네요.”

“공녀에겐 그만한 가치가 있으니까요.”

“만약 아니라면요?”

“그때는 상인으로서 제가 사람을 잘못 본 대가를 치러야겠지요.”

그럴 리는 없겠지만 설사 일이 잘못돼도 내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좋아, 이 정도면.’

만족할 만한 계약 조건이었지만…….

“몇 가지 더 합의하고 싶은 사항이 있어요.”

“뭡니까?”

“우선 3000골드는 온전히 제가 전하의 일에 조언을 드리는 값으로 받는 금액이에요.”

황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외에 제가 어떤 아이템이나 아이디어를 제시하게 된다면, 그 건에 대해서는 개별적으로 계약을 체결하고 수익을 나눴으면 좋겠어요.”

“그야 어렵지 않습니다. 공녀의 사업안이라면 무척 기대가 되기도 하고요.”

“그렇다면…… 저도 기꺼운 마음으로 전하의 동업자가 되겠습니다.”

“…….”

황태자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황태자의 동업자’가 되었습니다.

‘황태자의 동업자’ 칭호를 얻습니다.

칭호의 효과: 지력 +30, 화술 +30. 매월 1000골드의 수입이 발생합니다.

‘매월 1000골드의 수입 발생.’

지금까지 봤던 칭호의 효과 중에 가장 아름다운 말이 아닐까 싶었다.

이번에는 황태자가 먼저 내 쪽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나는 당연히 악수겠거니 하고 황태자의 손을 맞잡았다.

그런데 황태자가 순식간에 내 손을 끌어당기더니…….

“……!”

그대로 손등에 입을 맞추는 게 아닌가?

계약을 체결한 기념이라고 보기에도 이상했고, 레이디에 대한 예라고 보기에도 지나치게 친밀했다.

손등 위에서 황태자가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공녀.”

“네, 전하?”

그가 손을 놓아주며 말했다.

“아무래도 여기서까지 태자 전하라고 부르시니까 이상해서 말입니다.”

“?”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일평생 태자 전하라고 불리지 않으셨나요?”

지당하게 반박하는 내게, 황태자가 능청스럽게 웃으며 “여기는 상단이고, 지금 전 일개 상단주이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다.

“전하께서 일개 상단주…….”

“게다가 제가 상단주라는 건 극비 중의 극비인데, 계속 태자 전하라고 부르시는 건 좀.”

“그럼 여기 오시기 전에 저처럼 폴리모프 마법이 걸린 반지라도 끼고 오셨어야 하는 게 아닌지……?”

“안 그래도 생각은 하고 있었습니다. 공녀하고 이런 식으로 만날 수 있는 장소는 여기뿐이니까요.”

“…….”

황태자 입장에서는 분명 별 뜻 없는 말일 텐데, 조금 낯간지럽게 들렸다.

“아무튼 그래서.”

“네?”

“슬슬 저를 이안이라고 불러 주시지 않겠습니까?”

“……네에?”

이게 무슨 다람쥐 도토리 까먹다 배탈 나는 소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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