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 (54/182)

49화

오늘에서야 깨달은 사실인데, 이 남자는 나를 괴롭힐 때만 저렇게 달콤한 낯짝을 했다.

“아무래도 자연 발생하는 마류 정도로는 당신의 마나 회로에 기별도 안 가는 모양이니, 이제부터는 제가 마류 역할을 하겠습니다.”

“네?”

뭐가 어쩌고 어째요?

“경, 지금 경이 활성화한 마류만으로도 벅차고 부담스러운데…….”

비유하자면 폭풍우가 몰아치는 해변에서 사금을 채취하기 위해 애쓰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내 비유를 들은 엘리야가 애처롭고 하찮은 것을 보듯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아야.”

따콩, 하고 내 이마를 아프지 않게 튕겼다.

“폭풍우가 몰아치는데 사금을 주우려고 하는 게 문제입니다.”

“아니 그럼 대체 어떻게……”

“사금 따위가 아니라 폭풍우의 주인이 될 생각을 해야죠.”

“…….”

비유였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 거센 마류의 흐름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라는 말 아냐?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터졌다.

“경, 저 터져 죽을지도 몰라요.”

엘리야가 매정하게 코웃음을 쳤다.

“멍청한 게 귀여운 것도 정도껏 해야 하는 법입니다.”

“아니……”

“제가 분명히 말했잖습니까? 당신의 그릇은 그 정도로 깨지지 않는다고.”

“…….”

“내기하도록 할까요? 당신이 터져 죽는지, 아니면 내 말대로 마나의 주인이 될 수 있을는지.”

“……제가 이기려면 터져 죽어야 한다는 말인가요?”

“이기지 못할 거란 뜻이었답니다, 멍청한 제자님.”

그렇게 말하면서도 엘리야의 얼굴에 처음과 같이 멸시하는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이 상황을 조금 즐거워하고 있는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저런 성격 나쁜 천재가 답답한 범재를 붙들고 즐거워할 리가.’

“자, 그럼.”

엘리야가 여상한 태도로 나를 향해 팔을 벌려 보였다.

“……?”

무슨 뜻인지 몰라 내가 멀뚱히 서 있자, 엘리야가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이리 오라는 제스처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죠?”

“저요?”

“그럼 당신 아니고 누가 있습니까?”

그러면서 엘리야가 설명하기를, 자신이 만든 마류의 흐름을 안전하게 받아들이려면 범위 안에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별수 있나? 나는 주춤주춤하면서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좀 더.”

“좀 더요?”

이거 너무 거리가 가까워지는 거 아닌가?

하지만 그 사실이 당혹스러운 건 나 혼자뿐인 듯했다.

엘리야는 전혀 사심 따위 없는 무감한 얼굴로 “빨리.” 하고 재촉할 뿐이었다.

‘그래, 뭐. 어차피 겪어야 할 일이라면 빨리 해치워 버리자.’

장차 페르가나 아카데미의 마법 교수가 되려는 목표가 그저 원대한 망상에서 그치지 않으려면, 거쳐야 할 과정이리라.

‘진도가 비상식적으로 빠른 것 같다는 의심이 사라진 건 아니지만…….’

느린 것보다는 빠른 게 낫겠지. 배드 엔딩 시점에서 교수가 되려면, 마나 능력치가 적어도 900은 넘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었으니까.

나는 포기하고 엘리야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어느 정도냐면 팔만 뻗으면 포옹할 수도 있을 정도로, 상대의 체열이 엷게 느껴질 정도로 거리를 좁히자…….

“뒤돌아서서.”

엘리야가 내 몸을 돌려세웠다. 그리고 양편에서 자기 팔을 뻗어 내게 손바닥을 보여 주는 자세를 취했다.

……접촉만 안 했다 뿐이지, 거의 뒤에서 나를 안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인 자세였다.

‘의식하지 말자. 의식하지 말자.’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히는데, 뒤에 서 있는 엘리야가 내 쪽을 향해 고개를 약간 숙이는 게 느껴졌다.

“……시작하겠습니다.”

“!”

귓가에 직접적으로 진동이 닿아 어깨를 움찔한 순간.

솨아아아아-.

엘리야의 양 손바닥에서 솟구친 기운이 소용돌이처럼 우리를 감싸기 시작했다.

포플러나무를 뒤흔드는 바람 같았던 흐름이 조금씩 점층적으로 강도를 더해 가기 시작하더니.

‘윽…….’

어느새 피부에 저릿저릿하게 소름이 돋을 정도로 거센 흐름이 되어 있었다.

“경, 이건……”

“쉿, 조용히.”

마치 찻잔 안을 스푼으로 거세게 휘젓는 것처럼, 거센 마류의 흐름이 우리를 뱀의 똬리처럼 감싸고 소용돌이쳤다.

‘태, 태풍의 눈이 된 것 같아.’

엘리야에게 반쯤 안겨 있단 사실도 거의 잊어버린 채, 나는 새하얗게 질려 말을 잊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내게 엘리야가 다시 한번 속삭였다.

“정신 차려요.”

“하, 하지만…….”

“할 수 있습니다. 가르쳐 드린 대로, 마류를 받아들여 심장에 고리 형태로 순환시키면 됩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엘리야의 말대로 시도하기 시작했다.

할 수 있다는 말을 믿었다기보다, 내가 실패하거나 성공하지 않으면 이 흐름을 멈출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숨을 크게 들이쉰다고 생각해요.”

눈을 감고, 나는 엘리야의 어드바이스를 따라 마류를 받아들였다.

내가 찔끔 열어 준 틈을 따라 마류가 거침없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우, 우왁.’

내가 조금 열어 준 틈을 비집고, 마류가 점점 거세게 스며들어 오기 시작했다.

