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3/182)

8. 정화력

“……, ……같으니라고…….”

투덜거리는 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뭐지……?’

꿈이라기엔 생생했고, 현실이라기엔 묘하게 붕 뜬 느낌.

“……청해서…… 손이…….”

목소리가 뭐라고 잔뜩 욕을 하는 것 같은데 잘 들리지는 않아서 타격은 없었다.

하지만 깊이 잠드는 걸 방해하는 게 좀 짜증이 나서,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얼씨구.”

기가 막힌지 목소리가 혀를 찼다.

그러더니 내 미간을 꾹꾹 누르는 손길이 느껴지는 게 아닌가.

“……빨리 일어나지 못합니까?”

“!”

찬물을 뒤집어쓴 것같이 갑작스럽게 정신이 들었다. 꼭 마법 같았다.

“좋은 말로 해선 안 되고 꼭 수를 쓰게 만드는군요.”

익숙하게 투덜거리는 목소리.

“……엘리야?”

“스승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니, 건방진 제자로군요.”

새벽이 어스름하게 내려앉은 방 안, 엘리야는 현실감 없이 의자에 앉아 턱을 괴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여길……?”

어떻게?

너무 놀란 나머지 눈만 깜빡거리고 있자, 엘리야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론상으로 이 대륙에서 내가 가지 못하는 곳은 없습니다.”

“……그야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고 있는 숙녀의 방에 쳐들어오는 행동이 정당하다고 할 수 있을…… 아야!”

한숨을 쉬며 이쪽으로 다가온 엘리야가 내 머리를 딱 하고 튕겼다.

“무슨 짓이세요?”

황당하고 아파서 이마를 문지르자, 엘리야가 냉엄하게 말했다.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네?”

“대체 어디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니기에, 내 한심하고 멍청한 제자님께서 독 같은 거나 주워 먹고 다니는 걸까요?”

“아.”

이마를 문지르던 나는 조금 놀랐다.

“어떻게 아셨어요?”

“회로가 얽혀 있으니까요.”

깨어 있을 때는 연결이 약해지지만, 잠이 들어 의식을 잃으면 연결도 강화된다고 엘리야가 부연 설명을 해 주었다.

하지만 그 설명을 들어도 잘 이해가 가진 않았다.

“전 회로가 얽혀 있어도 경의 상태 같은 건 잘 모르겠던데…….”

낮이고 밤이고 말이다.

엘리야가 코웃음을 치며 아주 멸시하는 어조로 대답했다.

“그게 나 같은 대마법사와 당신 같은 어린 마법사의 차이죠.”

“아…….”

“쯧.”

엘리야가 혀를 끌끌 차더니, 내 이마에 따뜻하고 흰 빛이 나는 손을 얹었다.

딱밤을 맞은 자리의 통증이 스르르 사라짐과 동시에.

상태 이상: 중독이 해소됩니다!

중독 상태를 극복하여 정신력이 30 오릅니다.

“가, 감사합니다.”

해독제를 먹어서 가만 내버려 둬도 나았을 거란 말은 안 하는 게 좋겠지.

그런데 흥, 하고 코웃음만 칠 것 같았던 엘리야가 뜻밖에 냉엄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누가 이런 짓을 한 겁니까?”

“네?”

“내 제자라고 딱지까지 붙여 놓았는데, 감히 누가 그런 짓을 했냐고 물었습니다.”

“그, 그게…….”

왜 저렇게 화가 났지?

어쨌든 이실직고하면 큰일이 날 것 같았다.

“……비밀이요?”

“하, 비밀이라?”

엘리야의 손이 다시 딱밤을 놓고 싶은 것처럼 꿈틀거렸다.

‘아, 안 돼.’

나는 얼른 말을 돌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나저나 엘리야 경, 절 도와주신 건 다 좋은데요.”

“좋은데, 뭘요?”

“저 지금 아직 잠옷 차림인데…….”

“…….”

“구해 주신 건 참 고마운데…… 상황과 장소를 좀…….”

“……제자가 중독되었는데 그런 걸 가릴 틈이 있었겠습니까?”

엘리야가 투덜거리며 홱 등을 돌렸다. 따뜻한지 차가운지 하나만 해 줬으면 참 좋겠다.

“저, 엘리야 경.”

“왜 부릅니까?”

“용건 끝나셨으면 이만 돌아가 주셔야 저도 옷을 좀 갈아입고……”

“누가 용건 끝났다고 했습니까?”

“그렇게 사람을 벌레 보듯 할 필요까진 없지 않을까요……?”

엘리야가 대꾸도 않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 방에서 나가지 않겠다는 의지가 분명하게 전해졌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옷장을 열고 로브를 꺼내서 잠옷 위에 덧입었다.

“그래서 남은 용건이 뭔데요?”

“웬만한 독을 치료하는 하급 해독 마법은 2서클부터 사용할 수 있습니다.”

“……?”

“당신이 독의 출처를 비밀로 하고 싶은 거야 이해합니다. 대귀족들이란 항상 복잡하고 숨기는 게 많기 마련이니까.”

“그건…….”

“나도 거기까지 추측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단.”

엘리야의 장밋빛 눈동자가 무섭게 번뜩였다.

“명색이 내 제자라는 사람이 어디 가서 독이나 주워 먹고 골골대는 건 용납할 수 없습니다.”

“아니, 제가 스스로 마신 것도 아닌데…….”

엘리야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특훈입니다.”

“네?”

“오늘부터 특훈을 시작하겠습니다.”

“저기, 엘리야 경, 스승님, 잠깐!”

……이라고 외쳐 봐야 소용은 없었다.

나는 첫 수업 날과 똑같이, 눈 깜짝할 사이에 예의 마탑에 도착해 있었으니까.

“2서클이 되면 중독 같은 일로 날 신경 쓰게 하는 일은 없겠죠.”

“즉 그 말은, 쓸데없이 신경 쓰기 싫으니까 실력을 올리란 말이에요?”

“정답입니다.”

……이 냉혹한 인간 같으니라고.

“장담하는데, 일주일 안에 2서클에 도달하게 만들어 주겠습니다.”

“아니, 꼭 그러실 필요는 없는데요…….”

1서클 특훈 때만 해도 사람을 쥐 잡듯이 잡았는데, 2서클이라면 대체 사람을 어디까지 잡아 놓겠다는 말인가?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저으며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엘리야의 책상에 턱 가로막힐 뿐이었다.

엘리야가 그런 날 바라보며 만개한 장미꽃처럼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

“자, 그럼 시작하도록 할까요?”

저건 날 죽이겠다는 말이다.

* * *

“도, 도저히 못 하겠어…….”

허억, 허억.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

엘리야가 그런 나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마류가 이렇게 강하게 흐르고 있는데 어째서 수련에 진척이 없냐는 구박으로 시작해서, 끝내는 자기 마력으로 마류를 더욱 강하게 활성화하기까지 하면서 어떻게든 날 이끌어 보려고 했지만…….

“……정말 도저히 안 되겠습니까?”

이제 나를 보는 눈이 착잡하고 곤란해져 있었다.

“완전히 한계예요.”

“…….”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한시도 천재가 아니었던 적 없는 엘리야의 눈에는, 내가 범재도 아니고 거의 지렁이나 굼벵이 수준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구박도 멈춘 지 오래였다. 엘리야는 당황하고 있었다.

어떻게,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말이다.

“엘로즈 공녀.”

“엘리야 경, 그만 인정하세요.”

나는 잔뜩 지친 목소리로 간신히 중얼거렸다.

“보시다시피 전 당신이 어떻게 손쓸 수 없는 범재랍니다.”

“미안합니다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네?”

이게 무슨 말이야?

의아해하는 날 보며 엘리야가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 이름을 걸고 장담하는데, 당신의 마나 감응 능력과 적합도는 절대 범인 수준이 아닙니다.”

“…….”

“토양으로 비유하자면 비옥한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지금 당신의 몸은 2서클을 이루기에 충분한 그릇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걸 제대로 축적하지 못할 뿐이라고, 엘리야가 말했다.

“그럼 어째서일까요?”

“전들 알겠습니까? 당신이 감을 제대로 못 잡는 것을.”

“…….”

이래서 천재는 재수 없다.

부루퉁해진 내 뺨을 엘리야가 무엄하게도 꾹꾹 누르면서 중얼거렸다.

“제가 보기엔 무의식적으로 마나를 거부하고 있달까…….”

내 무의식이 그런 도움 안 되는 짓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래서 가끔 당신을 보면…… 꼭 마법이 없는 세상에서 온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

뜨끔.

‘어떻게 알았지?’

귀신이네, 이거.

찔리는 주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잽싸게 화제를 진행했다.

“그, 그럼 무의식을 어떻게 하면 바꿀 수 있는데요?”

“답은 하나뿐이지 않겠습니까?”

엘리야의 얼굴에 느긋하게 미소가 번졌다.

“무의식이 견디지 못할 정도로 혹독하게 수련을 하는 수밖에요.”

“……저기 선생님, 아니 엘리야 경. 부디 진정하세요. 방법이 꼭 그것뿐일까요?”

“머리가 둔해 깨닫지 못하면 몸이 고생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사르르 피어오르는 미소가 달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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