“저, 저기 경.”

“조용히. 조심해서 하고 있으니까…… 가만히 있어요.”

“아, 안전한 거 맞죠?”

귓가에서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렸다. 엘리야가 농담조로 중얼거렸다.

“대체로?”

그 말에 불평을 할 틈은 없었다.

엘리야가 정말 본격적으로 마나를 쏟아붓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으윽.’

나는 자꾸 경직하려는 몸의 힘을 풀고, 정신없이 마나를 몸 안에서 순환시키는 작업에 집중했다.

“잘하고 있어요. 그대로.”

언뜻 칭찬이 들린 것도 같았지만, 다른 외부 자극에 귀를 기울일 여력이 없어서 제대로 들리진 않았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몸 안에 폭풍을 받아들이는 것만 같았다.

‘모, 몸이 터져 버릴 것 같아.’

도저히 못 견디겠다 싶어 눈을 질끈 감은 순간.

“잘했어요.”

나보다도 내 한계를 먼저 눈치챈 것처럼, 거짓말처럼 흐름이 가라앉았다.

“푸, 푸하.”

2서클을 달성합니다!

마나가 80 오릅니다.

‘8, 80.’

기쁘다는 감정보다도 앞서 저걸 내 몸에 때려 박은 과정이 생각나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엘리야가 내 팔을 잡아 주지 않았더라면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고 말았을 것이다.

“이게…… 이게 대체 무슨……!”

“잘해 놓고서 왜 그럽니까?”

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잖아!

홱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보았지만, 엘리야는 태평하게 “됐잖습니까, 2서클.”이라고 지껄일 뿐이었다.

“다신…… 다신 못 해…… 죽어도…….”

“네, 네. 알겠습니다.”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엘리야가 나를 의자에 앉혔다.

나는 양손에 얼굴을 묻고 한숨을 내쉬었다.

천천히 진정이 되기 시작했다.

슬그머니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정말 성공했나?’

나는 천천히 심장을 두른 마나를 탐색해 보았다.

‘……진짜 됐네.’

아까까지만 해도 분명 한 줄, 그것도 아주 엷게 둘러 있던 마나의 고리가 두 개로 늘어났을 뿐 아니라 전보다 훨씬 더 튼튼해져 있었다.

내가 천천히 고개를 들자, 엘리야가 빙글거리면서 얄밉게 물었다.

“할 만했죠?”

“이런 씨…….”

“스승님한테 건방지게 굴라고 가르친 적은 없는데.”

“물론 그러시겠죠…….”

마른세수를 하고 나니 정신이 조금 드는 느낌이었다.

“다 쉬었으면 일어나요.”

하지만 엘리야는 그걸로 나를 봐줄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뭘 또 하시게요?”

“?”

엘리야가 이건 또 무슨 멍청한 질문일까, 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마법 안 배울 겁니까?”

“아차.”

* * *

분명 나보다 열 배는 힘을 썼을 것 같은 엘리야는, 멀쩡한 얼굴로 내게 해독 마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반면 기력을 다 소진한 나는…….

상태 이상: 탈진에 빠집니다.

지력, 화술, 기품, 정신력 수치가 일시적으로 하락합니다.

이런 상태로 마법을 배우니.

경고! ‘지력’ 능력치가 부족합니다.

마법진을 그리는 연습을 하면서 계속 실수를 연발할 수밖에 없었다.

정신 못 차리냐, 해독 마법이 아니라 중독 마법에 걸려 죽고 싶냐, 살고 싶으면 멍청하게 굴지 말라는 둥 머리꼭지로 온갖 폭언이 쏟아졌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인세의 규격을 벗어난 천재인데, 내가 좀 버러지로 보일 수도 있고 그런 거지.’

나는 심지어 당당한 태도로 이렇게 주장했다.

내 그릇은 이거다. 너무 한 번에 모든 걸 떠먹이려고 하지 마라. 이러다 나 배탈 난다.

당당한 주장에 엘리야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머리를 싸쥐었지만, 곧 “그래요…… 무지렁이에겐 무지렁이의 사정이 있는 법이죠.”라고 중얼거리며 나를 공작저로 데려다주었다.

“집이다아아아.”

풀썩, 침대 위로 가라앉는 나를 보며 엘리야가 기가 막힌다는 듯 중얼거렸다.

“사내를 앞에 두고 침대에 펄썩펄썩 드러누워도 됩니까? 대귀족께서.”

나는 침대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웅얼거렸다.

“이것 가지고 뭘요. 경께서는 아까 절 반쯤 끌어안다시피 하셨잖아요.”

“…….”

흘긋 눈을 들어 바라보니, 엘리야가 팔짱을 낀 채로 석상이 되어 있었다.

“……왜 그래요, 경?”

그게 그런 뜻이었겠냐고 비꼬거나 받아칠 줄 알았는데, 뜻밖의 반응이었다.

“그…….”

열릴 듯 말 듯 벙긋거리던 입술이 다물렸다. 목부터 타고 올라온 붉은 기운이 삽시간에 귀를 붉게 물들였다.

“그건 그런 게…… 젠장.”

엘리야가 손에 얼굴을 묻으면서 욕설을 내뱉었다. 그 반응에 이쪽도 조금 민망해졌다.

민망해진 감정을 무마하기 위해, 나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경, 진정해요. 별 뜻 없었다는 건 저도 알아요.”

“…….”

“농담이었어요. 네?”

오해하지 않는다고 해 줬는데도 엘리야는 어째 더 심하게 좌절한 것 같았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엇.”

그러더니 휭, 하고 바람이라도 일 정도로 빠르게 사라져 버렸다.

“……왜 저래?”

남은 나만 찝찝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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